당은포로(唐恩鋪路)답사기
1. 글머리에 10여 년 전 당성 복구 경기도 보조비 140억원을 반납한 이래 경기도의 관심도 미약해졌고 몇 번인가 당성 세미나를 해봐도 참가자들의 말장난만 난무한 채 당성에 대한 어떤 .결론을 낼만 한 의견은 나오지 않고 대학과 제휴한 당성발굴도 시원한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하물며 평택은 자기들이 당성이라고 치고나왔으며 당진이 당성이라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으나 화성시에서는 당성하면 산봉우리만을 당성으로 생각하고 실크로드 대장정의 무역항인 당성의 의미를 축소하려 하고 있는듯하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2. 무역항 당성은 어디쯤인가?당성은 원래 한강백제의 토성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를 거쳐 1,000년 이상 번창했던 한반도 최대의 대당 무역항이다.그렇다면 현재 당성은 무역항에 대한 경비를 맡았던 군사기지이며 당나라에서 보냈다는 8명 학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경당이 있던 곳으로 보아야 하며 현재 출토된 유물들의 흔적도 그래 보인다. 그렇다면 배가 떠나던 무역항은 어디인가?
칠곡리, 육일리 설이 있으나 인근이기 때문에 어떤 영향은 잊었을지언정 그쪽은 아니다. 필자는 당성의 무역항은 상안리와 지촌말 사이의 현재 상안리 앞들 지역이라고 확신한다.당시에 당성으로 들어오신 방씨네의 종손이 상안리에서 43세대를 살아오고 있고 상안리 건너편이 지촌말이라는 지명을 볼 때 당시에 들어온 지씨들이 항구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가보면 내륙의 항구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꾸 딴소리들이 나오고 있으나 당성이 폐지되고 고려초 예성항 벽란로 무역항이 옮겨 갈때까지의 당성항은 상안리 앞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청해진이 번창하던 신라말기 몇십년간도 당성항은 유지되었다. 매화리의 매(梅)자는 고려초 매향(향나무를 개고랑에 묻음)을 한 갯벌의 이름이 분명하고 지금도 해일때면 범람하는 매화천은 당시의 뱃길이었음이 분명하다.그 후에 고포리, 마산포, 전곡항등으로 포구가 이동하였으며 특히 마산포의 역사는 임진란 이후의 포구이며 청일전쟁을 전후 대원군 납치사건이 발생했음으로 유명해졌으며 대원군은 마산포에서 하루 밤 자고 배로 어도에 가서 어도 앞 갯고랑에 정박한 청 군함에 승선하였다는 전설이다. 당성을 이상과 같이 정리하면서 헷갈리는 대목이 남양장성과 태행산 고려 토성의 당성과의 관련성 문제이나 전혀 관련이 없다. 당성의 기능과 역할이 없어지면서 당성군은 폐지되고 고려중엽 남양도 호부에 편입된다.그러나 고려말기는 왜구의 침탈이 극심했던 시기임으로 왜구가 서산, 태안뿐만 아니라 당시 남양군이었던 대부도에도 난입하였음으로 고려 토성이 대부도에 설치되었다.남양군이 도호부로 시작했음도 군사시설 냄새가 나는 것이고 왜구가 대부도에 난입하니 남양 관아도 위협을 느껴 남양장성을 구축했을 것 이다. 태행산의 고려 토성도 왜구의 내륙 침탈을 막는 군사시설이었을 것이다. 대부도 고려 토성은 삼별초의 군대가 대부도를 거점으로 하던 시기가 있었음으로 삼별초의 성일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삼별초가 대부도에 있던 시절에는 왜구의 침탈은 없었다. 삼별초가 떠난 후 왜구의 침탈은 극성을 더해갔다.이상과 같은 역사인식을 근거로 해서 신라에서 당성을 오던 무역로를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이 당성을 정립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3. 삼년산성 답사삼국유사에 ‘당은 포로’ 라는 짤막한 구절이 나온다. 신라 계림에서 당성을 가던 길의 이름이 당은 포로라는 얘기이다. 경상도 상주를 거쳐 삼년산성으로 넘어갔다는 기록뿐이다.
그래서 나는 3~4년 동안 경주를 3차례 갔고 안동, 상주를 거치면서 그쪽 길은 분명히 찾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했고 경상도 쪽에서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삼년산성까지는 기록이 분명하니까 삼년산성에서부터 당성까지는 내가 추적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수년간 자료파악에 관심을 쏟았다.드디어 2012년 8월 동행하겠다는 동지 네 분을 만나서 승용차 한대로 삼년산성을 찾아갔다.10년 전 홍수로 삼년산성 동문의 돌문지방이 나왔고 마차가 다닌 흔적이 깊이 파였다고 보도 되었던 그 자리에 가보니 마차바퀴 자국 폭이 167cm가 넘는다는 얘기였고, 황소 두 마리가 들어갈 만한 폭이었고 앞에도 두 마리를 세운다면 소 네 필이 끌던 마차였다.
▲ 삼년산성 문지방에 나타난 우마차 자국 © 박익희 기자 | | 짐칸은 지금 콘테이너 크기 만한 규모였다고 판단했다. 고구려 마차는 바퀴의 축간이 150cm 정도였다고 해설사는 신나게 설명했다. 또 해설사가 설명하기를 성내에는 40여개의 창고터가 있다고 자랑했다. 삼년산성이 진흥왕 이전에는 신라의 최전방이었으나 진흥왕의 한강진출 이후에는 군수기지 및 당성무역의 물류창고였음이 분명하다는 심증이 섰다.다시 성문에서 바퀴자국을 보면서 여기서 나간 마차가 어디로 갔느냐고 해설사에게 물으니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하길래 그것도 모르면서 삼년산성을 해설하느냐고 퉁발이를 주었더니, 선생은 아느냐고 되물어서 나는 그것을 알려고 왔다고 답하고 나서 생각하니 이 사람하고는 얘기가 안 될 것 같아서 청주에 평소 존경하던 해설사님과 토론했던 기억을 정리해보니 삼년산성에서 청주로는 오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통일 신라 시절의 대표적 거점은 충주였고 청주는 고려중엽에 시작한 도시다. 또 그렇게 거대한 마차를 싣고 금강을 건널만한 배도 없었기 때문에 청주로는 오지 않았다는 설명이다.4. 충주산성 답사충주로 갔다는 결론에 도달한 우리는 충주산성으로 향했다. 삼년산성에서 충주로 가는 길은 계곡 소하천을 계속 따라가면 되는 길이었고 거대한 마차가 통행할만한 길이었으며 약 30km 남짓했다.
충주산성에 도착해보니 뒤에는 한강(충주호)이었고 산성자체가 요새 였으며 세마대 독산성을 연상케 하였다. 도저히 무역마차가 산성에는 못 올라갔고 산성 밑에 충주고읍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충주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찾아가려면 진천행이었다. 삼년산성에서 진천까지는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이 교차하는 곳으로 한강을 건너지 않고 금강을 건너지 않고도 육로로만 연결될 수 있는 지형이었고 그 산맥을 따라서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충주에서 진천까지는 40km 남짓, 날이 어두웠으므로 진천의 김유신 생가 답사는 뒷날로 미루고 귀향 하였다.5. 진천의 김유신 생가와 삼남대로가야의 왕족이었던 김유신의 생가가 진천이었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으나 김유신의 아버지가 신라의 장수로서 당시 최전방이었던 진천의 장수였으며 그래서 김유신이 진천에서 태어났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김유신생가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산악능선 넘어가 바로 천안이었다. 또 천안과 진천사이의 유서 깊은 고갯길이 잊었다.진흥왕 이후 신라는 진천에 주둔하고 산 넘어 천안의 백제군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김유신 생가터는 그런대로 조성이 잘되었고 관광객도 드물지 않았다.삼국시대가 끝나고 통일신라시대가 도래하면서 호남충남의 백성들이 천안까지 와서 고개를 넘어 진천으로 오고 신라사람들도 진천으로 오면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삼남대로가 열리게 되었다.6. 칠장사의 비밀과 일곱도적 이야기김유신 생가터에서 진천 방향으로 2km쯤 후진하니까 안성으로 넘어가는 삼남대로가 나타났다. 삼남대로를 달리면서 안성 진천의 경계를 넘어 안성지단에 들어서니 칠장사 입구가 나타났다. 나는 칠장사를 다섯 번은 갔지만 칠장사에는 윤민용 선배가 해설을 하시는 곳이고 죽주산성까지 삼남대로를 안내 해주기로 하셔서 간 것이다.
칠장사는 통일신라 직전 선덕여왕 시절에 지은 절로서 그 골자기에 숨어살던 일곱 도둑이 재산을 시주해서 지은 절이란다.조선중엽에 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갈때 칠장사에서 자고 삽남대로를 따라 서울로 갔는데 꿈에 도인이 나타나서 칠언절구의 시를 읊어주었는데 생생이 기억하고 과거장에 가니 바로 꿈의 그 시가 과제로 출제되어서 장원급제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지금도 중고생 어머니들이 칠장사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몽중시를 얻어가면 합격한다는 속설이 퍼져서 입시철엔 어머니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하며 나도 아들, 딸에게 어사 박문수의 몽중시를 얻어다가 준바 있다.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일곱 도둑이 도적질을 할 때 어디를 털었는가?이다.
▲ 안성 칠현산의 칠장사, 몇 년 전 드라마 임꺽정을 촬영한 곳이다. ©박익희 기자 | | 한국제일의 안성시장이나 유기전은 임진란 이후에 번창했음으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고 통일신라시대 전후라면 삼남대로가 번창하고 신라의 무역마차가 당성으로 향하던 시절임으로 칠장사의 일곱 도적은 삼남대로에서 당성을 오고가던 무역짐바리를 털었다는 얘기이며 칠장사의 도적과 당성무역은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또, 어사 박문수는 천안 입장면 사람인데 평택으로 가지 않고 칠장사에 와서 잠을 자고 삼남대로를 따라서 서울을 갔다면 당시까지도 평택은 갯벌이며 통행이 불가능 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천안 입장 사람인 박문수와 공주 정안면(휴게소) 사람인 맹사성이 평택사람인양 날조하려다 망신을 당했다는 전언을 들은 바 있다.여기서 삼남대로를 정의할 필요가 있는데 삼남대로는 통일신라 시절부터 고려, 조선 중엽 까지 1,000년이상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사람들이 함께 다니던 길을 말하여 진천에서 죽주산성까지의 길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진천 이전은 각자 온 것이고 가령 조령, 새재를 삼남대로라 할 수 없고 영남대로이며 죽주까지 오면 각자 백암 이천으로 서울을 갈 수 있고 양지로도 갈수 있고, 처인성으로 올라와서 용인 쪽으로 갈수도 있고 병점의 떡전거리로 와서 망포리쪽이나 반정리쪽으로도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갈양사(용주사) 앞으로 해서 수기, 분천 상리, 내리, 군포, 의왕, 과천, 남태령으로 갈수도 있었으니 어느 길을 삼남대로라 하기는 어렵다.그러나 구집이 임진란 이전 이후의 서울 가던 주(主)로를 말하자면 갈양사 앞으로 해서 수기, 분천, 내리, 군포, 의왕, 남태령 길을 삼남대로라 할 수 있을 것이다.7. 죽주산성 답사윤민용 선배의 안내로 안성군 죽산면의 죽주산성에 도착하였다. 이 죽주산성은 처인성 독산성과 달리 고구려성이다. 고구려가 한강변의 백제를 몰아내고 충주까지 점령하여 100여년을 지배하던 장수왕 시절 남진 고구려가 전진기지로 쌓은 성이다.
성안에는 샘물이 있었고 1개 중대 병력 정도 주둔할 수 있는 성이었다. 신라의 무역마차가 이 성에 들어가기는 힘들 듯 하였고 인근에 비석마을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있었는데 맹사성이 자고 간 집터도 남아있다는 얘기고 각종 비석이 많아서 비석마을이라면 이 마을이 역자의 사연이 많고 신라의 무역상들도 머물러간 마을이 분명 하였다. 진천에서 죽주산성(비석마을)과 의 거리는 40km 내외였다. 날이 어두워 귀향하였다.8. 처인성 답사2012년 11월 우리는 처인성답사를 떠났다. 처인성은 고려승려 김윤후가 몽고장수 살례탑을 활로 쓰러뜨린 전설이 내려오는 고려성으로도 알려졌지만 한강 백제가 쌓은 독산성, 수원고읍성과 같이 백제 토성이라는 전설이었다.
안성의 죽주산성과는 직선도로가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의 당성으로 향하던 무역로가 처인성을 지난 게 분명한 만큼, 처인성은 백제토성임이 확실해 보였다.규모나 형태면에서 죽주산성하고 비슷하였고 야산에 위치했다. 최근에 인근 도로 공사장에서 신라유물이 다수 발견된 보도는 처인성이 당성 무역로의 거점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남사면의 면사무소가 인근에 있었다. 남사면의 면사무소 소재지 마을이 2,000년 이상 된 마을이라고 생각하니 감회가 무량하였으며 신라 상인들은 남사면 소재지 마을에서 묵었거나 인근에 유물이 출토되는 지점에 사라진 마을에서 묵었는지는 모른다.9. 독산성과 수원고읍
처인성에서 독산성은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산성이 험했으므로 무역마차가 독산성으로 가지는 않았고 수원고읍으로 직행하였으리라는 생각을 했다.동탄 석우리 고개를 거쳐 병점 떡전 거리로 해서 안녕리로 거쳐서 갈양사 앞으로 해서 철거된 수원고읍에 와서 하룻밤을 쉬었을 것이다. 떡천거리는 처인성에서 수원고읍으로 오던 길목으로 처인성에서 아침먹고 떡천거리를 오다보면 떡먹을 시간은 되겠지만 신라시대부터 떡 장사를 했다는 얘기는 좀 그렇다. 하여간 병점이란 이름은 오래된 이름이다.수원고읍에서 하루 묵고 당성 가던 길은 남양부사가 융건릉을 참배하던 길을 참고 하였다. 아직 시간이 있었음으로 수기리를 거쳐서 분천으로 들어가서 노루고개를 바라보고 왕림에 와서 노루고개를 다시 쳐다보고 상기리로 해서 청요리를 넘어가지 않고 창곡리 길을 따라 금산사 옆에 길을 나와 방아다리를 가리키며 나머지는 훗날을 기약했다.10. 수원고읍에서 당성까지수원고읍성 자리는 과거의 경성고 언덕에 흔적이 있고 백제토성이라는 고증이 있고 보면 백제시절에 처인성, 독산성, 수원고읍성이 거의 비슷하게 당성까지도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수원고읍 자리는 정조 때 철거된 융건릉 자리를 비롯해 와우리 지단을 포함 한 것으로 보이며 안녕리는 정조 이후에 조성된 마을이며 갈양사(용주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고 보면 백제나 고구려 시절에는 없던 절임이 분명하다, 충청도 공주에 가면 해설사들이 한강 백제를 부정하는 분들이 계시다. 궁성이나 왕릉의 흔적이 없으므로 한강 백제의 실체가 없다는 얘기이고 백제는 사비 백제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한강 백제의 실체는 고구려, 신라가 들어오기 전에도 처인성, 독산성, 수원고읍성 그리고 당성이 있었다는 사실이고 한강백제가 대당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는 증거가 되며 그 당시에 격전지도 아니었던 지역에 군사시설인 처인성이나 독산성, 수원고읍성을 설치했다는 사실도 당성 무역로 보호가 그 역할이었다는 증거가 된다.(칠장사의 예에서 보듯이)또, 어떤 분은 한강 백제가 있었다면 한강에서 직접 당나라로 갈 것이지 왜 송파에서 처인성까지 와서 당성으로 갔겠는가 라는 의문도 하시지만 강화도 광성보(신미양요때 어제연 장군의 전몰지)에 가서 선돌목을 바라보고 멀리 한강 입구의 유도를 바라보면 한강 하구가 험로여서 백제시절에는 안다니던 길이었고 삼남의 세곡선이 한강을 따라 올라왔다고 하지만 인조 이후의 얘기일 것이고 만약 그 시절에 한강 하구가 세곡선이 다닐 만큼 익숙한 뱃길이었다면 인조가 선돌을 죽이지도 않았을 게 아닌가? 하여간 한강 백제는 처인성을 거쳐서 당성에 왔음이 분명하다.2013년 3월 수원고읍에서 당성 가던 길을 답사하기로 했다.금산사 앞에서 방아다리(자안리)를 거쳐 하저리 입구에서 남양면 무송리(장술터)로 가는 길을 들어섰다. 장술터는 구한말까지도 저팔면 사람들이 남양관아에 가던 길이고 남양장에 갔던 길이다. 남양군수가 융건릉에 참배하러 오던 길목이기도 했으며 장술터라는 이름도 왕래하던 사람들이 한잔하고 갔던 마을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장술터에서 시청 앞에 대로를 따라 시청 앞에 오니까 그 때도 이 길이 있었느냐는 일행의 질문이다. 신빈김씨가 세종조 때 사람이고 왕비의 무덤을 쓴 것을 보면 그 때도 길이 있었고 그 이전 1,000년 전에도 당성 가던 길이었다고 답했다.(옛날 길을 별로 변동이 없으니까)남양관아 앞을 지나 당성으로 가는데 은장 길을 택하지 않고 산모퉁이를 돌아 마도 화학공업단지 쪽의 길을 택했다. 은장 고갯길은 최근에 개설된 도로이며 삼일만세 때 사강에서 맞아 죽은 남양 주재소장 노구찌가 자전거를 타고 사강으로 가던 길도 은장고개가 아니었다.계속 가니 청원리 초등학교 앞 등성이 길이 나타났다. 이등성이야말로 없었다면 사강, 서신이 섬이 될 뻔한 언덕길이다. 마도면사무소 쪽도 바다였고 청원리 쪽도 깊숙이 바다였기 때문에 육지의 유일한 통로였음으로 백제, 고구려, 신라가 다 다닌 길이었다. 조금 가다가 금당리 길로 접어들었다. 마을회관 앞에 갔더니 어른들이 왜 왔느냐고 묻기에 우리는 화성시 사람들인데 당성 가던 길을 찾으려 왔다고 했더니 노인한분이 신바람이 나서 금당리 마을 뒷산으로 데리고 갔고 그 곳에는 산등성이로 해서 백곡리로 가던 고색창연한 길이 있었으며 600년 넘었다는 음나무가 화성시 보호수로 서있었고 옛날 할아버지들의 말 타고 왔다 갔다 하던 길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말 타고 장거리를 오다보면 말이 지쳐 죽어서 묻어주었다는 말 무덤도 여러 곳에 길옆에 있었다는 설명이었다.그들이 가르쳐준데로 백곡리로 들어왔고 우리는 마을회관을 찾아갔다.아무도 없었고 회관 옆에 식당주인은 당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고분답사는 훗날을 기약했다.노인을 만나면 백곡리 토성과 백곡리 고분군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백곡리 토성은 백제토성임이 분명하고 백곡리 고분군은 백제 이전의 삼한시절 무덤과 백제초기의 무덤이 혼재해있다는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원효가 수원고읍에서 아침에 떠나 걸어서 백곡리에 왔다면 날이 어두워졌을 것이고 백곡리에서 길을 헤매다가 토굴에서 잤다면 그 토굴은 고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백곡리 고분군이 백제무덤이었다면 3~400년 전이고 삼한시절이었다면 500년 이상 된 무덤이었을 것이고 큰 무덤이 수백 년간 풍우에 시달리면 봉분이 무너지고 내광이 토굴처럼 보였을 것이다.잠을 자다가 물을 마셨다면 무너진 무덤에서 가능할 수 있는 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해골바가지 물이었다면 그 해골은 무덤주인의 해골일 것이고 자기 집을 찾아온 대사에게 주인은 천하보약을 대접한 것이다. 토굴에서 나온 원효는 유심론을 개창한다. 불심이 내 심중에 있으니(一切唯心造) "내가 바로 부처다.“ 라고 외친 원효는 내가 부처인데 당에 가서 서역에 간들 배울 것이 무엇인가? 금당리를 거쳐서 청원리를 거쳐서 수원고읍으로 돌아갔고 계림으로 귀환해서 한국불교의 개척자가 된 것이 아닌가? 내 생각이다. 의상은 그대로 백곡리를 지나 당성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의상은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김춘추가 삼국통일을 위해 평양을 간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로 돌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갈양사(용주사)의 창업자가 의상이라고 한다.귀국 후에 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백곡리를 빠져나오니 바로 지촌 말이었다. 지촌말 건너 당성은 제쳐두고 상안리로 향했다. 당성에 가봐야 석성은 당성무역과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시설이고 망해루는 임진난이후 망루이며 성황당은 망해루가 불탄 후 인근의 주민들이 민간신앙으로 조성되었으니 당성무역과 관련이 없다.상안리 마을을 깊숙이 들어가 보니 고색창연한 마을이었고 역사의 냄새가 풍기는 듯 했다. 신라의 무역짐은 상안리에서 고국에서 마지막 밤을 자고 산동반도로 떠났을 것이다. 만약 발굴을 한다면 상안리의 고가(古家)터를 발굴해야 할 것이고 상안리 앞의 들과 매화천 일대를 발굴해야 한다고 확신하며 상안리 언덕에 앉아서 당나라로 떠나던 무역선들을 연상해 보았다. 끝가지 동행해주신 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조진옥선생님과 최경순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2013년5월7일 글/ 이길원, 화성시 문화관광해설사. 전 한국문화관광해설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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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를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많이 활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