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친구/황옥순
이른 아침 채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았을 때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 내 예감은 맞았다.
"민정이예요."
원주에 가서 살고 있는 소꿉친구 딸이다.
"그래, 민정이구나, 이른 아침에 무슨 일로 전화했니?"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어제 너희 엄마랑 반갑게 통화를 했고 책 잘 받았다며 밥 한번 먹자고 약속까지 했는데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느냐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친구 딸은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전화선 너머로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언성을 높여 하는 말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던 눈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말을 이은 건 친구 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엄마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하고는 더는 할 말을 잊은 듯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소꿉친구 셋이 있었다. 제주에 살고 있는 친구는 한집 건너 윗집에 살았고, 큰언니의 제자였던 죽은 친구는 우리가 사는 곳에서 좀 떨어진 동네에 살았다. 소꿉친구들과의 묵은 얘깃거리는 실패에서 실 풀리듯 끝이 없을 만큼 많고 많았다.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들어선 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장이었을 때 놀이터 삼아 놀러 다니던 일, 포도 철이면 포도 산지로 유명했던 안양으로 몰려가 포도나무 아래 앉아 포도 빛으로 물든 혓바닥을 서로 쳐다보며 깔깔 거렸고, 배가 누렇게 익을 때는 태 능 먹 골 배 밭에서 달콤한 배로 배를 채우던 일, 자하문 밖으로는 새콤한 자두를 먹으러 쏘다녔던 일들이 획획 스쳐 지나갔다. 한번 들어가면 영화 두 세편을 연속 상영 했던 터줏대감 격인 광무극장은 우리들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큰언니 제자였던 친구는 친정 쪽으로 모두 당뇨병 내력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 그녀 형제들이 그 병으로 돌아간 걸 잘 알고 있었다. 친구도 예외는 아니어서 심하게 당뇨병과 싸우며 투병 중이었다. 당뇨 합병증으로 혈액투석 중이었고 심장병까지 얻어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친구였다. 친구 부부는 투병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원주로 집을 옮겨 몇 년을 잘 견디며 살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당뇨 후유증으로 발가락 수술 등 여러 번의 입원을 거듭하며 잘 견뎌 왔는데 느닷없는 사망 소식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더구나 하루 전 반갑게 통화까지 했었지 않은가. 갑작스런 소식에 전화를 끊고 난 후 한동안 서성거리며 마음을 진정 시키느라 애써야 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아서 다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한동안 일었다.
한 해 두 해 세월을 더하면서 축하하고 기뻐해야 할 일에 참석하는 일 보다, 망자와 마지막 인사를 하러 장례식장을 찾게 되는 일이 잦아졌다. 더군다나 너나들이였던 소꿉친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마음이 허둥대는 걸 꾹꾹 눌러 가라앉혀야만 했다.
두어 해 전 불알친구를 먼저 떠나보낸 남편이 멍하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걸 본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 사후에 대한 얘기를 오래도록 진솔하게 나누며 쓸쓸하게 웃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 부부는 각자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대하면서 죽음 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걸 깨닫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에게 죽음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걸 일깨워 주는 일이 자주 생기고 참석하게 된다.
세상 등진 친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러 어디로 가야할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부음을 전해주는 딸에게 묻지도 않았거니와, 그 애도 알려 주지 않고 울다가 전화를 끊었기 때문이다. 원주까지 가야한다고 당연하게 생각 했는데, 근거지가 서울이기도 하고 지병을 치료하며 수술했던 서울 순천향병원으로 시신을 모셔 온 모양이다. 장례식장이라는 친구 딸의 음성은 어제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에게만 연락을 했다며 다른 친구들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서둘러 친구들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했다. 일상 안부를 묻는 친구들 말끄트머리에 그녀의 죽음을 넌지시 알려 주었다.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확인하며 놀라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제주에 사는 소꿉친구는 우느라고 제대로 통화를 할 수 없어 잠시 전화를 끊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다가 통화를 했다. 꼭 연락을 해야 하는 친구들에게 그녀의 죽음을 알리고 만날 약속을 잡아 두었다.
친구들과 만나 문상을 가기로 한 날이다. 순천향병원을 가려면 이촌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다가 환승역을 지나쳐 버렸다. 되돌아 와 한남역에 내려 약속장소인 역무실 앞에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자주 다니는 곳이 아니어서 약속 시간 보다 30여분 빨리 도착했다. 역무실 앞은 한 데 바람이 몰아치는 게 여간 추운 게 아니었다. 역무원이 오랫동안 서성거리는 나를 보더니 앉아 기다리라며 역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차를 끓여 주며 마주보고 앉더니 어디를 가느냐고 다시 물었다.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이라는 말과 소꿉친구라는 말에 역무원은 자기 일처럼 시무룩해지더니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나 보다. 역무원은 당신 어머니 생각에, 나는 친구 생각에 시무룩해져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 역무원은 볼일이 생겼는지 역무실을 비웠다.
모서리 바람이 추운 곳에 서서 기다리는 나를 보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는 얘기를 하며 쓸쓸하게 웃는 역무원을 보며 막연하게 효자였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약속 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 나와 달리 친구들은 시간을 한참 넘겨 역무실에서 한 시간여 동안 기다려야만 했다. 다른 역무원이 동전 주머니 몇 개를 가지고 들어와 계산을 마치느라 수시로 드나들었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 안절부절 하는 내게 역무원은 편히 앉아 계셔도 된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허둥대며 친구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좀 늦는다는 친구들 문자에 역무실에 있다고 알려주어서 그녀들은 곧바로 역무실로 들어왔다. 편히 앉아 기다리는 나를 보고 친구들은 너 나 없이 역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역무원은 역사 밖에까지 나와 친절하게 병원 위치를 알려 주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는 잰걸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둘째 날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이 침묵만 흘렀다. 남편과 두 남매, 손녀딸 이렇게 네 명이 영정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친구 남편을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 남편도 나를 보자 눈물을 쏟아냈다. 친구 남편은 총각 때 내 친구가 좋아 막무가내로 쫓아다녔었다. 친구는 나를 시켜 싫다는 뜻을 전해달라고 했고 나는 둘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훼방꾼 노릇을 했었다. 그런저런 사연을 뒤로 하고 결혼에 골인한 그들은 우리 부부와 가깝게 지내왔다. 만나기만 하면 친구 남편은 그들의 결혼을 방해한 내 얘기는 빼놓지 않고 화제에 올려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지병으로 예민해진 친구가 안방에서 혼자 숙면할 수 있도록 친구가 잠들고 나면 거실로 나와 소파에서 쪽잠을 자며 늘 긴장하고 지냈다며 나를 붙들고 꺽꺽 울어댔다. 밤에 별다른 기척이 없어서 잘 잤으려니 하고 아침에 들어가 보니 사망한 사실을 알았다며 가슴을 두드렸다. 숨을 거두는 순간 얼마나 애타게 남편을 찾았을까 싶은 게 한으로 남는다면서 다시 눈물을 쏟았다. 오랫동안 병 치례를 하면서 남편이 곁에서 모자람 없이 잘 해 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했으면 친구도 고맙게 생각하고 편히 눈 감았을 거라고 위로해 주었다.
염을 마치고 허탈한 기색으로 돌아온 가족들을 위로하고 장례식장을 나왔다. 부산에 있는 아들과 손녀는 보이는데 며느리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물었더니 대답을 얼버무리는 딸을 보며 친구가 아들네 문제로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겠구나 싶어 가슴에 휑한 바람이 일었다.
부음 소식은 연달아 들려왔다. 소꿉친구를 보내고 난 후 일주일 만에 친구의 스승이었던 친정 큰언니가 돌아갔고, 다시 며칠 후 남편의 바로 위 형인 아주버님이 내 친구처럼 오랜 당뇨로 투병하다 돌아가셨다. 웃어른들 말씀에 제사 몰려 있는 걸 가리켜 죽음도 유행 번지듯 한 몫에 돌아가신다는 말이 떠올랐다.
축하할 일은 뜸해지고 문상 갈 일이 잦아진 요즘, 차분하게 주변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 지금쯤이라는 생각이, 희희낙락거리며 사는 내 머릿속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왔다.
*서울 출생
*산문집<노을, 속살을 드러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