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과 기묘사화
중종반정 후에 연산군 때의 폭정을 바로 잡고자 신진학자
조광조를 등용하여 정치적으로 일신하였다.
중종이 즉위한 후에도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대립은 계속된다.
중종의 신임을 받든 사림파의 조광조는 훈구파를 비판하고
김구, 김정, 김식 등 젊은 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을 장려하였다.
문민정치를 구현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종전
제도를 혁신하려 했다.
도덕정치를 내세우며 현량과라는 과거제도를 신설하여
인재를 뽑는데 문장만을 치중하지 않았다.
남곤 같은 문장가는 싫어했고, 반정 공신중에서 소인배가
많으니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하니, 심정등 공신들 마음이 불편하였다.
남곤, 심정등 훈구파 대신들은 사림파 세력의 성장에 불안을 느껴겼다.
중종 14년(1519년)에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광조 일파의
사림파를 몰아낸 사건이 기묘사화다.
중종도 처음과 달리 조광조 일파의 도학적인 언행에 협오를 느겼다.
훈구파의 남곤, 심정등이 홍경주의 딸이 희빈으로
중종을 모시고 있는 것을 이용했다.
홍희빈은 조광조 일파가 공신들을 제거하고
왕이 되려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대궐의 나뭇잎에 감즙(甘汁)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4글자를 썼다.
글자를 벌레가 파먹게 하여 이것을
증거로
임금에게 보여 충격을 주기 위함이었다.
주초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해석으로 임금이 보고 마음을 움직였다.
이 사건으로 100여명이 체포당하여 사형을 당하거나
외방으로 귀양을 갔다.
이 사화 때 당한 인물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하여
후세에 추존하였다.
사립파가 내세웠던 개혁정책이 모두 페지되고 정계에서
밀려나 시골로 쫓겨났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6월.
편집자, 대구 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