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시와 상인의 발달 - 지방 상업과 유통의 중심지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源波內津 客兒褓負
(원파내진 객아보부)
덕원 원산장·봉산 은파장·안성 읍내장·은진 강경장이요, 객주와 중도아 그리고 보부상이다.
源(근원 원) 波(물결 파) 內(안 내) 津(나루 진)
客(손 객) 兒(아이 아) 褓(포대기 보) 負(질 부)
1).17~18세기 조선의 지방 상업과 대표 향시(鄕市)들
조선 후기 들어 향촌(鄕村 : 지방) 사회는 농법(農法) 및 농사기술의 개량과 대규모의 농지 개간을 통해 빠른 속도로 농업 생산력을 발전시킵니다. 특히 새로운 논농사 기술인 이앙법(移秧法 : 모판을 만들어 싹을 틔운 후 자라면 논에 옮겨 심는 모내기 농법)과 밭농사 기술인 견종법(畎種法 : 밭이랑과 밭고랑을 내고, 밭고랑에 보리·조·콩 등의 씨앗을 뿌리는 농법)은 농촌 사회에 대 변동을 가져왔습니다. 이렇듯 농법과 농사기술이 개선되면서 농산물의 수확량이 크게 증가하자, 농촌 사회 경제는 크게 활력을 띱니다. 더욱이 농업 생산력이 자급자족의 수준을 벗어난 농민들은 주변 시장에 내다 팔 각종 특용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업적 농업은 시장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한편 상품화폐의 유통을 촉진시켰습니다. 농촌 사회의 급속한 변화 속에서 대규모로 토지 소유를 늘리며 막강한 경제력을 갖추게 된 지주(地主)와 부농(富農) 그리고 시장에 내다 팔 잉여 농산물과 특용 작물 재배로 경제적 여유를 회복한 일부 자작농(自作農)들은 상인들이 판매하는 각종 상품을 구입했기 때문에, 어업과 수공업 그리고 상업에 이르는 경제 전반이 크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한양을 비롯해 전국 방방곡곡에 장시(場市)가 들어서고 또한 직업적인 상업 활동에 나선 사상인(私商人)이 급증하게 된 사회경제적 배경에는, 이와 같은 농촌 사회의 대변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숙종(肅宗) 4년인 1678년에 금속 화폐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전국에 유통시키는 결정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 역시, 향촌(鄕村 : 지방과 농촌)에서의 시장 경제 발달에 따른 상품-화폐 교환이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향촌의 시장 경제와 상품-화폐 교환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은 전국 곳곳에서 대개 5일의 간격을 두고 열리던 장시(場市)였습니다.
주변 농촌을 하나의 상권(商圈)으로 아우르는 지방 고을에서 열린 장시는 보통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을 기준으로 열린 5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보통 한 지방 고을에 다섯 여섯 곳의 장시들이 있었기 때문에, 실제 5일장은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열렸습니다. 이렇듯 한 고을에서 5~6곳의 장시가 날짜만 바꾸어 한 달 내내 5일장을 열었기 때문에, 시장을 통한 상품-화폐 교환이 급증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전국에 분포한 지방 장시의 숫자만 무려 1,000여 개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기록은 조선 조정의 공식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이 국정(國政)에 참고할 수 있도록 재정(財政)과 군정(軍政)의 상세한 내역을 적은 기록을 모아놓은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경기 102곳·충청도 157곳·강원도 68곳·황해도 82곳·전라도 214곳·경상도 276곳, 평안도 134곳, 함경도 28곳 등의 향시(鄕市 : 지방 장시)가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기록에는 전국 1,000여 곳의 지방 장시를 대표하는 15곳이 특별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源波內津(원파내진)'은 함경도의 덕원(德源) 원산장(元山場)·황해도의 봉산(鳳山) 은파장(銀波場)과 경기의 안성(安城) 읍내장(邑內場)·충청도의 은진(恩津) 강경장(江景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4곳은 모두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기록하고 있는, 조선 후기 지방 상업을 대표하는 향시 15곳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외 『만기요람(萬機要覽)』에서 언급한 11곳의 대표 향시는, 경기 광주(廣州)의 사평장(沙坪場)과 송파장(松坡場) 그리고 교하(交河)의 공릉장(恭陵場)·충청도 직산(稷山)의 덕평장(德坪場)·전라도 전주(全州)의 읍내장(邑內場)과 남원(南原)의 읍내장(邑內場)·강원도 평창(平昌)의 대화장(大化場)·황해도 토산(兎山)의 비천장(飛川場)과 황주(黃州)의 읍내장(邑內場)·경상도 창원(昌原)의 마산포장(馬山浦場)·평안도 박천(博川)의 진두장(津頭場) 등입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 나오는 이들 향시 가운데, 혹시 독자들이 살고 있는 동네 주변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곳이 있는지 한번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2).조선의 상업을 일군 역군들 - 객주·중도아·보부상
조선 후기 한양과 지방 장시를 무대로 활동한 사상인(私商人) 계층은 크게 행상(行商)과 좌상(坐商)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상은 글자 뜻 그대로, 일정한 공간에 거처하지 않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상업 활동을 하는 상인입니다. 반면 좌상은 일정한 공간에 거처하거나 상점(商店)을 열어 장사를 하는 상인을 말합니다. 행상을 대표하는 상인이 보부상(褓負商)이라면, 좌상을 대표하는 상인은 객주(客主)와 중도아(中都兒) 등입니다. '客兒褓負(객아보부)'는 이렇듯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사상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객주와 중도아 그리고 보부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객주와 중도아는 생산자 및 상품 소유주-소매상인-소비자의 중간에서 매매와 유통을 도맡아 한 일종의 '중간 상인'입니다. 이중 객주는 전국의 교통 및 상업 중심지에서, 생산자 혹은 상인들로부터 상품을 위탁받아 판매하거나 매매를 알선하는 한편, 물품을 보관·운송하거나 상인들에게 숙식(宿食)을 제공하고 일정한 수수료를 취득한 중간상인 계층입니다. 특히 이들은 상인들의 자금대출 및 교환은 물론 어음의 인수·할인 등 금융업자 역할까지 한 조선 후기 상업계의 '큰 손'이었습니다. 객주는 상대하는 상인 계층이나 영업 형태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청(淸)나라 상인만을 상대한 객주는 만상객주(灣商客主), 전국을 무대로 장사를 하는 보부상만을 상대한 객주는 보상객주(褓商客主), 금융업만을 전문으로 하는 객주는 환전객주(換錢客主)라고 불렸습니다. 또한 취급하는 물품에 따라, 조리·솥·바가지 등 백성들이 집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품을 다룬 무시객주(無時客主), 야채류와 과일을 주로 취급한 청과객주(靑果客主), 생선 및 건어물을 전문으로 한 수산물객주(水産物客主 : 혹은 해산물객주), 곡식을 전문으로 취급한 곡물객주(穀物客主) 등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중도아는 생산자 및 물품 소유주와 소매상인의 중간에서 도매업(都賣業)을 전문으로 한 상인 계층입니다. 앞서 살펴본, 시전(市廛) 상인들의 본거지인 종루(鐘樓)와 더불어 한양의 3대 상권을 형성한 이현(梨峴) 및 칠패(七牌)는 이들 중도아들이 주로 활동한 중간도매시장이었습니다. 이현(梨峴)과 칠패(七牌)는 어물전(魚物廛)의 도매시장이었는데, 18세기 들어 이곳의 중도아들은 종루 시전상인의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을 위협하는 가장 큰 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즉, 사상인(私商人)인 경강상인(京江商人 : 서울과 한강을 주무대로 활동한 상인집단)과 직접 연결하여 어물(魚物)을 독점 유통하는 체계를 확보함으로써, 시전상인들을 시장에서 배제시켰습니다. 경강객주(京江客主)와 중도아들이 힘을 합쳐 시전상인들이 독점해 온 어물(魚物) 시장 및 유통체계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 한양 어물전(魚物廛)의 상권(商圈)을 둘러싼 사상인(경강상인 및 중도아) 계층과 시전상인들의 갈등과 대립은, 조선 후기의 시장 및 유통체계의 변동 추이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보부상은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을 합쳐 부르는 말입니다. 이들은 봇짐을 이고 혹은 등짐을 지고 발품을 팔아,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물품을 판매한 상인들입니다. 객주나 중도아가 소매상인을 주로 상대한 '중간 상인'이었다면, 보부상은 전국의 향시를 돌아다니며 소비자를 직접 상대한 '걸어 다니는 소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부상은 삼국시대의 기록에도 나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상인 계층입니다. 이들은 보통 취급하는 물품에 따라 보상(褓商 : 봇짐장수)와 부상(負商 : 등짐장수)으로 나뉘었습니다. 보상이 약이나 장신구 혹은 종이·필묵 등 부피는 작지만 값이 비싼 상품을 보자기에 싸거나 질빵에 메고 다니며 판 반면 부상은 생선·그릇·소금·옹기처럼 부피가 크고 무겁지만 값은 싼 상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며 팔았습니다. 조선 전기에도 상당한 숫자에 달했던 이들 보부상들은 신변보호 및 상부상조 그리고 자신들의 권익 보호와 관청의 착취를 막을 목적으로 행상단(行商團)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전국 방방곡곡에 장시(場市)가 들어서고 상업으로 인한 이익이 크게 확대된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이전의 행상단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보부상단이 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보부상단은 관청과 결탁하고 객주·중도아들과 힘을 합쳐 특정 상품을 독점 판매하거나 향시를 통제했습니다. 이 때문에 보부상단에 속하지 못한 일반 보부상들의 피해가 매우 컸습니다. 그러나 규모와 조직력을 갖춘 보부상단의 활발한 상업 활동은 지방 장시를 키우는 한편 전국적으로 새로운 유통 및 교통망을 개척하는 등 긍정적인 작용도 했습니다. 여하튼 보부상은 객주·중도아와 더불어 조선 후기 시전상인들을 대체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사상인 계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