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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얼마 후면 대통령 선거인데 모두 누구를 뽑을지 정하셨습니까?
아직 정하지 못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통령은 정치적인 능력도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능력이 꽃필 수 있는 것은 덕이라 생각합니다.
덕은 있는데 정치적 능력이 없는 것도 문제고,
능력도 좋고 아는 것은 많은데 인성의 덕이 안 보이는 것도 문제겠죠.
정치적인 능력과 덕은 대통령뿐 아니라 지도자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죠.
서로 비방하는 소리가 지겨워서 며칠 전부터 TV 뉴스를 아예 보지 않습니다.
제가 만일 후보로 나간다면, 일단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하고 싶어요.
그런 후, 그런데 나도 그 못지않게 자신 있으니, 믿고 찍어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와중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더욱 제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덕과 인격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합니까?
눈입니까? 귀? 아니면 손가락?
그렇죠, 입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에서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말씀은 회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집회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렇게 제1독서, 제2독서, 복음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집회서 27,4)’
정치인들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제가 늘 신자들에게 집회서 많이 읽으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집회서 27,5)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집회서 27,6)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집회서 27,7)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루카 6,45)
오늘 복음 맨 마지막이 이 말로 끝나죠.
모두 같은 이야기이죠.
마음에서 흘러넘치는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겁니다.
사람의 덕과 인격은 입에서 나온다. 즉 말에서 나온다.
제가 아마 교우들 피정시키면서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 중 하나가 ‘거룩할 성(聖)’자에 관한 이야기 일 겁니다.
성인은 글자 뜻 그대로 귀와 입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혀를 다스리는 자가 자기 영혼을 다스린다고 합니다.
혀는 배의 노와 같아서 인생의 성숙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합니다.
혀와 말은 같은 동의어지요?
혀가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침도 질질 흘리게 됩니다.
참으로 말은 지나치게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에는 큰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제가 많이 인용하는 집회서 28장 17절에서 18절 말씀을 다시 인용해봅니다.
‘매에 맞으면 자국이 남지만, 혀에 맞으면 뼈가 부러진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쓰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고상한 사람은 역시 하는 말과 행동에 예의가 있고 단정하고 품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천한 사람은 말과 행동이 천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입으로 흘러넘친다고 했죠?
들어가 있는 것이 천박한데 나오는 것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말은 이처럼 사람의 됨됨이를 거짓 없이 드러내 줍니다.
오늘 독서처럼 성서는 말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은 곧 인격 그 자체이기에 신중해야 하고, 말이 아닌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2015년 배티성지에 있을 때 큰 교통사고로 앞뒤로 갈비 8대가 나갔습니다.
한 6개월 동안 침대에 누워 자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날밤을 새웠죠.
부러진 8대 중 3대를 3조각씩 나서, 하나는 위쪽으로 하나는 밑으로 내려왔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한두 달 지나니 위에 있던 놈이 밑으로, 밑에 있던 놈이 위로 올라와 일자를 만듭디다.
그 속에 네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참 오묘하죠.
그런데 이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나니, 날이 궂은날은 몸이 더 아팠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2번 정도씩 진천에 온천 나오는 곳에 다녔는데,
내가 갈 때마다 꼭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60대인 것 같은데, 같이 나올 때 보니 차도 몇억짜리를 타고 구두도 매일 닦아요.
저는 보통 사우나 같이 들어가 있으면 날씨 안부 인사라도 하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내가 사우나를 나와야 해요.
왜? 입이 아주 더러워요.
카운터에 계신 분에게 뭐 하는 분이냐 물으니, 돈 잘 버는 진천 사는 유지래요.
입이 거친 이분은 사우나에 들어가면서도 물을 틀어놓은 채로 들어가요.
세신사 양반이 ‘사장님, 물 좀 잠가 주세요.’ 하면 육두문자가 나왔죠.
그날도 물을 잠그지 않고 들어가는 그 사람에게 세신사가 물을 잠가 달라고 말하자,
대뜸 귀싸대기를 치는 거예요.
그 사람은 자기가 소유 그 지역 유지라는 빽을 믿고 그렇게 했는지 모르지만, 세신사를 잘못 본 거죠.
40대인 세신자도 바로 싸대기 때립니다.
힘은 세신사 양반이 훨씬 좋죠.
완전히 발가벗고 개망신을 당한 거죠.
그다음부터 가면 못 만났어요.
우리는 말을 골라 써야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면 분명히 자기도 상처받는 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품위 있고 고상한 말을 써야 하지만, 말이 아닌 것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입이 가벼운 사람은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 말이나 전하고 헤프게 떠들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부터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남의 대죄를 말하면 대죄를 짓는 것이고, 남의 소죄를 말하면 소죄를 짓는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죠?
남의 대죄, 소죄를 떠들고 다녔다면, 성사 보라는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갖고 시비 거느냐고 하시죠.
네 눈의 들보를 빼야 눈이 맑아져서, 다른 이의 눈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지 않느냐 하십니다.
우리나라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 있죠?
세상에 흠 없는 사람 없고 티 없는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일을 최대한 주저해야 합니다.
정말 인내심을 갖고 참아야 합니다.
저도 이 강론을 준비하면서
‘신자들에게는 입조심 하라 하면서 너는 사제로 살아가면서 그런 일 없었느냐?’ 물었죠.
왜 없었겠어요?
저도 뒤돌아보면 말과 판단에 많은 실수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에 어떤 아이보니 매일 공부를 안 해서, 저놈은 공부하기 틀린 놈이라고 판단했었죠.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서울대 의대 갔대요.
판단을 함부로 한 거죠.
또 주일학교 아이인데, 성당 와서도 싸움질하고 여자애들 때리고 싹수가 노래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신학교 가서 신부가 되었어요.
그리고 어떤 교우를 보면 봉사하라면 뺀질거렸는데,
나중에 보면 사회봉사를 어마어마하게 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있었어요.
이렇게 우리의 판단의 정말 부정확해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입조심 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입으로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훈련하면 점점 하느님의 입을 닮아가고, 하느님의 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하면, 하느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는 그가 부족해 보이나,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훨씬 부족해요.
내 눈에는 그 사람이 아주 교만하게 보이나,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훨씬 더 교만해요.
인간을 판단하는 권한은 하느님만 갖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강론은 말은 가능하면 절제하면서 조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용기 있게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절제라는 핑계로 해야 할 말을 못 한다면 ‘비겁’입니다.
그래서 분별이 필요합니다.
‘말을 할 때인가 침묵해야 할 때인가?’
만일 지금이 하느님이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 때라면 용기 있게 외쳐야 합니다.
저의 사제 생활을 뒤돌아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싸워야 하면 외치고 살았습니다.
거대한 권력과도 싸웠었습니다.
독재 유신 시절에 용기 있는 분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던 그분들 덕분에
지금 민주주의를 누리고 사는 것이요.
어떤 불의에도 굽히지 않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을 기억합니다.
그 예언자들의 삶이 평탄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또 예수님을 비롯하여, 2000년 동안 진리를 외쳤던 분들의 삶은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에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쳤던 예언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존경합니다.
언론, 대학생, 종교를 잡으면 마냥 독재를 할 수 있대요.
우리나라도 독재 시절 언론과 대학생 잡고, 종교를 잡으려 했으나, 3개 종파 중 천주교만 잡히지 않았죠.
다른 종교는 ‘시국을 위한 조찬 기도회, 조찬 법회’ 등으로 권력 앞에 알랑거리며 살았죠.
그런데 천주교만 안 잡히니 눈엣가시였어요.
정의구현사제단, 빨갱이라는 소리 듣는 분 많았죠.
하지만 이 나라가 민주화되는데 그분들의 역할도 절대 빼놓을 수 없어요.
그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박종철 사건을 누가 터뜨린 것인데요?
지금은 나왔지만, 저도 예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이었죠.
무엇이든 너무 극단으로 흐르면 조금 문제가 생긴다고 보지만, ‘
정의를 구현하는 사제단’이라는 말 자체는 예언자적인 제목입니다.
가끔 신자들이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을 빨갱이 취급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정말 의로운 사제들도 거기에 많이 있는데, 도매금으로 이야기할 때마다 마음이 아픈 거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해서도 안 되지만, 해야 할 말을 안 하는 것도 대죄입니다.
가끔 사기꾼의 말이 솔깃하게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일수록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고 고상한 척할 수 있습니다.
간신들의 말은 편하게 들리고 충신의 말은 가시 같아 입에 쓰고 거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말은 정말 큰 힘이 있기에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항상 주의해야 한다는 얘기가
성서 곳곳에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도 그것입니다.
‘네 눈의 들보부터 뺀 후 다른 사람 가르치려도 해, 이놈아. 내 눈의 들보도 못 빼면서 누구를 가르쳐?’
말에 대한 분별!
말 가지고 말 많은 세상입니다.
말이 아닌 것은 절제하고 말이 되는 것만 골라 이롭게 쓰려고 애써야 합니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 말은 인격이라 했습니다.
내 인격은 말로써 다듬어져야 하지만, 남의 인격도 말로써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로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될 수 있고,
자신감 없어 절망하는 사람의 인격이 들어 올려질 수 있고, 절망감에서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말은 말씀으로 바뀝니다.
말씀의 은사가 생기는 거지요.
말이 분별 있게 자리를 잡아가면 저절로 말이 말씀으로 바뀝니다.
‘아, 저 자매님은 말씀할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 성경 구절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하고 나면 치유되는 느낌이야.’
성경 구절을 들이대지 않아도 그 자매의 말이 말씀이 되어있는 거예요.
능력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미사를 참석하시는 우리 교우분들, 오늘부터 ‘집회서’를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집회서를 읽으면 그 어느 성인의 가르침보다 기가 막힌 이야기도 많습니다.
탈무드에도 집회서에 인용한 이야기가 많죠.
집회서는 시대를 떠나, 영원히 우리 인간들에게 필요한 좋은 말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설교 마지막에 집회서의 말씀으로 끝내시잖아요?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그러니 네 마음속에 무엇을 채우고 살 것인지를 생각하라 하시죠.
속에는 쓰레기만 있으면서 입으로만 고상한 척하는 사람을 우리는 위선자라 합니다.
쓰레기는 언제가 입으로 드러나요.
우리는 ‘거룩한 성(聖)’자를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귀와 입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성인이라 했죠?
그런데 신기하게 말을 제대로 하면 들을 것만 들어와요.
쓰레기 같은 것은 들어오지 않아요.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2022년 연중 제8주일 (2/27)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