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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6월 12일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역사박물관 자리)에서 국민장을 마친
운석 장면의 운구 행렬이 중앙청을 지나 장지인 경기도 포천 천보산 천주교 혜화동성당 묘소로 가고
있다. |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잃은 장면은 그해 815 광복절을 맞아 발표한 신문 기고문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하고 이후
오직 기도와 전교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생활이기도 했다.
군사정부에 의해 이주당 사건에 얽혀 구속 수감됐을 때 “그동안 외교관, 정치인으로 바쁘게 살면서 시간이 없어 기도조차 제대로 못 했는데
지금 이렇게 마음껏 기도할 수 있어서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아들 장익 주교에게 편지로 알릴 정도였다.
그는 신문 기고문에서 “집권 9개월 미만의 짧은 기간 내에 소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국민의 커다란 기대에 부응되지
못하였으니,
이제 와서 해방 십육 년간 온갖 고난을 극복하면서 장래만을 믿어 온 삼천만 동포에게 무슨 말로써 사과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며
국민에게 고통을 다시 안겨준 데 대해 깊이 사과했다.
그러나 장면은 “정권을 유지하지 못해 국민의 여망에 어긋난 데 대해 뼈아픈
도의적 책임을 가졌지 쿠데타 세력의 정변을 용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히고 있다.
오직 “할 말은 많으나 주어진 정권을 빼앗기고 군정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국민 모두가 맛보게 한 데 대하여 국무총리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거듭 자책하며 사과할 뿐”이었다.
장면은 제2공화국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데 대해 “무엇이
무능하고, 무엇이 부패였는가” 하며 묻는다.
“「군사혁명 비사」(秘史)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집권한 지 18일 만에 정권 전복의
모의가 시작되고 있다. 그동안에 부패와 무능이 나타나고 있었던가? 아니면 부패와 무능을 미리부터 예언할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없다. 처음부터 정권을 잡겠다는 그들이 한 번이라도 정직하게 발표한 일이 있었는가. 과문한 나는 듣지
못했다.”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방조한 윤보선과 장도영에 대한 장면의 질타도 이어진다.
“쿠데타가 지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짚지 않고 처음부터 굳세게 나갔거나 매그루더를 만난 윤 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 정변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던 바이고, 먼저 내통을 받았을 때에도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의 이러한 심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사실 1961년이 밝자 장면 정부는 ‘경제제일주의’를
실현한다는 꿈에 부풀었고, 온 국민의 기대 또한 매우 컸다.
장면 정부는 집권 직후인 1960년 9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한 데 이어 총 규모 4억 2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재정지원을 미국으로부터 받기로 확약받았다.
이에 따라 1961년 봄 김영선(金永善, 1918~1987) 재무장관이 미국에서 우선 2천만 달러를 받아 왔고, 나머지는 장면 국무총리가
그해 7월 10일 미국으로 가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받아 와 본격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할 예정이었다.
그해 3월부터는
단군이래 최초최대라고 평가되는 국토건설 사업이 시작돼 나라 전체가 희망에 부풀었다. 쌀 한 가마에 1만 4000~1만 7000, 군사정부가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하기 전의 화폐 단위)하던 그때
1961년 한 해에만 4백억 환을 투입하고 연인원 4천 5백만 명을 동원해 댐을 비롯해 발전소와 도로 건설, 농지개간, 수자원개발,
산림녹화 등을 포괄적으로 하는 다목적 종합 프로젝트였다.
소요 재원은 이 사업을 ‘한국의 뉴딜정책’으로 평가한 미국에서 1961년에 2천만 달러를 지원했고, 이후 1천 5백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기로 하는 등 전액 미국의 도움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매카나기 당시 주한 미국 대사가 1961년 3월 11일 미 국무부에
보고한 전문에는 “장면 정부 하의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식량 부족과 춘궁기(보릿고개), 대졸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토건설 사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국토건설본부 수석 부서인 기획부장에 ‘사상계’ 사장 장준하(張俊河, 1918~1975)가 맡아 많은
젊은이들을 국토건설 현장으로 이끌었다.
공무원 공채 시험의 효시인 건설본부 간부 공모에 1만 수천 명이 응시해 사무직 1614명, 기술직 452명을 뽑았다. 이들은 3주 동안의
교육을 마치고 3월 1일부터 각 군 단위로 15~17명씩 배치돼 현장을 지휘감독했다.
당시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鄭憲株,
1915~1999)는 “건설요원 선발 이후 공무원 사회에 공채제도가 자리 잡았고 그 뒤 일반 기업체에서도 실시했다.
공채가 공고되자 1961년 들어 대학가 시위 횟수도 크게 주는 등 사회 안정에도 큰 몫을 했다”고 전했다(이용원,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1999, 16~20쪽 참조).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도 “그해 3월 이후 시위 횟수가 급격히 줄었습니다. 장면 정부는
무능하지 않았습니다”고 뒷받침했다.
516 후 군사정부는 장 정부의 부패 사례를 캐겠다고 전 각료와 산하 기관장들을 대상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했으나 김영선 장관이 친구인 부산 세관장으로부터 아이스박스 한 개를 선물 받은 것 외의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다.
군사정부가 오히려 장 정부의 깨끗함을 입증해 준 셈이다.
장면은 “경제의 안정을 기한 후에야 정국 안정을 바랄 수 있고,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제일주의 시책을 순조롭게 펴나가던 중 쿠데타로 인해 그 꿈이 꺾이고
말았다.
부통령 시절부터 준비한 한일국교 정상화를 통한 대일청구권 자금을 경제개발 비용으로 쓰려던 계획도 좌절되었다.
용서와
자비의 삶을 몸소 실천
장면은 그 절망적인 순간에도 누구를 원망하지도, 보복할 생각도 갖지 않았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서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민주당 2차 전당대회장에서 저격당했을 때도 그랬지만 완전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경제 대국을 향해 가던 정권을 빼앗긴 이 순간에도 그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청하고 스스로 이를 실천했다.
장면은 선종 1년 전에 쓴 ‘참고 용서하자’는 글에서 “세상의 죄를 제거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으로 사랑에 터전을 둔 용서의 계명을 준열하게 주셨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0)고 말한다. 그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사랑을 나누고
기도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의 덕이 모자라고 신앙이 부족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하느님께 사죄하고, 나로 인하여 이 나라 백성이 입은 피해를 하느님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또 틈만 나면 이웃에 복음을 전하고 모두의 영혼이 구원되기를 힘썼다. 제2공화국 각료
대부분이 516 후 세례를 받았고, 대자가 200명이 넘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조국의 복음화와 미래를 위한 투자에 헌신한
교육자요 나라를 세우고 지킨 외교관이며 자유민주주의가 살아 숨 쉬고 모든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복지 국가를 세우기 위해, 또 타협과 양보라는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인 정치인 장면은 거인이다.
장면은 작은 일에도 충실했다. 집권 9개월 동안 매일 도시락을 싸와 총리 집무실에서
먹으며 새벽 2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찾아오는 손님이 학생이거나 망령기가 있는 노인이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공사(公私) 구분도 분명했다. 전차표는 공용과 사용을 구분해
사용했고, 관용차를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장면의 중심 사상은 물론 가톨릭 정신이며, 그 핵심은 프란치스칸 영성이다. 일제
치하이던 1939년 프란치스코 3회 서울형제회 초대 회장에 이어 정계를 떠난 다음 1963년 전국연합회 초대 회장을 맡아 헌신했다.
교회와 프란치스코회에 기여한 공으로 1966년 4월 16일 프란치스코 1회 편입이 결정돼 5월 1일 증서를 받았다. 장면은 그 문건을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보다 더 큰 영예”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장면은 이미 1966년 초부터 지병인 간장염이 재발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6월 4일 선종했다.
12일 아침 서울 혜화동 소신학교 운동장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한 뒤 서울운동장(지금의 동대문 역사박물관 자리)으로 옮겨 10만여 조객의
통곡과 오열로 국민장 장의가 엄수되었다.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 천주교 혜화동본당 묘지로 가는 길에도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눈물로 장면의 마지막 길을 전송하며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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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장면이 소속 본당인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
장면은 탄신 100주년 추모 미사가 봉헌된 1999년 8월 27일(탄신일은 28일) 그 자리에 참석한 당시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토마스 모어, 1922 ~2009)으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사후 33년 만에 평생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헌신한 공덕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 추모 미사를 집전한 김수환 추기경은 장면의 시복
시성 운동 전개를 제의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 가신 길을 걸었듯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다짐과 실천일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