懲毖錄卷之二(4)
日暮提督還坡州(일모제독환파주)雖隱其敗(수은기패)
날이 저물자
제독은 파주로 돌아와서, 패전한 것을 숨기고 있었으나,
而神氣沮甚(이신기저심)夜以家丁親信者戰死痛哭(야이가정친신자전사통곡)
신기가
매우 꺾이었으며, 그날 밤에 가정의 친신이 되는 사람들이 전사한 것을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明日欲退軍東坡(명일욕퇴군동파)余與右議政兪泓都元帥金命元(여여우의정유홍도원수김명원)
다음날
제독이 동파로 군사를 퇴각하고자 하므로, 나는 우의정 유 홍과 도원수 김 명원과 함께
帥李薲等(수이빈등)至帳下(지장하)提督出立帳外(제독출입장외)
이 빈
등을 거느리고 장막에 이르니, 제독이 나와서 장막 밖에 서 있었고,
諸將左右立(제장좌우입)余力爭曰(여력쟁왈)勝負兵家常事(승부병가상사)
여러 장수들도
좌우에 서 있었다. 나는 힘써 말하기를“승부는 병가에 항상 있는 일이거늘,
當觀勢更進(당관세갱진)奈何輕動(내하경동)提督曰(제독왈)
마땅히
형세를 살펴 다시 진격하여야지, 어찌 가벼이 움직이려 하십니까?”하자, 제독이 대답하기를
吾軍昨日(오군작일)多殺賊(다살적)無不利事(무불리사)
“우리
군사들이 어제 적군을 많이 죽였으니, 일이 불리하지는 않으나,
但此地經雨泥濘(단차지경우니녕)不便駐軍(불편주군)
다만 이곳
땅은 비가 오면 진창이 되어, 군사들이 주둔하기 불편하므로,
所以欲還東坡(소이욕환동파)休兵進取耳(휴병진취이)
동파로
돌아가서 군사들을 쉬게 하여 진격하고자 할 뿐입니다.”하였다.
余及諸人爭之固(여급제인쟁지고)提督出示已奏本草(제독출시이주본초)
나와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반대하자, 제독은 이미 본국에 아뢰는 글을 작성하여 초고를 내어 보이는데,
其中有曰(기중유왈)賊兵箏城者(적병재도성자)二十餘萬(이십여만)
그 가운데는“도성에
있는 적병이 20여만 명이니,
衆寡不敵(중과부적)末又言(말우언)臣病甚(신병심)
중과부적이요.”하는 구절이 있고, 끝에 또 말하기를“신의 병이 심하오니
請以他人代其任(청이타인대기임)余駭而以手指點曰(여해이이수지점왈)
다른 사람에게
그 임무를 대신하기를 청합니다.”하고 쓰여져 있어서, 내가 놀라서
그 곳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賊兵甚少(적병심소)何得有二十萬(하득유이십만)提督曰(제독왈)
적병은
아주 적은데, 어찌 20만명이 있다고 하십니까?”하자, 제독이 말하기를
我豈能知之(아기능지지)乃汝國人所言也(내여국인소언야) 蓋託辭也(개탁사야)
“내가
어찌 그것을 알 수 있었겠소. 바로 그대들의 나라 사람이 말하였기 때문이요,”라고 하였으니, 아마 핑계되는 말이었다.
諸將中張世爵(제장중장세작)尤勸都督退兵(우권도독퇴병)
여러 장수들
가운데 장 세작이 더욱 군사를 물릴 것을 제독에게 권하였는데,
以余等固爭不退(이여등고쟁불퇴)以足蹴巡邊使李薲叱退(이족축순변사이빈질퇴)
우리들이
굳이 물러가지 않는다 하여, 발로 순변사 이 빈을 차고는 꾸짖어 물러가게 하였으며,
聲色俱厲(성색구려)
안색과
말소리가 모두 거칠었다.
是時大雨連日(시시대우연일)且賊燒道邊諸山(차적소도변제산)
이때 큰비가
매일 내렸으며, 또 적이 길가의 여러 산을 불태워 버려서,
皆兀兀無蒿草(개올올무호초)重以馬疫(중이마역)
모두 민둥산으로
쑥대도 하나 없었고, 더구나 말이 돌림병으로
數日間倒隕者(수일간도운자)殆將萬匹(태장만필)
수일간에
죽어 쓰러진 것이 거의 만필이나 되었다.
是日三營還渡臨津(시일삼영환도임진)陳于東坡驛前(진우동파역전)
이날 삼영의
군사들이 임진강을 건너 돌아와 동파역 앞에 진을 쳤다.
明日自東坡(명일자동파)又欲還開城府(우욕환개성부)余又力爭曰(여우력쟁왈)
다음날
동파로부터 또 개성부로 돌아오고자 하여, 내가 또 힘써 반대하여 말하기를
大軍一退(대군일퇴)則賊氣愈驕(즉적기유교)遠近驚懼(원근경구)
“대군이
한번 물러나면 적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져,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臨津以北(임진이북)亦不可保(역불가보)願少住(원소주)
임진강
이북도 또한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원컨대 잠시 머물렀다가
觀釁人(관흔이동)提督佯許之(제독양허지)余旣退(여기퇴)
적군의
틈을 살펴보고 이동하시기 바랍니다.”하자, 제독은 거짓으로 허락하는
체하다가, 내가 물러난 후
而提督跨馬(이제독과마)遂還開城府(수환개성부)諸營悉退開城(제영실퇴개성)
제독은
말을 타고 드디어 개성부로 돌아갔고, 여러 진영들도 모두 개성으로 물러났다.
獨副總兵査大受(독부총병사대수)遊擊毌承宣軍數百(유격관승선군수백)
단지 부총병
사 대수와 유격장군 관 승선의 군사 수백 명만이
守臨津(수임진)
임진강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余猶留東坡(여유류동파)日遣人(일견인)更請進兵(갱청진병)
나는 그래도
동파에 머무르면서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군사를 진격하도록 청하였으나,
提督謾應之曰(제독만응지왈)
제독은
거짓으로 응대 하기를
天晴路乾則當進(천청로건즉당진)然實無進意(연실무진의)
“날이
개이고 길이 마르면 당연히 진격할 것이다.”하였으나, 실은 진격할
뜻이 없었다.
大軍到開城府日久(대군도개성부일구)軍糧已盡(군량이진)
대군이
개성부에 도착한지 여러 날이 되자 군량이 이미 다하여,
惟從水路(유종수로)括粟及茭草於江華(괄속급교초어강화)
오직 수로를
따라 조와 말먹이 풀을 강화에서 도착시켰고,
又船運忠淸全羅道稅糧(우선운충청전라도세량)稍稍而至(초초이지)
또 충청도와
전라도의 조세로 거둔 양식을 배로 운반하여 조금씩 조금씩 도착시켰으나,
隨到隨盡(수도수진)其勢愈急(기세유급)一日諸將(일일제장)
도착하는
대로 곧장 떨어져서 형세가 더욱 급해지자, 어느 날 여러 장수들이
以糧盡爲辭(이량진위사)請提督旋師(청제독선사)
양식이
다 떨어진 것을 핑계 삼아 제독에게 군사를 돌릴 것을 청하자,
提督怒呼余及戶曹判書李誠中京畿左監司李廷馨跪庭下(제독노호여급호조판서이성중경기감사이정형궤정하)
제독이
노하여 나와 호조판서 이 성중1), 경기 좌감사 이 정형2)을 불러 뜰 아래 꿇어 앉히고는
大聲詰責(대성힐책)欲加以軍法(욕가이군법)余催謝不已(여최사불이)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으로 다스리고자 하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깊이 사죄하기를 마지않았으나,
因念國事至此(인념국사지차)不覺流涕(불각유체)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提督愍然(제독민연)更怒諸將曰(갱노제장왈)
제독도
민망하게 여겨 다시 노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汝等昔從我征西夏時(여등석종아정서하시)軍不食累日(군불식누일)
너희들이
지난번 나를 따라 서하를 정벌할 때, 군사가 여러 날을 먹지 못하였으나,
猶不敢言歸(유불감언귀)卒成大功(졸성대공)
오히려
감히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고, 마침내 큰 공을 이루었거늘,
今朝鮮(금조선)偶數日不支糧(우수일부지량)何敢遽言旋師耶(하감거언선사야)
지금 조선에
와서 뜻하지 않게 며칠간 양식이 보급되지 않았다고, 어찌 감히 갑자기 군사를 돌리자고 말하는가?
汝輩欲去則去(여배욕거즉거)我非滅賊不還(아비멸적불환)
너희들이
가고자 하면 가라, 나는 적을 섬멸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
惟當以馬革裏屍耳(유당이마혁리시이)
마땅히
말 가죽 포대에 시체가 싸여져 돌아갈 뿐이다.”하자,
諸將皆頓首謝(제장개돈수사)余出門(여출문)以放糧不時(이방량불시)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개를 떨구고 사과하였다. 나는 문을 나와 군량공급에 때를 못 맞춘
杖開城經歷沈禮謙(장개성경력심예겸)繼而糧船數十隻(계이량선수십척)
개성 경력
심 예겸에게 곤장을 쳤는데, 잇달아 군량을 실은 선박 수십 척이
自江華泊後西江(자강화박후서강)僅得無事(근득무사)
강화로부터
서강 뒤쪽에 정박하여,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
是夕提督(시석제독)使總兵張世爵(사총병장세작)
이날 저녁에
제독이 총병 장 세작으로 하여금
召余慰之(소여위지)且論軍事(차론군사)
나를 불러
위로하게 하고, 또 군사를 의논하였다.
1) 이 성중(李誠中): 중종 34년(1539)-선조 26(1593). 문신.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선조 3년(1570) 식년문과에 급제, 20년(1587)에
부제학이 되었다. 25년 임진왜란 때 수어사로 왕을 호종하여 의주에 이르러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조달을
맡고, 26년 명장 이 여송을 따라 영남지방으로 내려가 군량보급에 진력하다가 과로로 함창에서 죽었다. 원창 부원군에 추봉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선조실록], [國朝人物考].
2) 이 정형(李廷馨): 명종 4년(1549)-선조 40년(1607).
문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선조
원년(1568) 별시문과에 급제, 형조정랑이 되고, 25년 임진왜란 때 좌승지로서 왕을 호종, 개성에 이르러 개성부
유수에 특진되었다. 개성이 함락된 후 형 정암(廷馣)과 함께 황해도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쳐서 많이 죽였으며 그 공으로 경기도 관찰사로 특진되었다. 그 후 대사성,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저술은 <東閣雜記>,
<知退堂集>이 있다. [宣祖實錄], [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