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맞아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있는 심산 김창숙 선생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차가
없는 저로서는 국내에서 제가 가고 싶은 역사 문화적 장소를 여행을 할 때 곤란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만 심산 생가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비교적 간단히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대구서부시외버스 정류장에서 고령 경유 성주행 시외버스를 타면 됩니다. 이 버스는
고령을 지나면 마을버스가 되어 어지간한 마을에는 다 섭니다. 서부정류장에서 창천까지 표를 끊고 운전기사에게 800원을 더 주고 대가면 소재지에서 내리면 되는데 대구에서 대가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 15분 정도 밖에 안됩니다.
대가면 소재지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생가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는데 거리가 1킬로
정도 되니 걷기 딱 좋은 거리입니다.
마을로 들어서면 오른 쪽에 청천서원이 있습니다. 김우옹을 모신 이 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
되었다가 1992년 복원되었습니다.
심산의 12대 조인 조선 중기의 걸출한 유학자 김우옹(1540~1603)은 남명이 말년에 지니고 있던 성성자(猩猩子)라는 방울을 줬다는 남명의 외손서인데 남명은 방울을 주면서 방울의 맑은 소리가 항상 공경하고 경계하도록 깨우침을 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마을 쪽을 들어가면 생가가 나옵니다. 1879년 심산이 태어난 곳입니다. 주소로는 대가면 칠봉 2길 50-4인데 칠봉은 동강 김우옹의 아버지의 호이기도 합니다.
성주읍이 훤희 보이는 사월, 사도실 마을로 불렸던 마을은 정면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샇여 있는데 그 봉우리 수가 7개라고 해서 칠봉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1901년 불탄 것을 다시 세운 생가 안채
생가 사랑채 앞에는 무궁화가 서 있습니다. 무궁화는 태극기와 함께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상징과 기호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지요.
예를 들면 일제와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또 31운동 때 조선의 민중들이 흔들던 태극기와, 해방 혹은 광복 뒤 (사실 해방과 광복은 다른 개념이지요. 1945년 8월 15일이 폭압적 일제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 된 날이라면 1948년 8월 15일은 주권과 영토를 되찾은 대한민국이 탄생한 날이지요. 그러니 현재의 광복절은 해방(항일 투쟁)과 광복(민주공화국)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누구나 마음 놓고 흔들게 되었을 때 태극기를 흔들며 다른
사람에게 왜 열심히 흔들지 않느냐고 나무라던 친일파가 흔들던 태극기가 같은 의미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91년 건립된 생가 사랑채
생가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청천서당이 나옵니다. 김우옹의 청천서원이 대원군 때 훼철되자 12대손 김호림(심산의 아버지)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이름합니다. 1910년 김창숙이 수리 성명학교로 활용하며 자신도 거주합니다.
성주 월항면 한개마을 이진상의 제자들이었던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심산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청참오적소'를 올리고, 국채보상운동 때는 단연동맹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운동 실패 후 모금액 처리과정에서 친일단체인 일진회가 개입되는 것을 보고 분개해 단연회 탈퇴 후 고향으로 돌아와 청천서당에 성명학교(星命學校)를
설립 계몽운동에 나섭니다.
. 청천서당 성명학교라는 현판이 기둥에 붙어있다.
주역 몽괘 단전에 ‘몽형은 형통함으로써 행함이니 때에 맞게 함이요’(蒙亨 以亨行 時中 也)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억지 같지만 저는 시중을 현대적으로 폭넓게 풀면 ‘시대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현대사의 시대정신은 ‘민족’과
‘민주’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정신을 온 몸으로 일관되게 지조를 잃지 않고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심산 김창숙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실천적 삶이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의 민족운동 가운데 비교적 알려져 있는 것이 ‘파리장서사건’입니다. 김창숙은 ‘파리장서사건’으로 불리는 유림의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게 되는데, 파리장서 사건은 31운동 후 민족 대표 서명인에서 빠진 유림들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 134인이 서명한 장문의 서한(장서)을
보내기로 한 사건입니다.
파리장서 작성을 주도하고 그것을 휴대한 김창숙은 중국 상해로 건너 갔지만 이미 김규식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었고 경비 문제, 김창숙의 외국어 구사 문제 등이 있어 장서를 번역하여 김규식을
통해 전달하고 국내에도 보내기로 하였는데, 얼마 후 국내로 보낸 서한이 일경에 발각되어 관계된 유림들이 체포되고 지도자로 추대된 거창의 곽종석 등
수인이 감옥에서 순사한 이른바 ‘제1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파리장서사건을 기념하는 비석이 서울(장춘단 공원), 경남
거창, 그리고 대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에 있습니다. 상인동
월곡역사공원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지역의 대표적 의병장이었던 우배선을 기념해 만든 것입니다. (월곡은 우배선의 호) 우배선은
김굉필의 외손서이기도 하였습니다. 상인동
지역은 단양 우씨들의 집성촌으로 세거지였습니다. 그런데 파리장서 사건 때 이 곳 상인동 거주 우성동
등 우씨 5명이 서명하였습니다.
대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에 있는 파리장서비 (2009년 9월 13일 촬영)
일제시기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앉은뱅이 신세가 되었지만(그래서 벽옹이라는 별호를
얻게됩니다) 심산의 고난은 광복 뒤에도 이어집니다. 그는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하면서 고초를 겪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성균관 대학에서 쫓겨난 사건입니다.
일본이 패망하자 심산은 유림을 결속시켜 유도회를 결성하고 친일파가 설쳐대던 성균관을 정화한 뒤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해 총장에
취임합니다.. 그러나 이승만의 독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의 보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1957년 7월 11일 김창숙을 축출하라는 이승만의 밀명을 받은 이른바 '재단파'가 폭력으로 김창숙 세력을 몰아내고 유도회와 성균관대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에는 이명세가, 총장은 이선근이 차지합니다.
그 중 이명세는 일제가 1939년 유도(儒道)황민화정책을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 이사를 역임하며 일제에 협력하고, 태평양전쟁을 미화하고 적극 협력할 것을 선동하는 글을 발표하는가 하면 각종 시국강연에 참가하여 징병제
등 일제의 침략 정책에 찬동하는 연설 등을 한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친일파 청산의 문제는 처벌보다는 우선 진심어린 참회와 사죄가 먼저라고 봅니다. 그러나
광복 뒤 친일파로 불리는 사람들은 그 어떤 참회나 사죄도 없이 그들의 기득권만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우리가 일본 정부에 과거에 대한 반성과 참회를 바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야
이후의 행동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것 없이는 결국 과거사에 대한 미화나 왜곡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현 일본 아베정부에게서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말년을 가난 속에서 병원과 여관방을 전전하다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별세한 심산을 생각하며 광복절 전야에 과연 이 땅에서 역사와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짚어 봅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