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와 대학생, 시민단체에서 선거부정에 대한 강한 저항이 일어났다.
국민운동본부는 유령투표용지적발(서울 효자동), 릴레이투표(경기 광명시 하안동, 서울 용산 청파2동, 강남구 청당동)가 행해졌다고 주장하고, 서울구로구청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대표 김승훈신부)은 “개표과정의 컴퓨터조작설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포착했다”고 주장하고, “대통령 선거가 관권개입과 국민매수ㆍ강제동원 등 각종 선거부정으로 원천적인 무효임을 확신하다”고 밝혔다.
또 개표과정의 컴퓨터조작설과 관련, 개표결과를 TV집계를 분석해 제시한 모순점을 보면 △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개표결과를 TV에 보도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았고 △ 일부 시간대의 TV집계수와 선관위의 집계가 일치하지 않았으며 △ 특정후보의 득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컴퓨터부정’을 규탄했다.
제13대 대선을 부정선거로 단정한 평민당은 1988년 1월 <부정선거백서>를 발표하여, “노태우 후보는 최소한 4백만표 이상을 부정득표했으며 김대중 후보의 표는 3백만표 이상 삭감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노태우의 부정득표 내용을 △ 주민등록 위조로 인한 대리투표와 사전투표, 무더기투표 등 최소 50만표 △ 각 투표구당 1백여표씩 모두 1백 50만표 이상의 릴레이투표 △ 정신박약자 27만 명중 대리투표 △ 환표, 투표함 바꾸기 및 부정개표 30만표 등이라고 적시했다.
백서는 김후보 표의 삭감내용은 △ 선거인명부 누락으로 인한 60만표 △ 무효표 조작 40만표 △ 투표방해 50만표 △ 부재자투표 20만표 △ 기권조작 80만표 △ 환표, 투표함 바꾸기 및 컴퓨터부정조작 50만표 등이라고 밝혔다.
평민당은 145건의 증거품을 제시하면서 “정부 여당이 이 백서의 주장에 이의를 갖는다면 국회에 동수로 국정조사위원회를 구성, 그 진상을 조사하자”고 제의하고, “이것이 규명되지 않으면 노태우 정권의 정통성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선거과정에서 편향적인 보도를 일삼았던 언론은 선거부정에는 눈을 감은 채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 것처럼 여론을 몰아갔다. 그 표적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이 평민당을 만들어 출마함으로써 대선에서 패배한 것으로 매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1월 하순 양순직ㆍ유제현ㆍ김현수ㆍ김성식ㆍ장기욱 의원 등이 탈당하여 대선 패배에 이어 내부의 상처를 입었다.
대선에서 패배하고 여론의 질타를 한 몸에 받으며 믿었던 동지들로부터 등돌림을 당하는 고통스런 시간을, 김대중은 동교동 서재에 틀어앉아 꼼짝하지 않았다.
7월 사면ㆍ복권 이후 거의 중단됐던 독서를 시작했다.
상심을 달래기 위해서였을까? 개표 결과가 발표된 다음날 그는 지하 서재로 내려가 노만 피일의 <적극적 사고방식>과 송영 문학선집 <비련>을 골라 읽고 있다. 최근 그의 기도시간이 길어졌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변화이다. (주석 16)
재야 운동가들의 대규모 평민당 입당은 '재야의 제도권 진입'이라는 점에서 정치사적 의미를 남겼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당과 국회에서 큰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김대중의 특장의 하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점(앞에서도 쓴 적이 있다)이다.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헌신해 온 재야 인사들을 대거 영입하여 평민당의 체질을 바꾸고, 이들을 총선에 내보내어 선거열풍을 일으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당의 간부들과도 의견을 나누고 재야 지도자들을 만나 뜻을 전했다.
평민당에 입당한 재야그룹은 문동환 등 교수 10명, 이상수 등 변호사 5명, 방용석 등 노동계인사 5명, 서경원 등 농민대표 3명, 우종범 등 빈민대표 7명, 고영근 등 종교계 3명, 민통련 등 민권운동계 인사 22명, 학생운동출신 40여 명, 고 이한열군 어머니 배은심 등 유가족 대표 2명 등 100여 명이었다.
평민당이 재야 명망가들을 대거 입당시키자 민주당은 “평민당이 혁신세력을 규합하는 등 보수야당의 색깔을 잃고 있다”라는 색깔론의 성명을 내고, 민정당에서도 유사한 성명으로 재야인사들의 평민당 입당을 못마땅해 하였다.
김대중은 퇴진 압력을 받고 박영숙 부총재에게 총재권한대행을 맡기고 상임고문으로 물러나서 임박한 제13대 총선준비를 서둘렀다. 1988년 2월 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총재직을 사퇴하여 야권의 통합을 호소하고 나섰다.
양당은 7인씩으로 야권 단일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협의했지만 각자의 이해가 맞지 않아 야권통합은 결렬되고, 두 정당은 각각 총선체제를 갖추었다.
이 무렵 국회의원선거법 협상이 개시되어, 평민당은 민정당과 민주당의 중선거구제안이 여야가 동반당선 되겠다는 유신시대의 사고발상이라 강력하게 비판하고, 인구 15만을 기준, 상한선 23만, 하한선 7만으로 선거구를 확정하는 선거법안을 마련하여, 결국 소선거구제의 채택을 가져왔다.
주석
16) 앞의 책, <월간경향>, 1988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