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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으로 봐서는 나를 알고 있는 어느 연배가 편지를 보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선생은 1930년생으로 이미 아흔이 넘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르겠다.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오래전인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1년 다시 증보판을 냈다. 저자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한 영문학자로 조치대학 명예교수로 자신이 살아 온 경험과 사고를 바탕으로 책을 냈다고 한다.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으나, 후배들 뿐 아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다양한 분야의 독자들까지 읽고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며 인사해옴에 따라 증보판을 내기로 했다고 하고, 그러면서 옛날 그때처럼 많은 독자들의 격려를 받는 행운이 다시 찾아오면 기쁘겠다.”고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꾸 나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런 책에서 인생을 마무리 할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이거나, 나만 유달리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책은 「知的餘生の方法」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으나, 부제로 「죽는 그날까지 지적 여생을 보내기 위한 50가지 삶의 태도」라고 했으므로, 노년에 필요한 50가지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다. 그것들을 모두 옮길 수는 없을 것이므로 기억하고 싶은 것들만이라도 가려볼 생각을 한다.
초로(初老)라 불리던 40세에 일선에서 물러나 50세가 되면 세상과 작별하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초로라는 말도 사라졌다. 그때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에 대한 근심도 없었다. 이제는 달라졌다. 정년이 60세가 넘었고, 평균수명도 80세가 넘다 보니 은퇴 후에도 많은 시간이 남는다. 적어도 아이가 태어나 대학 들어갈 때까지의 시간이다. 나이 개념이던 ‘반백 년 인생’과 비교하면, 50세는 35세, 60세는 42세, 70세가 49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요즘 60세는 한창 일할 수 있는 육체와 정신을 갖고 있다.
옛날, 인생 후반에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던 이들에게 에도시대 유학자 사토이사이(佐藤一齊)는 이렇게 말했다.
“청년에 배우면 장년에 큰일을 도모한다. 장년에 배우면 노년에 쇠하여지지 않는다. 노년에 배우면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인생을 청·장·노년으로 나누고, 그중에서 ‘노년에 배우면 썩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죽은 후에야 확인할 수 있으므로, 내가 산 현실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나이 들어서도 계속 공부하고 배우면 사후 평가가 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물론 평가대상자인 내가 이미 죽은 뒤라 평가를 직접 들을 수는 없겠지만. 배움의 3가지 유형 중에 우리에게 와 닿는 것은 ‘장년에 배우면 노년에 쇠하지 않는다’가 아닌가 싶다. 장년 시절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일한 사람이라면 무언가 꾸준히 공부했다는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수집해온 정보들은 직장을 떠나거나 맡은 직책에서 물러나는 순간에,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폐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저 바쁘게 일하면서 업무효율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단련했던 것일 뿐이다.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배우거나 지식을 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장년의 배움이 아니었다. 우리는 업무적 능력 개발이 자기 개발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장년에 배우면 노년에 쇠하여지지 않는다.’는 배움의 경지는 일을 잘하기 위해서 필요한 배움이 아니었다. 평생 즐겁게 배우고 익히는 것 그것이 노년을 풍요롭게 만드는 장년의 자기 개발임을 알아야 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李伯-이태백)은 “석 잔이면 큰 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하나가 된다(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며 음주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세상에는 술자리만큼 즐거운 것도 없을지 모른다. 퇴근 후에 동료들과 ‘한잔하는 맛이 인생의 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세상살이 시름을 잊고 친목을 도모하는데, 왜 그 시간이 즐겁지 않겠는가. 그런데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관심 있는 분야가 전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업무와 관련된 분야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 당장 필요 없더라도 집중하고 탐구하면 된다. 굳이 업무와 동떨어진 영역에서 관심거리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매일 조금씩 지적인 투자를 해 보는 것이다. “나는 젊은 시절 번역과 작문 중심으로 꾸준히 영어 공부를 계속해왔다. 그렇게 외국어를 공부했던 경험은 이후 독일어를 배울 때 큰 도움이 되었다.”배움은 결코 헛되지 않는 법이다. 축적된 지식은 언제, 어느 시점에서 서로 만나게 될지 모른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업무 성취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 마시는 술 한 잔은 순간의 즐거움으로 그치지만, 오늘 개인적인 투자는 훗날 지적 자극이 넘쳐나는 여생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준비하는 기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기쁨의 크기가 커지므로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 매일 조금씩 관심분야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는 것이다. 작은 노력에서 여생의 꽃이 핀다. 투자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충만한 여생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만큼 준비가 필요할지 모른다.
누구에게나 젊은 시절 꼭 한번 해보고 싶다거나, 한번 배워보고 싶은 분야와 관심사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먹고사는 문제에 쫓겨 욕구를 억누르고 세월을 보내기 마련이다. 여생은 좋은 기회다. 이제 의무에 매달릴 필요 없이 참아왔던 욕구를 마음껏 분출해도 되는 시간이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실컷 해보자. 범죄가 아니라면 무슨 일이든 상관없다. 꿈을 펼치고, 관심사를 즐기면서 세월을 보내는 것, 그것이 지적으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꼭 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는 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을 것이다. 독특한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 칸트는 ‘실천하지 않더라도 비난을 받거나 처벌을 당하지는 않지만, 만약 실천한다면 칭찬받는 행위’를 가리켜 ‘불완전의무’라고 정의했다. 그것은 자원봉사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반면, 가족부양과 같은 반드시 이행 해야 하는 의무는 ‘완전의무’다. 누구를 혹은 사회를 위해 봉사한 뒤 칭찬받거나 격려받는 것이 조금은 낯설지 모르지만, 그것은 의무 이행에 대한 뒤늦은 평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주고받는 그것에서 따뜻하게 위로를 받을 것이다. 자원봉사는 여생에 함께할 좋은 벗이 된다. 지난날 나도 퇴직 후에 자원봉사라는 것을 해 보았는데, 나는 순수한 생각으로 나갔는데, 거기에는 나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봉사점수를 따기 위해 나온 (젊은)이들 뿐이라 그만둔 적이 있다. 자원봉사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게 신이란 우주만물에 대한 경외감이다.”저자는 자신이 아는 N선생은 100세가 넘도록 장수했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95세 이후로는 죽어서 신 앞에 서게 된다는 생각마저 하지 않게 되었소.”라고. 신에게 의지하려는 마음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고승들의 깨달음의 경지와 같다. 100세가 넘는 나이에도 지적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든 경계를 두지 않고, 모든 종교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과정에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지적 자극으로 삼아라」라고 하는데, 은퇴 후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일터와 가정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칠 것이다. 그러면서 살아온 여정에 비해 남은 세월이 너무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레 ‘죽음’이란 단어가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의 일처럼 여겨졌던 죽음이 어느새 이토록 가까이 다가와 있음을 깨닫고 회한에 잠기게 된다. 죽음에 앞서 ‘흙에서 태어난 몸, 흙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라며 달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죽음 후에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육체와 영혼은 어떻게 다른가? 이런 질문들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방황을 낳는다.
여생의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면, 종교를 갖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가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상관이 없다. 오랜 역사와 더불어 성숙된 교리를 갖춘 종교라면 유연성을 가지며 배타적이지 않다. 종교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적 자극을 느껴보는 것은, 초자연주의에 집착하는 것과는 다르다. 배우면 배울수록 종교가 지닌 철학적 심원함에 다가설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수적인 지식도 얻게 된다. 앞에서 본 노학자는 100세의 나이에도 밤늦게 철학과 신학 논문을 읽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고백했다. 지적 탐구의 세계에서 흥미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인간의 오관(五官)으로 인지하는 구체적인 세계다. 인간은 가로, 세로, 깊이로 측정되는 3차원의 공간 안에서 살아간다. 거기에 시간이라는 조건을 더해도 고작 4차원의 세계이다. 5차원, 6차원의 세계는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여긴다. 그러나 인간이 코끼리 피부 속에 기생하는 전염균과 다른 점은 자신의 오관 세계 내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우물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곳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종교는 바로 그것을 시도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각각의 종교에서 신봉하는 신은 우리가 자각하고 체감하는 세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물 밖의 세상으로 존재를 확장시키고 싶어 하는 종교라면 무한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때론 무속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해부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한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도저히 규명할 수 없는 의학적 영역을 초월할 때가 있다. 인간은 영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때, 그것에는 해부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물 안 세계’를 밝혀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우물 밖 세계’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이고 또한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의 시작이기도 하다.
노사연의 노래 중에 ‘우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가사가 있다. ‘린 홀’이라는 학자는 한술 더 떠서 “우리가 나이들면서 변하는 게 아니다. 보다 자기다워지는 것이다.”고 했다. 조상들은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 해 가을을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라고 했다. 봄, 여름은 에너지가 넘쳐나서 육체를 단련하기 좋은 계절이라면, 가을과 겨울은 심신을 단련하기 좋은 시기다. 퇴직한 후라면 봄, 여름에는 정원을 가꾸거나 낚시를 즐기기에 좋고, 가을과 겨울에는 육체활동은 힘들더라도 정신단련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이렇게 자연의 리듬을 잃지 않는 것도 인생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봄에 새학기를 시작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독일은 10월에 신학기를 시작한다.
“가끔 동창회 명부에서 친구들의 이름이 지워질 때 나는 더 오래 살고 싶어진다. 그렇게 나이 들면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더 살고 싶다는 기대도 사라져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도 죽을 때가 가까웠군.’하는 생각으로 살짝 미소 짓게 될지도 모른다. 창밖의 거대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스러져갈 시간들을 떠올릴 것이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 내 몸도 결국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여생을 보내는 마음은 한층 풍요로워질 것이다.”「나이듦은 자연의 건강한 리듬이다」중에서 - 저자가 한 말이다.
나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도 종종 있다. 언제든지 사막 같은 대도시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면 유년의 기억을 장식해준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자신을 반겨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은퇴 후 다시 돌아간 고향은 어린 시절의 고향과 과연 같을까? 일단 공기가 좋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공기는 아무리 마셔도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맑은 공기에 감탄하는 건 며칠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상생활에 별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풍요롭고 보람된 삶을 공기 하나로 만족시킬 수는 없다.
나이 들면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오히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많은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도시에서 생활해야 한다. 물론 고향이 그립다. 그러나 오랫동안 도시에서 산 사람에게 고향은 한때 좋았던, 내가 살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 냉정하게 말하면 내 삶에서 그곳은 이미 낯선 타지가 되어버렸다. 이제 고향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마음을 나누는 곳, 지금의 바로 이곳이 고향이다. 지방 출신 도시생활자에게 고향은 ‘멀리 떨어져 추억하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첫사랑은 영원한 그리움으로 마음 한켠에 남겨 두는 것처럼 고향 땅도 마찬가지다. 다시 만나서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보다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겨 두는 편이 나을지 모른다.
영어 ‘home’은 고향이라는 뜻과 가정이라는 뜻을 같이 지닌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그곳이 나의 home이다. 그곳이 나의 고향이자 모국이라는 의미다.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왔든 해외로 이민을 갔든 그곳에서 성공하고, 행복하다면 그곳이 바로 고향인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불편함이 없다면 도시를 나의 고향으로 여겨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을 고향으로 인정한다면 도시에 대한 애정은 지금보다는 각별해질 것이다. ‘Ubi bene ibi patria’라는 로마 시대부터 전해 오는 속담이 있다. 직역하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나의 홈’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교환수단으로 화폐를 만들었고, 통화(通貨)를 써 왔다. 처음에는 물물교환 시대로 조개껍데기나 구슬을 화폐로 사용했다. 금화, 은화 같은 동전을 사용하다가 마침내 지폐가 등장했다. 지금은 카드와 전자머니가 세상을 움직인다. 책의 역사도 같다. 처음 죽간, 목간, 석각의 시대였다가 종이에 글자를 썼다. 인쇄술이 발달해 책이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이것이 IT시대에 들어서면서 인터넷이 확산되고, 이제 모든 것을 AI가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도 책에서는 인터넷이 가지고 있지 않은 어떤 힘과 즐거움이 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간은 따뜻한 밥 한 끼가 그립다. 영양제 복용만으로 그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씹고 배설하는 동안 갓난아기는 턱과 이빨이 발달하고, 소화기관이 발달하듯이 우리는 책을 통해 글자와 숫자를 접한다. 사고력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단계별로 수준에 맞는 책을 읽어야 한다. 두뇌가 책을 통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필요한 정보를 인터넷에서 취할 수 있다. 이것은 규칙적 식사를 하고 부족한 영양소를 간편하게 공급하기 위해 영양제를 먹는 것과 같다. 필요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제대로 활용하려면 우선 책을 고르고 펼쳐서 표지와 내용을 확인하고, 정독하는 올바른 독서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제대로,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먼저 그 같은 두뇌를 가져야 한다. 인터넷을 통한 즉각적인 지식에만 익숙하다면 깊이 사고하는 기능이 떨어지고 퇴화한다. 종이를 넘겨 가며 지식을 습득하는 버릇을 놓아서는 안 된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장수의 비결이 아닐 수 없다.
‘해변 모래밭으로
도룡이 걸치고 걷는 해녀
늦가을의 흩뿌리는 빗줄기.’
간단한 시 인데도 이해가 쉽지 않다. 해녀에 ‘나’를 대입하면 해변, 즉 바다는 죽음이다. 어차피 바다에 들어갈 것이므로 나는 늦가을 흩뿌리는 빗줄기에 몸이 젖어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해녀는 도롱이를 걸치고 있다. 도롱이는 짚으로 엮은 비옷으로, 인생에서 도롱이는 독서에 해당한다. ‘어차피 곧 죽을 인생,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말은 초탈하고 의연한 자세가 아니다. “어차피 배가 고파질 텐데 밥을 먹어서 뭐 하나.”하는 것과 같다. “죽는 그날까지 숨을 쉬는 한, 나는 무엇이든 해내고 있을 것이다!”고 외치는 절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기억력이 유지돼야 한다. 지금의 나는 곧 ‘나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몇십 년을 같이 산 배우자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다행히 뇌과학자들은 60살 이후에도 기억력은 단련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근육은 운동을 통해서 단련할 수 있지만, 기억력은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그것은 뭐니 뭐니해도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뇌세포뿐만 아니라 정신도 단련시킨다. 은퇴 후, 아무 의욕도 없이 눈만 뜨면 TV 앞에 앉는 남편을 보는 아내 입장에서는 얼마나 초라하고 답답해 보일까. 무언가를 추구하고 매진해야 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품위 있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서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사랑을 하면 슬픔이 밀려온다.’아니, 사랑하기에 슬픔이 생긴다. 愛의 일본식 발음은 ‘아이’로, 중국어에서 유래했다. 고유의 일본어가 없다는 것은 愛가 일본에서는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세대들은 지금도 이 단어에 위화감(어색한 느낌)을 갖는다. 그러나 최근에는 뚝 하면 ‘아이 러브 유’다. 그런데, 愛는 哀와 어원도, 발음도 같다. 결국 사랑에는 슬픔까지 담겨 있다는 뜻이다. 옛날 엄마들은 “아이고 내 새끼!”하면서 한탄한 적이 있었다.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한 말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이 哀였던 것이다. 아이를 보면서 슬픔을 느껴던 것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가장 오래 지속되는 사랑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랑이다.”-윌리엄 서머셋 모음-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셰익스피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마음속으로 소위 고전적 여성상에 대해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어떤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우리 모두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는 사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인조인간이 만들어질 날도 그리 멀지는 않지만…
건강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이 똑같이 당연하고 중요하다. 장수 또한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 사항이다. 일본 속담에 ‘생명이 길어지면 봉래를 만난다.’라는 것이 있다.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경사스럽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시인 겐코는 〈도연초〉라는 시에서는 ‘생명이 길수록 수치도 많다.’라고 했다.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아무튼 ‘생명이 붙어 있기만 하면 해파리도 뼈가 생긴다.’라는 속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사는 것을 누구나 바랐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인간들 모두는 장수를 꿈꾼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래 살기 위해서는 건강이 필수다.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에 비해 육체적 기반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육체적 건강이 ‘지적 생활의 기초’라고 한 것만 봐도 그렇다.
젊음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우리는 나이가 들고 노화가 진행되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과 포기 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먼저 포기하지 않는 한, 육체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건강으로 버텨줄 것이다. 건강한 여생을 원한다면, 적어도 신체와 두뇌를 열심히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움직이는 만큼 건강과 행복한 여생이 찾아온다.
역사 이래 지금처럼 ‘스트레스*’라는 말에 민감한 때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신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역경을 주어 단련시키고 훈련 시킨다. 불운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 불은 금을 단련시키고, 불행은 용감한 자들을 단련시킨다.”고 했고, 간디도 비슷한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든 더위, 배고픔, 목마름을 이기지 못하고, 불쾌한 일을 참고 견디는 힘이 없다면, 그는 결코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다. 인내는 정신의 숨겨진 보배다.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다.”
*스트레스 : 20세기 캐나다 의학자 한스 세리에가 ‘스트레스설’을 주장하면서부터 널리 사용되었다.
인생에서 닥치는 불행은 결국 스트레스다. 그것을 극복해낸 사람만이 용감하고 위대한 사람이며, 스트레스와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 성장하고 완성된다. 노인도 다르지 않다. 나이가 들어도 적당한 스트레스는 반드시 필요하다. 스트레스는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 식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면서 여생에 이르렀듯이 적당한 스트레스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다음은 노년의 재산에 관해서다.
타인이 구축한 재산에 괜히 질투심이 느껴져 화가 나거나 돈 그 자체를 부정하면 여생은 비루해질 수밖에 없다. 자기보다 돈 많이 가진 자들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것은 돈에 지배당하는 자의 또 다른 얼굴이다. 돈은 도구일 뿐이다. 경쟁적으로 모셔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도 배가 아파 어쩔 줄 모르겠다면 “다른 사람의 좋은 것을 저주한다면 나의 가장 좋은 것이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떠올려 보라. 타인의 삶을 짓밟아 가면서 버는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나를 죽이는 짓이다.
큰 부를 이룬 사람들 중에는 멀리 보고 함께 가자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많다. 그들은 돈 앞에서 탐욕스럽지도 않고 또 재산이 사라질까 두려워 초조해하지도 않는다. 이는 자신 안에 욕망과 헌신이라는 마음이 동시에 충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 비결이다. 노후에도 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라는 말은 덧붙일 필요도 없다. 효도가 최고의 미덕이던 시대는 지났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효도의 중요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 부모를 돌보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속출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스스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자식들이 늙은 부모를 기꺼이 보살필 수 있도록 만든 부모가 승리자!”
가슴에 새겨 두자.
‘친구와 술은 오래될수록 좋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오래 말린 나무, 오래된 술, 오래된 친구는 물론 좋다.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진한 우정이 싹트기 마련이다. ‘한솥밥 먹는 사이’라는 말도 그렇다. 젊은 날 서로의 개성을 부딪혀가며 사귄 친구는 여간해서는 끊어지거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또 놓고 싶지도 않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 사이라고 해서 모두가 우정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정의 강도는 나이 들수록 차이가 난다. 젊은 시절에는 나와 생각이 다른 친구도 삶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차원에서 서로 사귈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들면서 조금씩 달라진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생각과 사고방식이 다르면 부담스럽다. ‘이런 사람과 굳이 사귈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고, 일일이 대응하는 게 귀찮고, 같이 있는 것조차 짜증스럽기도 한 경우가 있다.
나이 든 사람에게 ‘갖고싶지 않은 친구’란 사상과 신조가 다른 친구, 서로 경제 수준이 다른 친구, 지적 수준이 차이 나는 친구. 그런 친구는 피하고 싶다. 젊은 시절에는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경제적 수준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다르다. 나는 형편이 그렇고 그런데 친구로부터,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초대받아 수십만 원짜리 고급 요리를 대접받는다면, 나 역시 그만한 밥값을 지불할 경제력을 가져야 한다. 이런 경우 말은 안 해도 불편하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동창회 같은 모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적 수준의 차이는 어떤가? 서로 교양 수준 차이가 난다면 어울리기가 쉽지는 않다. 예의가 없거나, 배려심이 없다면 우정을 이어가기가 어렵다. 인간적인 매력만으로 가까이하고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는 만남이 귀찮고 피곤하다. 안타깝지만, 자신에게 탁 맞는 친구를 사귀기는 쉽지가 않다. 학창시절 좋았던 친구라 하더라도 다시 만났을 때는 예전처럼 줄거움을 느낄 수가 없고, 오히려 지루해서 인내심의 한계를 갖게 할 수도 있다. 노령연금이 어떻다느니, 재취업이 힘들다느니, 어느 가게 술맛이 별로라느니…, 쓸데없는 이야기만 쏟아낸다면 그는 나이 들면서 어느새 지루한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사귄 지 오래됐으나, 언제나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만을 이야기하는 친구라면 어떨까. 그 친구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지만, 같은 이야기만을 되풀이하는 데 지쳐버릴 수 있다.
친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년에는 부부만 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자는 친구에 대한 경험과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여기서는 줄이고 부부관계를 보도록 하자. 결혼에 관한 유명한 말은 소크라테스의 말로 알려진 “양처와 사는 남자는 행복해지고, 악처와 사는 남자는 철학자가 된다.”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여자다. 정말 그럴까?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의 역할은 다양하다. 충실히 가정을 돌보고 남편을 뒷바라지해서 성공시킨 아내도, 남편에게 무관심한 것이 오히려 자유를 주게 되어 성공하게 한 사례도, 어떤 경우에는 아내의 잔소리가 지긋지긋해서 오기로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다잡은 것이 성공요인이었다는 이도 있다. 부부관계는 결과가 중요하다. 아내가 어떻게 했던 남편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다면 잔소리든, 무관심이든 문제되지 않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좋은 여자와 좋은 남자가 만나서 결혼했다고 좋은 부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결과지상주의라면 크산티페는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할까? 그녀가 극악에 달하는 잔소리와 바가지로 소크라테스를 괴롭힌 여자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악처였기에 남편이 위대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면, 그녀야말로 남편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양처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황혼이혼이란 말이 흔한 시대가 되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매일 똑같은 생활에 싫증이 났을지 모른다. 나이 들어 행복하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은퇴 후 해외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여행도 젊고 바쁜 시절에 다녀와야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이 된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어렵사리 마련한 휴가기에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아이가 아프다거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애태우면서도 즐거웠다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스무 살에는 시간이 시속 20㎞, 60세에는 시속 60㎞로 지나간다.”는 말이 있다. 물리적 시간의 변화에는 변함이 없는데, 시간을 받아들이는 우리 내면은 젊은 시절 시간과는 모든 게 달라진다. 나이와 함께 시간의 질도 달라진다. 노년에는 이 같은 변화에 당황하게 되고, 그것이 너무나 빨라서 따라가지 못하기도 한다. 결국 무위(無爲)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노자가 말한 무위가 아니라,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는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내면의 시간’속에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서양 속담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다. 우리 시조에도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짓는다…”는 것이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서양 모두 아침형 인간이 대우받는 문화는 같아 보인다. 여름에는 새벽 4시부터 운동하는 노인들이 보인다. 직장에 나갈 필요가 없는 연금생활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나와 걷는다. 일찍 눈이 떠지지만 할 일이 없으니, 건강을 위해 집을 나선 것이다. “청년이여, 눈이 떠지면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라.”고 외쳤던 무솔리니의 말이 멋지고,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고 우리도 외쳤다. 로마의 어느 위인은 “어차피 죽은 후에는 얼마든지 잘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아침 일찍 일어나 움직여라.”고 채찍질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일하는 사람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는 힘들다. 늦잠을 잔다고 해서 인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돌아보면 현역 시절은 ‘일이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 계속될 때는 실컷 늦잠을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 늦잠을 자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도 무언가에 집중하며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증거다.’중요한 것은 신체리듬에 맞춰 생리적인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아침에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몸의 리듬에 따르라. 그것은 여생을 즐기는 사람들의 특권이다.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에센 바흐-
흔히 인생을 ‘길’에 비유한다. 道는 고대 중국의 상형문자로 ‘고개를 들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이 마침내 인생의 전반(全般),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이 형성돼온 모든 과정을 비유하게 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추구하는 사람을 전문가라고 하는데, 오직 한 길만 걸어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 오직 한길만 걸어온 사람을 ‘도인(道人)’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우리가 ‘도’를 추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우리가 걷고 있는 길 앞에 나의 인간성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승화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깨우침’을 향해가는 우리 일생이 아니겠는가. 부드러운 스포츠의 대명사가 된 유도(柔道)에도 도자가 들어 있다. ‘승패보다 도를 다한다’는 것이 유도의 본질인 것을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꿈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꾸고, 큰 꿈을 꾸라고 한다. 노년에 꾸는 꿈은 ‘해외에서 살고 싶다’거나, ‘크루즈 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하는 희망 사항이다. 인생은 희망사항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을 관통하는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무엇인지 모르면 인생에서 허무한 맛만 보게 된다. 《장자》에는 어느 날 꿈에 그가 나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원래 사람임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 원래 자신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을 잊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모습이 나비가 꾸는 꿈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어로 꿈은 ‘dream’이고, 어원은 ‘거짓말, 속이다.’라는 의미다. 또 ‘야단법석’이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뒤 술 마시고 춤추며 노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하룻밤 소란스러운 술자리도 결국 드림이며, 지나가고 나면 환상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한때 잘나가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꿈 속을 헤매듯 여생을 위로하는 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춘몽이다. 저자는 말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쓴 저자들과 매일 밤 꿈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런 꿈을 꾸며 책 속에 빠져 지내고 싶다. 물욕 가득한 꿈은 깨면 헛되고 그저 씁쓸하다. 차라리 내가 꾸고 싶은 꿈이 여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온갖 무거움과 가벼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꿈을 꾸기 좋은 시간, 그때가 바로 은퇴 후 지금이다.
노년의 꿈에는 죽음도 포함된다. 공자는 “나이가 들수록 꿈의 질이 달라진다.”며 만년(晩年)을 한탄했고, 근대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을 도왔던 미야자키 도텐은 어머니로부터 남자로서의 가르침을 받았다. “남자는 이불 위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무사 가문에서의 가르침으로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시대에 이런 꿈을 꾸는 이는 드물거나 없을 것이다. 저자가 가르쳐 주는 한 인물에 대한 꿈은 어떨까?
스위스 철학자 칼 힐타는 76세 때(지금으로 치면 100살쯤 되었을 나이)인 어느 날, 주네브 호반가 작은 오솔길을 딸과 함께 산책했다. 10월의 스위스 하늘은 맑고 시원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힐타는 평소보다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딸에게 우유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딸이 우유를 데워서 가져왔을 때 힐타는 소파에 누워 숨져 있었다. 마치 단잠을 자는 모습으로, 책상 위에는 《평화론》원고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의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정신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신의 온전한 도구로서 작업을 하다, 죽는 것이 질서 있는 노년의 생활방식이며, 인생의 이상적인 종결이다.”그는 자신의 꿈처럼 이상적인 죽음을 맞았다. “아내든 딸이든 가족 중의 누군가가 식사하라고 서재의 문을 노크했을 때 내가 책을 펴 놓은 채 숨을 거두었으면, 이것이 나의 숙원이다.”저자가 한 말이다. 꿈에 그리는 이상적인 죽음을 위해 오늘 하루도 신중하고 알차게 채워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저자는 94세다. 그는 나름대로 인생을 달관한 것도 같다.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고마워요! 와타나베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