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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역사 스크랩 사마천 (BC145? - 86?) [사기] 완성(BC 97)
양기석 추천 0 조회 74 16.06.01 13:4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2341&cid=41773&categoryId=41778      [  역사의 혼, 불멸의 역사서로 부활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AleQqEIGS_A&list=PLOuI36mjYX4lAbLsU5hATt68YEg-jcgC6&feature=player_detailpage [사기 1]

https://www.youtube.com/watch?list=PLOuI36mjYX4lAbLsU5hATt68YEg-jcgC6&feature=player_detailpage&v=Q7MhvxvQ-n0 [사가 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19315&cid=43077&categoryId=43077    사기의 구성과 내용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28248&cid=42016&categoryId=42016    역사 속으로 - 사마천 부자()

 

사마천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司馬遷, B.C. 145? ~ B.C. 86?

저는 천하의 산실된 구문()을 수집하여 행해진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 그러나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진실로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에 보관하였다가 내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촌락과 도시에 유통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주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지혜로운 이에겐 말할 수 있지만 속인에겐 말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마천, ‘임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시대적 전환의 한 가운데에 처한 역사가 사마천

사마천 이미지 1

오랜 분열의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시킨 () 제국은 강권통치에 바탕을 둔 급격한 통일책이 실패로 돌아가며 무너졌다. 최후의 승자 한(漢) 고조 유방은 진 제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파란을 피하고 안정에 치중했다. 무위()를 중시하는 황노()사상이 전한() 초기를 특징짓는 이념이었다. 제7대 황제 무제(武帝) 유철(, 재위 기원전 141~87)은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무제는 흉노를 비롯한 주변 민족들을 공격, 압박하고 서방 교통로를 확보했으며 국내 제후의 권력을 사실상 소멸시키고 민간의 유력자들을 억압하며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이 국가 재정 위기를 초래하자 소금과 철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시행하고 증세를 단행함으로써 백성의 부담이 무거워졌다. 무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시키면서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꾀하고, 유교를 국가공식이념으로 중시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법가사상에 바탕을 두어 통치했다.

무제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등용된 인물들은 지방에서 추천된 인재들 가운데 황제 자신이 선발한 새로운 관료 집단이었다. 그들은 상황에 따른 개인적 판단을 중시하며 법률의 유연한 적용을 지향하던 예전의 통치방식 대신 법률을 엄정하게 적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정치, 사회, 사상적 변화를 무제 시대의 관료로서 직접 겪은 사마천은 새로운 전환의 시기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먼 과거로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지역까지 포괄하는 역사, 곧 [태사공서()]를 서술했다. (후한 시대부터 [사기()]로 불림)

[사기]의 체제,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세계질서관

당나라 사마정의 ‘사기색은()’, 장수절의 ‘사기정의()’, 송나라 배인의 ‘사기집해()’가 적혀 있다. 이 세 가지 중요하고 기본적인 주석을 일러 삼가주()라 한다. <출처: Wikipedia>

이른바 기전체()의 통사()인 [사기]는 130권, 52만 6,500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체제는 지배자 또는 지배 왕조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본기() 12권, 연표와 월표를 구사하며 다양한 사항의 변화를 포착하여 보여주는 표() 10권, 정치사가 미처 포괄하지 못한 문화, 제도, 경제, 교통, 제사 등에 걸친 사항을 다룬 서() 8권, 제후 왕들과 그에 준한다고 판단한 인물들의(예컨대 ‘공자세가’) 역사와 전기를 다룬 세가() 30권, 다양한 분야에 걸친 주목할 만한 개인들의 일대기와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예컨대 ‘조선전’) 다룬 열전() 70권 등이다. 또한 각 편이 끝날 때마다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짧은 평론이 실려 있다.

[사기]의 체제에서 본기, 세가, 열전은 그 순서대로 하나의 위계적 동심원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사기]의 체제는 중국의 황제, 제후 왕, 그리고 개인과 주변 민족으로 구성된,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세계질서관 그 자체인 셈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마천은 [사기]를 통해 중화() 중심주의적 세계관 또는 화이() 이분법적 틀을 확립시켰다는 평가도 받는다. 예컨대 그는 흉노에 대해 ‘음습하고 불길한 땅에 사는 호전적인 야만인’으로 지목하며 오랑캐로 규정했다. 이에 관하여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흉노의 압박에 밀리다가 드디어 황제국가의 이념, 즉 하늘 아래 만방이 모두 황제 일인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는 이념을 현실에서 추구할 수 있게 된 무제 시대에 사마천이 살았다는 점도 감안해볼 수 있겠다.

치욕 속에서도 굳게 지킨 역사가로서의 사명감

이릉을 변호한 사마천에게 궁형을 내린 한 무제 유철 <출처: Wikipedia>

사마천은 제6대 황제 경제() 중원() 5년(기원전 145. 다른 주장도 있음)에 오늘날의 섬서(西) 성 한성()현에서 태어났다. 10살 무렵 고문()을 깨우치고 10대 초부터 강남, 강북의 여러 지방을 두루 편력한 뒤 산동과 하남을 거쳐 수도 장안에 들어가 낭중에 임명됐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사천 지방에서 운남의 곤명까지 여행을 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특히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많은 곳을 방문했다. 이러한 경험이 [사기] 편찬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결코 문헌자료만 파고드는 책상물림의 역사가가 아니었다.

기원전 110년 무제가 천지()에 제를 거행하는 봉선() 의식을 위해 태산을 방문했을 때, 천문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 벼슬에 있던 아버지 사마담은 낙양 땅에 머물다가 봉선 의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를 깊이 한스럽게 여긴 사마담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운남에서 급히 돌아온 사마천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역사서 편찬의 꿈을 잇고자 결심했다.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이 흉노에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마천은 이릉의 입장을 변호하다가 투옥되어 이듬해 궁형, 즉 생식기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았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치욕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사마천은 그러나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며 편찬 작업에 전념했다.

사마천의 역사관, 왕조의 성쇠()와 문명의 순환

사마천이 역사를 쓸 때 늘 모범으로 의식했던 것은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였다. [춘추]는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연대기에 바탕을 둔 텍스트로, 역사상 사건과 인물에 대한 가치 판단을 미묘하면서도 간결한 필치로 보여준다. 사마천 당시에는 공양학파의 [춘추] 해석이 가장 유력했는데, 공양학파의 대표적 인물 동중서()에게 배운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사상을 담으려 했다. 이에 따라 [사기]는 단순히 역사 사실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현실 사회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이다. 엄정한 현실 비판을 통해 사마천은 자신의 이상()을 드러내려 했다.

사마천은 각 왕조의 역사를 최전성기에서 쇠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중도에 일시적인 중흥기가 있기는 하지만 성()에서 쇠()로 하강선을 그린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탁월하고 영웅적인 인물이 나라를 세우고, 우둔하고 무능력한 황제에 의해 쇠락의 길을 걷다가 폭군에 의해 멸망하는 패턴이 하(), 은(), 주(), 이른바 삼대() 왕조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왕조 성쇠의 요인이 황제 한 사람의 도덕적 기질과 능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사마천은 하, 은, 주의 정치와 문화의 특질을 각각 충(), 경(), 문()으로 파악하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퇴락하면서 그 각각이 야(. 조야함), 귀(. 미신), 시(. 경박함, 허식) 등으로 변했다고 판단했다.

요컨대 하는 충에서 야로, 은은 경에서 귀로, 주는 문에서 시로 변화한 역사라는 점에서 그 내용은 달라도 패턴은 같다고 본 것이다. 결국 전() 왕조의 퇴락하고 부패하는 정치와 문화 상황을 다른 이념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극도의 쇠락에서 극도의 번성으로 극적 전환을 이루는 것이 왕조 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관에 따른다면 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왕가()의 교체로만 볼 수는 없으며 정치와 문명의 양식과 본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역사적 요청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이 된다. 사마천은 삼대() 순환설과 함께 문질() 교대설도 언급했다. 문(문화적 꾸밈, 세련됨)과 질(조야함, 질박함)이라는 상반되는 특질이 교대로 출현한다는 것으로, 문명의 전체적 특성 전환을 말한다는 점에서 삼대 순환설과 궤를 같이한다. 역사를 문명적 순환으로 파악하는 이러한 역사관은 이후 중국의 역사관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하늘의 도()는 과연 옳은가 그른가?, 유교적 세계관과 질서에 대한 의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려는 것을 만류하는 간언을 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수양산에 숨어 고사리를 캐어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와 숙제의 일을 기록한 백이열전()에서 사마천의 심경과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도()는 사사롭지 않고 늘 착한 이와 함께 한다고 하는데, 백이와 숙제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그들은 행실이 그토록 고결해도 굶어죽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학문을 좋아하는 이는 안연이라 했지만, 안연은 자주 궁핍하여 굶주리다가 끝내 요절했다. … 극악무도한 도척은 날마다 무고한 이를 죽이고 사람의 간을 꺼내 먹었으며 무리 수천 명을 모아 포악방자하게 천하를 횡행했지만 끝내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 이른바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그른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적군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이라는 치욕을 당한 사마천 자신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을 철학적, 윤리학적으로 말하면 이른바 도덕과 행복의 관계 문제에 해당한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고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도덕과 행복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야 할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늘의 도, 하늘의 이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침묵한다. 인과응보의 내세관을 지닌 불교나, 공과를 심판하는 하늘의 주재자가 있는 도교라면, 도덕적으로 살면서 불행을 당한 이는 내세에서 복락을 누린다고 답할 수 있겠지만, 유교적 세계관과 도덕관념에 따른 천도()는 도덕과 행복의 일치 문제에 대한 답이 궁하다. 천도에 대한 사마천의 의문은 유교적 예교 질서 자체에 대한 의문을 함축하고 있다.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사마천, 중국 역사의 아버지

최초의 통사 《사기》 완성(기원전 91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기원전 82년 : 고구려족의 소국, 한4군 중 임둔 · 진번군을 공격 축출; 한, 한4군 재편
기원전 75년 : 고구려, 현도군을 공격, 요동지역으로 축출
기원전 57년 : 신라시조 혁거세 즉위
기원전 37년 : 고구려 시조 주몽, 졸본부여에서 즉위

중국인들을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최초의 통사인 《사기()》 이래 그들은 왕조가 교체할 때마다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2,000년간 계속해왔다.

중국 사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기》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중국인들은 역사기록을 남겨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했고, 역사 기록자인 사관은 객관성을 귀중하게 여겼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나라 대부 최저라는 사람이 군주를 살해하고 그 아우를 임금으로 세웠다. 제나라 태사()가 이를 기록하자 격분한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죽은 태사의 뒤를 이은 그 아우가 역시 똑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또 하나 남은 동생이 태사가 되어 다시 이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서는 최저도 어쩔 수 없어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지방에 있던 다른 사관이 태사가 차례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판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기록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사마천 필생의 업적인 《사기》. '사기'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이후 붙여진 이름이고,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라고 불렀다.

사마천, 중국 역사의 아버지 본문 이미지 1

세계 최초의 통사 《사기》는 황제로부터 한무제에 이르는 3,000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기전체의 사서로 도합 130권에 이르는 대저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1,000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와 정확히 일치함으로써 입증되었다. 무엇보다도 《사기》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유려하고 생동감 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이 깊이 있게 서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 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이 책에 빠져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이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 130권 중 열전이 70권을 차지하여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서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 즉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는 황제 이후 역대 제왕의 일을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고, 세가()는 제후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전기이며, 열전()은 그 외의 주목할 만한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나 주변 민족들의 역사를 담았다. 표()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 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는 정치사에서 다루지 못한 사회 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다. 또한 각 편의 말미에 '태사공왈'로 시작하는 사마천 자신의 주관적인 짧은 평론이 본문과 구별되어 실려 있다.

대역사가 사마천.

대역사가 사마천.한무제 때의 사람 사마천은 탁월한 재능과 엄정한 객관성으로 《사기》를 저술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었다.

사마천은 전한 경제 때 섬서성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현장 답사하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 후 낭중()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고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고 사마천이 태사령의 직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 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하여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사마천은 공양학파인 동중서에게 수학하여 일관되게 춘추()를 역사서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흉노에게 패퇴한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이릉은 5,000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하여 흉노 1만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옥중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거나 아니면 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인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넉넉지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환관이 된 것이다.

2년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다. 그가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에 오른 것이다. 중서령은 황제의 곁에서 문서를 다루는 직책이었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것은 그가 환관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승화시켜 나갔다. 무려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가 완성되었으니, 그때가 기원전 91년.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사마천은 마치 《사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 역사의 아버지라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마천, 중국 역사의 아버지 - 최초의 통사 《사기》 완성(기원전 91년)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2012. 3. 23., 가람기획)

 

 

기전체

[ ]

요약
역사 사실을 서술할 때 본기()·열전()·지()·연표() 등으로 구성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비롯되어 중국·한국의 역대 왕조에서 정사() 서술의 기본 형식으로 자리잡았다.

기전체()는 기()·전()·지()·표() 등으로 구성하여 서술하는 역사 서술 체재()로서 가장 중요한 기()·전()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라고 한다. 중국 전한()의 사마천(, BC 145?~BC 86?)이 쓴 《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뒤 《한서()》에서 《청사고(稿)》까지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를 서술하는 기본 체재가 되었다.

‘기()’는 제왕의 정치와 행적을 중심으로 역대 왕조의 변천을 연대순으로 서술한 것이다. ‘표()’는 각 시대의 역사의 흐름을 연표()로 간략히 나타낸 것이며, ‘지()’는 제례()나 천문(), 경제(), 법률() 등의 문물과 제도에 관해 항목별로 연혁과 변천을 기록한 것으로 일종의 문화사()나 제도사()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사기》에서는 ‘서()’라고 분류되었지만, 반고(, 32~92)의 《한서()》부터 ‘지()’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전()’은 각 시대를 풍미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다. ‘기()’는 ‘본기()’, ‘전()’은 ‘열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고려 초기에 지었다는 《삼국사()》가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단군본기()>나 <동명왕본기()> 등이 담겨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기전체()로 서술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뒤 김부식(, 1075~1151)의 《삼국사기》와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고려사》가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16세기 말 오운()의 《동사찬요()》, 17세기 후반 허목(, 1595~1682)의 《동사()》, 18세기 후반 이종휘(, 1731~1797)의 《동사()》 등도 기전체()로 서술되어 있다.

기전체()는 단순한 연대순의 서술이 아니라, 통치자를 중심으로 각 시대의 주요한 신하와 인물의 전기, 제도와 문물, 경제 실태, 자연 현상 등을 분류하여 서술하여 시대의 특징과 변동을 유기적이고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리고 각 시대에서 활동한 인간의 삶에 대해서도 좀더 생생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전체()는 왕조 전체의 체제와 변동을 서술하기 위한 정사()의 기본 서술 체재로 자리잡았으며, 그 때문에 정사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전체 [紀傳體]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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