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 생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얼마 전 자리에서 내려온 변영섭 前문화재청장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강세황은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추켜세워졌지만 실증적 연구는 거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변 前청장이 박사논문 테마로 강세황을 정해 그에 관한 소상한 자료를 발굴, 세상에 소개한 것이다. 강세황의 전기적 내용은 그 후 여러 연구를 통해 덧붙여졌지만 큰 줄기는 이때의 변 前청장의 연구가 기본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에 따르면 강세황은 한성판윤을 지낸 강현(姜鋧, 1650-1733)의 막내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단지 막내가 아니라 부친이 64살에 얻은 늦둥이었다. 따라서 사랑이 각별했다. 더욱이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런 사랑의 자양 덕분인지 커서는 본인이 보인 효심이 대단했다. 부친이 84살로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21살이었던 그는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뿐만 아니라 7년 뒤에 다시 모친이 돌아가시자 이번에도 선산에서 3년간 여막을 지켰다. 이렇게 보면 그의 20대는 6년 동안을 돌아가신 부모 봉양을 위한 시묘살이를 한 것이 된다.
이렇게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그에게는 이미 어린 아들 둘이 있었다. 하나는 17살에 낳은 맏아들 인이고 27살 때 본 둘째 완이었다. 표암은 모친상을 치룬 뒤 서울을 등지고 처가가 있는 안산을 내려가는데(1744년 겨울, 32살) 이때 큰아들은 15살이었고 둘째는 5살 그리고 막내는 막 돌이 지났었다. 서화가로서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안산 생활부터인데 생활은 여의치 않고 계속해서 곤궁했던 것으로 전한다.
강세황 <산수도> 지본담채 21.7x40.5cm 개인
앞서 소개한 <산수도>를 놓고 과거 한양에서의 생활을 떠올리며 그렸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면 그같은 생활 속에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스럽게 생각하면서 그렸음직한 그림도 있다. 앞서 그림과 같은 화첩에 들어있는 또 다른 <산수도>이다. 그림 속 내용 역시 물가의 고즈넉한 풍경으로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물가의 수각(水閣) 대신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띠풀 지붕 집이 나무그늘 속에 있다는 정도이다. 이처럼 조촐하게 그려진 물가 풍경은 보기에 따라서는 세속을 떠나 살고자 하는 은자적 삶을 재현한 것처럼도 볼 수 있다.
왼쪽 여백에 적힌 시구도 어찌 보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澗水空山道 柴門老樹(간수공산도 시문노수촌)’이란 구절은 ‘계곡물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흐르고, 사립문 고목 우거진 마을 속에 보이네’ 란 뜻이다. 이런 뜻이라면 은자가 살고 있는 자연을 묘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唐詩)의 한 특징인 ‘정경(情景) 융합’의 경(景)을 묘사한 부분일 뿐이다. 시 전체로 보면 주제인 정(情)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 장치라 할 수 있다. 시의 저자는 두보로 경치가 아니라 아이 걱정을 테마로 삼아 이런 시를 지은 것이다. 그의 시 ‘아이를 생각하며(憶幼子)’는 다음과 같다.
憶幼子 억유자
驥子春猶隔 기자춘유격
鶯歌暖正繁 앵가난정번
別離驚節換 별리경절환
聰慧與誰論 총혜여수론
澗水空山道 간수공산도
柴門老樹村 시문노수촌
憶渠愁只睡 억거수지수
炙背俯晴軒 자배부청헌
둘째(기자)는 봄에도 여전히 헤어져 있는데
꾀꼬리 소리 봄볕에 실로 시끄럽네
이별한 채 계절이 바꿔 놀라지만
총명함은 누구에 자랑 하리
계곡물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흐르고
사립문 고목 우거진 마을 속에 보이네
아이 시름에 다만 졸기만 하니
웅크린 등에 처마밑 봄볕 따듯하네
이 시는 757년 그러니까 두보 나이 46살 때 쓴 것이다.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두보는 가족을 데리고 서쪽 봉상으로 피난을 시켰다. 그리고는 단신으로 전선사령부를 찾아가다 적군에 사로잡혔다. 장안으로 끌려간 두보는 반란군 아래에서 억지 벼슬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이때 지은 시가 이것이다.(두보는 이 시를 짓고 난 뒤 얼마 뒤에 장안을 탈출, 다시 봉상으로 가 가족들과 재회하고 그곳으로 이동해온 전선사령부와도 합류한다.)
두보 시에는 부인 얘기는 거의 없지만 반면 아이 얘기는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아이를 늦게 낳은 때문에 그만큼 애정이 각별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쓸 757년에 큰아이 종문(宗文)은 8살이었고 둘째 아들 종무(宗武)는 5살이었다. 시속의 기자(驥子)는 둘째 종무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 그래서 봉상에서 헤어진 뒤 해가 바뀌자 아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꾀꼬리가 봄볕에 시끄럽게 지저귀는 것을 보고 아이가 많이 컸을 생각을 하지만 한가하게 얘기를 나눌 틈이 없다는 것이다. 혼자 생각해보면 두고 온 가족들이 있는 곳은 계곡물이 인적 없는 산길을 따라 흐르고 사립문 앞에는 늙은 고목이 있는 마을이었다는 것. 그곳 생각과 아이 걱정에 몸을 웅크리고 있자니 등에 내리쬐는 따뜻한 햇볕에 그저 잠들게 된다는 것이다.
시 전체를 알지 못했더라면 이 그림은 아이 걱정과는 무관한 채 은자가 살고 있는 한적한 풍경이 될 뻔했다. 고즈넉한 풍경이 실은 산과 강으로 이어진 벽촌을 뜻한 것이었다. 그 곳에서 서울을 등지고 살고 있는 아이들의 장래에 대해 ‘어찌될꼬’ 하는 걱정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 한 구절에 별생각을 다 한다고 하겠지만 시가 읽히면 그림이 달라 보이는 것도 사실이기도 하다. 이 역시 시의도의 한 묘미이다.(y)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