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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5)
- 영으로 가난한 자는 복되다 -
마태복음 5장 1-3절/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복 있다 - 그 첫 번째, “영으로 가난한 자는 복되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그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팔복’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시작하여서 마태복음 7장에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팔복’은 여덟 가지의 복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의해서 임한 천국이 그들의 것인 복 있는 자가 됨으로 인해서 천국이 그들에게서 어떻게 시작되고 있는지를 여덟 가지를 들어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이 되는 것인양 이해하고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실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거나 심령이 가난한 자로 있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가난한 자’를 심령의 가난에서 본다면 마치 기독교<그리스도의 교회>가 부요한 자를 적대시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띠게 됩니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부를 멀리하고 무소유한 자의 삶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 같이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의 삶은 무소유한 삶에 있다고 강조하여 말하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듣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24)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우리에게 무소유한 삶을 요구하시거나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에서 그러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부자가 아닌 가난한, 그래서 무소유한 자로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있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상태에 있을까요? 만일에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필요한 돈이 있어서 “나도 돈이 좀 있었으면.....”하며, “내 수중에 돈 몇 십만 원만, 몇 백만 원만 있었으면....”하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는 신령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신령하지 못한 그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 정도의 돈도 아닌 지금 당장 몇 천 원만 있어도 좋겠다며 이 돈만 있으면 가고자 하는데도 갔다 올 수 있고, 또는 필요한 것을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종종 있게 되지 않습니까? 1182년에 태어나 1226년에 사망한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인 수도사로 무소유한 삶을 실천한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중세 교회 시대의 많은 수도사들도 결코 무소유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가 소유한 재산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이런 아들의 처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돈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는 아버지 앞에서 그가 입은 옷까지도 벗어버림으로써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그는 일생을 수도사로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프란체스코는 결코 진정한 무소유자로서의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비록 그가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재산을 모두다 포기하고 몸에 걸친 마지막 옷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무소유자로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그 모두를 포기하여 버리는 대신에 탁발을 통해서 그날의 양식을 얻어서 살아갔으니깐요. 결국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부<물질; 재물>는 소유하고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말이죠. 소유에서 떠나 있어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소유한 자로서 심령의 가난함에 있는 것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되지를 못합니다. 물질적인 부에서 마음이 떠나 있는 것을 심령이 가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이죠. 무소유하면 심령<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사실 무소유 되면 될수록 -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재산적 가치를 지니는 재물이 없으면 없을수록 - 심령<마음>이 겸손<겸비>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폐해지며 짓눌려 움츠려 있던 악한 죄의 본성이 거칠게 드러날 뿐입니다. 가령 말입니다. 3일 굶어서 도둑 안 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할 수 있을 것인지를 질문한 부자 청년에게서는 재물이 많은 까닭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근심이 되어 예수님에게서 떠났습니다. 재물이 있어서 이렇다면 말이죠 재물이 없어서는 그 소유의 욕망이 더욱 강해지는 법입니다. 이게 없어서, 이것을 어디서 구할 수가 없어서 말이죠. 사르밧 과부는 아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에 있었습니다. 이게 없어서 마음이 겸손해지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구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서서 애쓸 것입니다. 그럴 수가 없으니, 그러지를 못하니 남은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을 가지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기만 기다리자 하는 것이죠.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러한 여인과 딸린 아들을 이적으로 생명을 보존하여 주시는 것에서 당시 하나님을 떠나 있는 패역한 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에게 살리는 생명이 어디로부터, 누구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나타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무소유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무소유한 삶으로 심령의 가난함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름을 받아 따르는 제자들이 복 있는데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래서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복 있는 가난한 자는 무엇에 가난함으로 복 있는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복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왜 제자들이 그처럼 심령이 가난한 복 있는 자인가 할 때,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부르심을 받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주님의 통치 영역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인 이유로 심령이 가난하는 복 있는 자로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현재 하나님 나라에 있으며 또한 종말 이후에 말해지는 하나님 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 말씀하시고 있는 ‘심령’, ‘가난’, ‘복’이라는 말씀하시고 있는 것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복’이란 것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심령’과 ‘가난’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를 알면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을 왜 하신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대개는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어성경과 공동번역은 이러한 이해에 의한 번역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서의 ‘영’은 ‘마음’이라는 번역과 큰 차이가 없는 ‘영(혼)’의 개념에서입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완전히 바꿔 놓는 오역(誤譯)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심령’, ‘마음’ ‘영’(영혼)의 개념에서의 ‘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영’을 말하는 것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 안에’, ‘영에게’ 라고 번역이 되어야 옳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심령’, ‘마음’, ‘영혼’이 가난한 사람을 복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의 영에 관한 한 가난한 사람, 하나님의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심령으로서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영으로 보아야 하며, 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영으로 ‘가난한 사람’ ”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이라는 말의 원문이 지닌 뜻은 “두려워하여 ‘움츠러들다, 쭈그리다, 웅크리다’ ”의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거지’, ‘빈민’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지가 될 만큼 가난하여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자신의 재산으로 살 수가 없어 손수 일하여 벌어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상대적인 빈곤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빈약한‘, ’부족한‘, ’무력한‘의 뜻과는 다릅니다.
혹자는 왜 “영으로 가난한 자는 복 있다”고 말씀하시는가? “영으로 부요한<부자> 자는 복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오직 그 영이 있어야만, 그래서 그 영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오직 그 영이 있어서, 그래서 그 영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복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복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난한 자’는 구약성경에서의 ‘가난한 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4:16-19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한 예언의 성취로 있는 일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셨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61:1-2에서 하신 예언에 따른 성취인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야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였으며, 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 목적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시려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을 ‘가난한 자’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다양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 본래는 경제적으로 매우 빈곤할 뿐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 강자에 의해 억압을 당하고, 심리적으로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를 깊이 의존하는 자들을 지칭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가난한 자’(욥 24:4)라는 의미 외에도, ‘겸손한 자’(시 10:17), ‘곤고한 자’(시 34:6), ‘온유한 자’(민 12:3), ‘가련한 자’(32:7)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경우에도 영역본들은 ‘가난한 자’(the poor; NIV, ESV), '억압을 당하는 자‘(the afflicted; NASB, NJB), '겸손한 자’(the humble; YLT), '온유한 자‘(the meek; KJV)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였고, 한글역도 ’가난한 자‘(개역 및 개역개정, 쉬운성경, 표준새번역, 우리말성경), ’불쌍한 자‘(현대어성경), ’억눌린 자‘(공동번역), ’온유한 자‘(한글킹제임스성경)로 그 번역이 다양합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이 ’가난한 자‘에 대한 관주를 달아놓기를 ’비천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난한 자’인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는 거의 대부분 특수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나옵니다. 시편 34:6은 여호와께 부르짖고 여호와의 응답을 받아 구원받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 언급합니다. 시편 40:17에서는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자’로 묘사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억하고 구원해 주도록 요청합니다. 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유일한 피난처요 구원자로 찾는 궁핍한 포로입니다(시 69:32-33). 그런 까닭에 ‘여호와의 가난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가령 한 예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상천하지(上天下地)에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음을 믿게 하시는 것(신 4:39)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이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서는 다만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만 살게 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만 그들의 생명이 공급되고 그 생명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이신 하나님만이 광야의 이스라엘에게서는 ‘유일한 생명’이었습니다. 이 ‘유일한 생명‘이 이스라엘에게서는 영생케 하는 ’참생명‘입니다. 이 ’생명‘만이 존재하는, 이것 외에는 그 어떤 아무 것도 가치로 가지고 있지 않는, 그래서 여호와이신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아무 것도 가치로 소유한 것이 없는 그런 참으로 ’가난한 자‘, 곧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런 자로 표현하여 묘사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 분 만을 가장 존귀히 여기는 사실로 말미암아서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배설물<쓰레기>로 여겼습니다(빌 3:8). 그러니 바울에게는 그리스도 한 분 외에는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섬기는 자가 되기 이전에 자기에게 가치 있고 유익하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인 것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탐심을 이루는 욕심이며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이루는 해(害)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 ’영으로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심은 구약의 배경과 이러한 의미에서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으로 가난한 자’가 되게 하심이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가 임하심으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불러 모으시는 모든 자들에게 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이 ‘가난한 자’를 ‘복 있는 자’로 규정하십니다. 이들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소유됨으로 인해서 그들의 주이신 ‘영에게’, 또는 ‘영으로’, 또는 ‘영 안에서’, 또는 ‘영에 관한 한’ 의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다만 그 ‘영으로만’ 살게 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신이 믿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이러한 모습이 드러나져 그 나타남이 있다고 하면 참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를 갖는 것에서 그 해결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신앙을 가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가 있는 곤고한 삶에서 “다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심”이 있고, 여기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며”, “주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김”으로(마 4:4, 7, 10) 살아가게 하심이 있으며, 이를 주께 구함이 있다면, 그 은혜를 순간순간 깨달을 때마다 그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주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팔복의 말미에서 “나를 인하여…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마 5:11, 12).
이러한 것을 말이죠. 우리가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에서 복되고자 하며,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면 되겠는지요. 우리가 어떻게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으로 행복할 수가 있겠는지요.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으로서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는 것에서, 그래서 그분의 지배에 있는 것에서 우리의 기쁨이 있으니 말이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의 영을 즐김에 있는 행복함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