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행 2장 37-42절
설교제목 : 나 하나 꽃 피어
나쁜 엄마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5월은 인간의 삶의 기초이자 가장 중요한 관계의 근간을 이루는 자녀와 부모, 스승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날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전 세대보다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부모세대가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할 가치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육의 목표가 무엇일까?” 질문해보면, 옛 성현들이 가르쳤던 인간 됨됨이, 즉 인격의 함양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진 듯합니다. 예수께서, 공자께서 우리 시대를 보면 많이 책망할 것 같습니다.
최근 시작한 인상 깊은 ‘나쁜 엄마’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극 중 검사가 된 아들은 성공과 야망을 위해 엄마의 아들로서 삶을 정리하고자 호적에서 자신의 이름 제외하고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 되기 위해 도장을 받고 돌아가는 길에 의문의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음의 사경에서 깨어났지만, 모든 신경이 마비되고, 7세 아이의 정신연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재활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침대에 누워 어머니가 주는 밥을 거절합니다. 계속되는 식사거부에 엄마(라미란, 영순)가 화를 내자, 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배부르면 잠 와, 잠 오면 공부 못해”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아빠를 억울하게 떠나보내고 아들을 공부시켜 사법고시에 합격시키기 위해서 밥도 배불리 못 먹게 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주저앉아 오열하며 말합니다. “이제 먹어도 돼. 너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엄마, 아빠처럼 살지 말고 행복하라고 그랬어. 용서해줘.” 실현하지 못한 엄마의 꿈을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투사하여 아들이 그 삶을 살아내길 바랬던 엄마의 삶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아들에게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아들을 조금씩 재활시킵니다. 한국사회의 교육은 ‘좋은 대학 가기’를 위한 부수적 방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꿈과 이상을 이룰 수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하나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인격의 성장을 위한 모판이 교육의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기적이고 수단 방법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인간의 전형이 아니라 가슴 따뜻하게 타자를 공감할 수 있는 인간, 자신의 성취를 덜어내어 더불어 살고자 하는 넉넉함을 지닌 인간으로 자라갈 수 있는 이 땅이 되고, 그 토양 위에서 어린 영혼들이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전보다 나아진 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있던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하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열한 사도들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엄숙하게 설교하였습니다(2:14-36). “자신들은 술 취한 것이 아니며 요엘 선지자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기적과 놀라운 표징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친히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에 따라 무법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살리셨고,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힘있게 전하는 베드로의 설교는 변방 갈릴리 천직이었던 어부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천성이 다혈질이라 성급하고, 잦은 실수도 하고, 스승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동거동락한 삼년의 시간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익히고 배운 그분의 삶과 말씀은 그의 가슴 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그는 용기를 얻게 되었고, 예수가 누구신지 진정으로 알아차리고 배우고 믿고 경험한 바를 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는 이전의 시몬이 아닌 사도로서 정체성을 증명하는 베드로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향상되고 진보하고 발전된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이전보다 나아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의 생각과 삶의 패턴은 수많은 어제의 삶의 축적물입니다. 충성스럽게 예수를 따랐던 삼년의 결과의 집적물이 바로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오늘이란 어제의 삶의 결과이며, 오늘은 내일의 삶의 청사진임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의 삶을 어제의 것으로 꽉 채우게 됩니다. 흩어져있던 과거의 삶을 집약하고 도약시킨 것은 성령의 개입입니다. 성령은 어제의 삶에 묶여서 과거의 나를 비난하거나 주위환경에 대한 원망을 넘어서게 합니다. 오히려 오늘의 삶의 과제를 수행하도록 주체로서 서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스위스에 가면 융과 폰 프란츠 묘에 가서 반드시 인사를 드립니다. 폰 프란츠의 묘비에는 항상 햇빛이 들어 예쁜 꽃들이 만발해 있습니다. 그 묘비 중앙에는 두 개의 원이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모양이 있고, 그 가장자리에 라틴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Percussie Petram et Fluxerunt Aquae” _Flowing water penetrates the stone.
“흐르는 물은 바위를 관통한다”는 뜻입니다. 흐르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바위가 관통되듯, 무언가 지속성과 끈기로 흘러간 것은 이전보다 발전된 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쁜 식습관을 가진 사람은 10년 후에 반드시 그 영향으로 병에 걸릴 확률은 대단히 높아집니다. 오늘 좋은 삶의 결실을 하는 사람은 과거의 시간동안 좋은 것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기대되는 삶의 여정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설교의 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언제쯤 이런 설교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어떤 사건을 일으키는 힘과 에너지가 사람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스위스 분석가인 한수엘리 에터 박사는 저에게 가끔씩 너의 설교 속에서 어떤 정서성이 드러나야 하고, 너의 분석 속에서도 정서성이 방출될 때 사람들과 내담자의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감흥과 감정이 건강하게 분출될 때 그곳에서 영향력이 방출됩니다. 베드로의 힘있는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고백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37)”
힘 있는 설교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반추하고 삶을 결단하기 위해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삶의 진정한 변화와 구원을 위한 물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달라지고, 내가 변화될 수 있을까요? 모든 삶의 변화와 원인은 나, 곧 ‘주체’로 소급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질문해야 합니다. 그때 구원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구원받음은 단지 예수 믿고 천국을 가는 먼 미래의 사건을 위한 보증수표가 아닙니다. 구원받았다고 입버릇처럼 되새김하는 것으로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지체없이 대답합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38).”
변화되길 원한다면, 구원받기 원한다면 회개가 답이라고 주저함 없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 회개는 ‘메타노이아(metanoia)’,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방향을 선회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고수했던 삶의 원칙과 방향, 그릇된 삶의 방식과 행태와 결별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가치의 전도입니다. 어디로부터 돌아섬일까요? 그것은 죄입니다. 죄란 과녁에서 빗나간 삶의 전형을 가리킵니다.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 죄를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대의 죄는 무의식성입니다. 이 무의식성은 참된 본성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구원하다’의 라틴어는 ‘살부스(salvus)’로,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치료하다’입니다. 구원과 치료는 같은 맥락 안에 있습니다. 무의식성의 치료야말로 구원의 과정인 것입니다. 회개란 우리의 전 존재가 치료되는 과정이며, 새로워지는 출발점입니다. 회개하는 인생은 망하지 않습니다. 내 걸음을 반성하고 돌아서려는 자는 이미 새로움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정화의 과정이며 다시 태어나는 행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과정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더 이상 자아의 힘과 욕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한 운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기준과 지향점이 되게 하여 예수의 눈과 마음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전형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게 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무의식성의 죄로부터 깨끗해지면, 그곳에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은 변화된 존재 깊은 곳에 좌정하시어 영혼의 힘과 지혜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이것이 구원받는 자, 진정한 신앙생활의 본보기의 내용입니다. 회개는 아름답습니다. 회개와 세례를 통하여 새로운 존재의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하나 꽃 피어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였습니다. 비뚤어진 세대는 왜곡된 세상이자 경도된 세계를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병들고 왜곡되고 경도된 시대정신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가치는 물질과 속도로 환원되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이 생기면, 그 탐욕에 눈멀게 하고,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든 마이다스의 손을 소유한다할지라도, 진정한 배부름과 관계는 어려워집니다. 시간을 품어야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법입니다. 속도의 편리함은 느림과 불편함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을 잃고 더 큰 편리를 갈구하게 하고 조급하게 합니다. 비뚤어진 우리 자신과 세상은 무의식성의 물에 빠져 허욱적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과 치료를 전해야 합니다. 먼저 너가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조동천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라는 시가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나 하나 꽃피어 /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피고 나도 꽃 피면 / 결국 풀밭이 온통 /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 산이 달라지겠냐고 / 말하지 말하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 결국 온 산이 활활 / 타오르는 것이 아니겠느냐
갈릴리 변방의 목수의 아들, 예수의 불꽃은 사라지지 않고 제자들의 가슴 속에 다시 타올랐고, 전체 세계에 불을 지피며 서서히 물들여 갔습니다. 그리고 삼백년이 흐른 후 세계관을 전환시켰습니다. 나 하나 꽃피고, 너도 꽃피면 세상은 꽃밭이 되아가고, 나 하나 물들이고 너도 물들이면, 조금씩 세상은 붉게 물든 산처럼 물들어 갈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비뚤어지고 왜곡된 곳에 구원받으라고 선언하면서 꽃 피어갈 수 있는 여정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