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6 년 산남지방에 정의, 대정, 양현을 설치했는데 삼달리는 당시 정의군현 지역으로 1리는 와강 2리는 주어라 불렀다. 1609년 동서방리의 설치로 정의현 좌면에 속하게 되고, 1795년 삼달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14년 정의현의 폐지로 제주군에 속함과 동시에 정의면으로 개칭되었는데 삼달리는 여기에 편입되고 1934년 면사무소를 성산리로 이전하였으며 이듬해에 면명을 성산면으로 개칭, 성산면 속하게 되었다. 1943년에는 행정구역을 구로 호칭하다가 1946년 8월 제주도제의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 성산면에 편입되고 삼달1리와 삼달2리 행정리로 분리되었다. 1980년 12월 1일 성산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1리로 개칭되었다.
♣삼달1리의 옛 지명은 와강(臥岡)이다. 대개의 마을들이 그러하듯이 이 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설촌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구전하는 바에 의하면 처음 부락이 형성되었던 곳 가까이 있는 더러물내(川)의 형상이 누워있는 강을 닮았다하여 와강이라 일컫게 되지 않았는가 추측하고 있다.
와강 마을의 형성은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년전 조선 인조(1623-1649)시대를 기점으로 지금 마을제를 지내고 있는 본향당을 중심으로 경주김씨, 청주한씨, 진주강씨, 제주고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5, 6여호의 가구를 이루어 살았는데 크게 번창하지는 못했다.
그 당시는 상천리(上川里)를 가장 가까운 마을로 왕래하며 큰동마루에서 마을제도 같이 지냈다. 그러던중 1749년(영조25년)에 신천리에서 신천강씨가 자녀 육남매를 데리고 와강리로 이주했는데 점차 와강리의 중심적인 문중으로 형성되었으며 오늘까지도 면면히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후 곡산김씨와 현재 제주고씨가 1771년(영조47년)경에 이주하여 왔고 곡산강씨가 하천리에서 이주하여 옴으로써 와강리는 차츰 마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200년전 부터는 부락제도 포제 동산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와강이라는 리명(里名)은 양반이 사는 곳으로는 적합지 못하다 하여 삼달이라고 개명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해 낸 분이 강 성익공(康 聖翊公)이다. 공의 공적은 삼달1리에 자리잡은 헌수단(獻壽檀)의 비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공은 일오(一嗚)의 자로서 자는 오성, 호는 명제이며 조선 영정조시대 지평(持平), 장령(掌令)벼슬등을 역임하면서 청렴과 충직으로 명성을 떨치던 분이다.
공이 특평직을 맡은 1795년(정조 19년) 조정에서 와강이라는 지명이 좋지 않다고 함으로 부강하고 만사형통할 수 있는 고을을 뜻하여 삼달이라고 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삼달에 내포되고 있는 의미를 풀이해 본다면 사람이 통달해야할 세가지를 뜻하는 이름인데 "첫째로 조정에서는 규율이 중요하고, 둘째로 고을에서는 웃어른을 섬겨야 하며, 셋째로 세상에 보은과 백성을 위하는 것은 덕으로 하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삼달, 즉 셋을 통달하면 천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후 지금까지 천(賤)한 사람은 이곳에 살수 없었으며 그로서 반촌(班村)으로 발전하여 왔다. 강성익 공은 이곳에 헌수단을 건립하여 임금님의 만수와 국태민안을 소원하였으니 지나는 사람마다 하마(下馬)해서 경허한 마음을 표했으며, 오늘날에는 부락의 문화재로서 향토자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설촌 350여년이 지나는 동안 와강 마을을 최초로 개척했던 제주고씨, 청주한씨 진주강씨 일가가 살았다는 한상이터, 수웅이터등이 구전으로 남아있으나 그 후손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으로 보아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타지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나 그중 경주김씨 장손만이 유일하게 삼달2리에 거주하고 있다.
현재 삼달1리에 저주하고 있는 호주들의 성씨를 통계하여 보면 신천강씨와 그보다 조금 늦게 입주한 광산김씨 문중이 수적으로 우세하다. 신천강씨가 와강리에 입주할 당시 광산김씨는 성익공의 매와 제주고씨 역시 성익공의 매와 광산김씨는 성익공의 장녀와 군위오씨는 차녀와 혼인함으로서 삼달리에 정착하게 되었고, 고씨외계인 동래정씨와 김씨외 손인 연주현씨가 인석관계를 맺으며 이곳에 뿌리를 내려 강, 김, 고, 오, 정, 현,육성이 삼달1리의 역사와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해 오고 있다.이상과 같이 삼달1리의 설촌유래와 더불어 성씨 구성을 일별(一瞥)하였거니와 와강리 350년 역사에서 삼달리로 개명한 것이 1795년이므로 190여년간 삼달리명 아래 반촌의 씨족부락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신 풍리』『신천리』『하천리』세 마을을 본디 <내끼 >라 했는데 이는 내(川)의 끄트머리라는 뜻이다. 처사 오억령의 묘비와 호장 강필번의 묘비에 <천미촌(川尾村 > <川尾理 >라 기록된 것이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본디 한자어로는 <개로천(介路川)>이라했고 <진순내>라고도 불리웠다.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 반상의 구별이 심해짐에 따라 향족(鄕族)과 토족(土族)으로 구별하면서 향족은 내(川)의 윗쪽, 토족은 아랫쪽으로 모여 살면서부터 윗마을을 『웃내끼』라 하여 한자어로는 『상천미(上川尾)』, 아래마을은 『알내끼』라 하고 『하천미(下川尾)』라고 했던 데서 연유한 이름. 『신풍리(新豊里)』란 이름은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을 지향하여 그렇게 뜻을 둬 조선조 철종(서기 1840년)때 이 마을 사람 오진우(吳眞祐)에 의해 명명되어 지금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