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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캄보디아의 앙코르(Ankor) 유적군(遺蹟群)
앙코르와트(Ankor Wat) 전경 / 눈부신 앙코르와트의 부조(쿠루 평원의 전투) / 바이욘(Bayon) 사원
동남아시아 캄보디아에 번성하였던 앙코르(Ankor) 왕조는 크메르족이 세운 왕국으로 인근의 베트남(Vietnam), 미얀마(Myanmar), 태국(Thailand)과 힘겨루기를 하고 또 한족(韓族:중국)의 침입도 견디어 내며 성쇠를 거듭한다. 이 크메르족 앙코르왕조의 수도(首都)가 앙코르(Ankor) 였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촉(蜀)나라 제갈량(諸葛亮)이 크메르족 왕인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어 결국 승복시켰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故事)가 바로 이곳의 이야기이다.
부연(敷衍)하면, 전쟁이 끝나고 촉군이 돌아가려고 강을 건너려는데 수많은 병사가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생겼다. 제갈량(諸葛孔明)이 천기(天氣)를 살피니 전쟁에서 죽은 크메르군 원혼(冤魂)들이 촉군의 귀국을 못하게 하고 목숨을 빼앗으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갈량은 밀가루를 둥글게 빚고 속에 돼지고기를 넣고 삶아 사람의 머리처럼 만들어 강가에서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올리고 강물에 뿌리자 원혼들은 죽은 사람의 머리인 줄 알고 물러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제갈량이 밀가루로 반죽을 하고 고기를 넣어 사람머리처럼 만든 이것이 바로 만두(蠻頭:오랑캐 머리)가 생긴 시초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앙코르왕조는 7세기,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하여 ‘캄푸챠(Kampuchea)’란 이름으로 롤류오스 지역에 건국되며 이 때 중국에서는 캄푸챠를 진랍(眞臘)이라고 불렀다. 이곳에 9세기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거대한 사원들은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 때 이르러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원들과 힌두의 대 서사시의 벽화와 조각상들이 대량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 거대한 규모와 정교한 솜씨는 보는 사람들이 넋을 빼앗길 정도이다.
사원(寺院)들은 초기에는 불교사원으로 건립되지만 곧이어 힌두교가 들어오면서 힌두사원으로 탈바꿈한다.
12세기, 수리야바르만 2세(Suryavarman II) 때 국토를 넓히고 지금의 앙코르와트를 건설하게 되는데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 때 참파(Champa:베트남)의 침입을 막아내며 전성기를 이루게 되고 이때의 도시인구가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고려) 전체인구가 250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번성함을 짐작할 만하다. 이때 수많은 사원들이 세워지는데 타프롬(Ta Prohm:어머니에게 헌사), 프레아칸(Preah Khan:아버지에게 봉헌), 앙코르톰(Angkor Thom), 바이욘(Bayon) 등 아름다운 사원(寺院)들이 잇달아 건립된다.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유적군 인근의 도시 씨엠 립(Siem Reap)은 ‘씨엠’(시암족:태국)을 ‘립’(격파)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크메르 족은 인근의 여러 나라들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는 경쟁을 벌이는데 앙코르왕조 때 이르러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가 된다. 그 후 끊임없는 타 민족의 도전을 받는데 시암족(태국)의 일곱 번 침공을 잘 막아내었지만 여덟 번째 침공에 무너졌다고 한다.
15세기 중엽, 앙코르왕조의 쇠락과 주변국들이 강대화 되면서 아유타야왕국(시암족:태국)의 침공으로 남쪽의 프놈펜(Phnum Penh)으로 왕도(王都)를 옮기게 되며 아유타야의 왕 파라마라자(Paramaraja)는 수백 년 동안 앙코르왕국으로부터 지배와 간섭을 받았던 원한으로 철저히 유린하고 수많은 문화재, 신들의 무희(舞姬)인 압사라(Apsara), 수많은 대신(大臣)과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앙코르를 손에 넣은 아유타야도 오래지 않아 이곳을 떠나고 앙코르왕조도 폐허가 된 앙코르로 수도를 옮길 능력이 없어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1860년 프랑스의 식물학자 앙리 무오(Henry Mouhot)가 재발견하여 세계에 알려지기까지 400여 년 동안 밀림에 묻혀 잊혀진 도시로, 유령의 폐허도시로 알려져 아무도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여 무오가 짐꾼을 모집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앙리 무오는 1년여 탐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열병에 걸려 현지에서 죽는데 이곳 사람들은 ‘앙코르의 저주’라고 하며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앙리 무오의 기록이 책으로 출간된 후 이곳을 방문하였던 몇 명이 더 희생되었고 이어진 폴 포트(Pol Pot) 공산주의 정권 때 250만이 희생된 것도 앙코르의 저주의 연장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프놈바켕 사원 / 반데이스레이(여인의 성채) 벽면 부조 / 타프롬 사원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세워진 이 앙코르 유적군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걸작으로 100여 개의 크고 작은 사원들이 밀림 속에 산재해 있는데 훼손이 매우 심각하고 워낙 방대하다보니 국가 재정으로는 복원을 엄두도 못 내고 유네스코와 몇몇 나라에서 복원을 도와주고 있는데 지지부진한 형편이다.
이 앙코르 유적군(遺蹟群)을 조금 자세히 드려다 보면,
이곳을 후세 사람들은 ‘신들의 땅’ 혹은 ‘저주의 숲’으로 부를 만큼 영욕(榮辱)이 극심한 곳이었다.
현재 캄보디아의 도시 시엠 레아프(Siem Reap)에는 앙코르 왕조의 초기 유적군으로 꼽히는 ‘롤류오스 유적군’이 있는데 이곳에는 바콩(Bakong) 사원, 프레야코(Preah Ko) 사원, 롤레이(Lolei) 사원이 있다.
이 사원들은 현재 굉장히 훼손이 심한 상태이고, 북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반데이스레이(Bantaey Srei) 사원은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석조 사원인데 훼손도 덜하고 눈부신 조각이 돋보이는 사원이다. 또 바켕(Bakheng)산 정상에 세워진 프놈바켕(Phnom Bakheng) 사원은 훼손은 심한 편이지만 사원에서 보는 저녁놀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여 볼만하다. 다음은 거대한 왕궁건물인 앙코르 톰(Ankor Thom)이 있는데 경내(境內)에는 불교사원 바이욘(Bayon), 시바(Siva)신에게 바쳐진 힌두사원 바프온(Baphuon), 미국 영화 ‘툼 레이더(Tomb Raider)'의 촬영지로 유명한 타프롬(Ta Prohm), 왕궁터와 코끼리 테라스, 문둥왕 테라스, 승리의 문.... 등이 널려있다.
앙코르 톰 왕궁건물의 지붕 위에는 이 왕궁과 사원들을 건립한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과 관세음보살의 인자한 모습이 합성된, 미소 띤 모습의 두상(頭上)이 수십 개 조성되어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끄는 유적인 앙코르와트(Ankor Wat) 사원은 수리야바르만 2세 때 힌두교 비슈누(Vishnu) 신에게 바쳐졌는데 그 웅장한 규모와 치밀한 설계로 ‘신의 지문’이라는 찬사를 받는 건물이다.
크기는 외곽이 1.3km*1.5km의 장방향(長方形)으로, 둘레에는 넓은 해자(垓字)와 인공호수가 이어져 있다.
건물을 보면 1층 외곽에 제3 회랑(回廊)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면 제2회랑(回廊)이 있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한 층을 올라 3층에는 제1 회랑(回廊)이 있는데 건물 전체를 한 바퀴 도는 회랑이다. 제1 회랑의 안쪽 넓은 공간에는 다섯 개의 첨탑(尖塔)이 우뚝 솟아있는데 이곳은 천상(天上)의 세계로 맨 가운데 있는 첨탑은 불교(佛敎)에서 신들이 거주한다는 수미산(須彌山:일명 메루산)이 60m 높이로 우뚝 솟아있고 나머지 둘레의 4개의 첨탑은 조금 낮다. 이곳은 왕과 대사제(大司祭)들만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석조계단이 무척 가파르고 좁게 조성되어있다. 건물의 웅장함도 감동이지만 눈부신 부조(浮彫)들로 채워진 회랑(回廊)을 둘러보노라면 힌두 신화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들게 된다. 모두 돌을 쪼아 부조(浮彫)로 표현했는데 힌두 신화가 배경이다.
‘왕의 행렬’, ‘우유바다 젓기’, ‘쿠루평원의 전투’, ‘라마왕자와 악마의 왕 라바나의 전투’, ‘천국과 지옥’, ‘천상(天上)의 무녀(舞女) 압사라(Apsara)’.....
왕의 행렬 / 우유바다 젓기 / 천상의 무녀 압사라(Apsara)
제2회랑(2층)에만 1500여 개의 압사라와 여신(女神)의 부조가 새겨져 있고 ‘왕의 행렬’ 등 제목이 붙여진 부조작품은 그 길이가 10여 m씩이나 되기도 한다. 2010년, 집사람과 함께 이곳을 다녀왔다.
11.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Borobudur) 불교사원
만다라(曼陀羅) 형식의 사원 조감도 / 종 모양의 불탑 스투파(Stupa) / 사원(寺院) 전면(前面)
인도네시아 자바(Jawa)섬 중부에 위치한 요그야카르타(Yogjakarta/일명 족자카르타)는 인구 63만 정도의 소도시지만 수많은 유적들이 있는 고대도시로, 그 중에서도 세계 최대불교유적으로 꼽히는 보로부두르 (Borobudur)사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로 꼽히는 유적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세계 3대 불교유적으로 꼽히는 불교사원은 이 보로부두르 사원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Ankor Wat), 미얀마 바간(Bagan)의 불교사원군(寺院群)을 꼽는다고 한다.
AD 8세기, 이 지역을 통치하던 불교왕국 사일렌드라(Shailendra) 왕조가 지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원은 당시 위세를 떨치던 힌두교에 대항해서 이토록 크고 웅장하게 지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사원명 ‘사일렌드라(Shailendra)’는 ‘산의 주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벽면의 부조(浮彫) / 구멍마다 부처님을 모심 / 사원 일각의 야수상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은 요그야카르타에서 북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있는 불교유적(遺蹟)으로 AD 825년 지어졌는데 화산의 폭발로 화산재에 묻혀 사람들에게 잊혀 있다가 1814년 네덜란드 고고학자들이 발굴하여 복원하였고 199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유적은 어디를 둘러봐도 들어갈 방(공간)이 없으니 사원이라고 해야 하나, 탑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엄청난 규모인데 정사각형 밑면의 한 변 길이가 112m, 높이는 31.5m라고 하며 맨 아래쪽 기단(基壇)은 흙속에 묻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불교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라고 한다.
기단(基壇)을 제외하고 8층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은 빙 둘러 화랑이 이어지는데 회랑 벽면에 새겨진 아름다운 부조(浮彫)와 곳곳에 안치된 수많은 불상이 눈길을 끈다.
사원의 구조는 기단(基壇)부분 포함 총 10층인데 1층부터 6층까지는 부처의 생애와 불교의 가르침이, 7층부터 10층 까지는 천상의 세계가 아름다운 부조로 섬세하게 벽면에 새겨져 있는데 1층부터 6층까지는 시계바늘 방향으로 부처의 탄생부터 그의 일생과 행적, 가르침이 정교하게 부조로 새겨져 있다.
제일 아래쪽 기단(基壇)은 아직까지 흙 속에 숨겨져 있는데 미래를 예언하는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7층 천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 중, 종 모양의 작은 불탑(Stupa)이 수없이 많이 모셔져 있는데 불자(佛者)들은 불탑(Stupa/부처님이 안에 들어 있는 종 모양) 표면의 구멍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넣고 소원을 빌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사원 전체의 구조가 만다라(曼陀羅)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불교에서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 만다라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만다라는 불교의 한 분파인 밀교(密敎)의 수행에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내면세계, 혹은 부처의 법신(法身)인 진실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그림이라고 전해진다.
수많은 종 모양의 불탑들 / 보로부두르 사원 그림 / 사원 안내판 / 만다라(曼陀羅)
이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멀지않은 곳에 힌두교 프람바난(Prambanan) 사원도 유명하다.
사원의 원래 이름은 ‘라라종그랑(Lara DjongGran/Roro JongGrang) 사원’으로 프람바난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찬디프람바난(Candi Prambanan/프람바난 사원)이라 불리며 인도네시아 최대의 힌두사원이라고 한다.
라라종그랑 사원은 10세기 초 힌두신 시바(Shiva)를 모시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시바 신전(높이 47m)이라고 하는데 라라종그랑은 ‘호리호리한 소녀’라는 뜻으로, 인근 주민들이 신전에 있는 힌두교 여신 두르가(Durga/시바의 부인)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프람바난 사원의 전설/ ‘공주와 악마의 대결’>
옛날, 이곳에 살던 반둥(Bandung)이라는 왕자는 적국(敵國)의 아름다운 공주 라라종그랑에게 결혼신청을 하지만 공주는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자라는 사실을 알고 거절한다.
그러나 보복이 두려워 단 하룻밤 만에 1.000개의 신전을 쌓는다면 결혼하겠다는 조건을 내 걸었다.
위대한 마법사였던 반둥은 수많은 악마들을 불러서 순식간에 신전들을 쌓아 올렸다. 새벽녘에 이 모습을 본 공주는 마을 사람들에게 신전 하나를 무너뜨리라고 지시한다. 드디어 아침이 밝아 오자 1.000개의 신전을 모두 세운 악마들은 일을 멈추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주의 신호에 따라 신전 하나를 무너뜨렸다.
결국 1.000개에서 딱 하나 모자란 999개의 사원이 세워지게 되었고, 뒤늦게 공주의 지시로 신전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안 반둥은 공주를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돌로 된 공주를 모신 신전을 1.000번째 신전으로 삼았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진다. <나는 2019년 대학 후배 세 명과 이곳을 둘러보았다.>
12. 영국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 스톤헨지(Stonehenge)
거석문화 스톤헨지 1,2 / 스톤헨지의 구성 평면도
영국 런던에서 서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솔즈베리(Salisbury)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Stonehenge)는 높이가 4미터이고, 원형으로 배치된 거대한 입석 구조물인데 원형의 직경이 98m, 폭 6m, 깊이 1.4m의 도랑에 둘러싸여 있는 원형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용된 석재(石材)는 무게 25~30톤의 거대한 돌을 원형으로 늘어놓고 그 위에 올려놓는 형식이어서 환상열석유적(環狀列石遺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스톤헨지(Stonehenge)는 그 특이한 구조 때문에 아틀란티스(Atlantis) 후예들이 건설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Stonehenge’는 고대 앵글로색슨어로 ‘공중에 매달린 바윗돌’이란 의미)
이 신비의 유적은 탄소측정 결과 선사시대인 BC 3100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3기에 걸쳐 보수되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고 한다. 제1기 최초 건립이 BC 3100년이고, 제2기 보수가 BC 2000년, 제3기 보수가 BC 1100년으로 추정된다니 대략 1000년마다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톤헨지는 일종의 종교적 숭배 장소로 건설되었으리라 추측되지만 어떤 성격의 종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하는데 축조물의 중심축이 1년 중 중요한 날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방향과 나란히 배치한 사실은 스톤헨지가 하늘을 숭배하던 사원이었다는 추측을 낳게 한다고 한다.
13. 이집트의 콤 엘 쇼카파(Kom El Shoqafa)의 카타콤베(Catacombe)
묘지 입구 / 내부 모습 / 시신을 처리하는 아비누스 신 / 신에게 봉헌하는 파라오
카타콤(Catacombs)은 일반적으로 지하무덤을 의미하는 로마어로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데 ‘콤 엘 쇼카파’ 카타콤베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무덤으로 건축양식으로 보아 로마제국시기(AD 1) 개인용으로 조성되었다가 이후 공공의 카타콤으로 바뀌면서 규모가 커지고 AD 4세기까지 공동지하묘지로 이용되었다.
이 알렉산드리아의 공동지하묘지 카타콤베는 기독교 박해시대에 로마에 건축된 카타콤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이고 있어 로마와 그리스 및 이집트의 문화가 혼합된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꼽는다고 한다.
카타콤베는 시체를 매장할 작은 구덩이들이 갱도를 따라 층층으로 만들어졌고, 그 갱도들이 여러 층으로 이루어지면서 점차 그 규모가 매우 커진다. 그야말로 지하에 ‘네크로폴리스’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란 그리스어로 ‘죽음(Necros)’과 ‘도시(Polis)’가 합성된 말로,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뜻인데, 다름 아닌 공동묘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로마에는 발견된 카타콤베만 70개 정도라고 하는데 부근의 인접한 나라들에서도 같은 형태의 지하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 아프리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축조된 카타콤베는 이집트 문화가 결합된 형태여서 특히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곳에 묻힌 순교자들을 위한 예배는 9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5세기 말부터 더 이상 카타콤베는 사용되지 않았고 이후 순교자들의 유골은 주로 성당에 모셔지면서 오히려 카타콤베에 있던 유골들이 다른 도시나 유명한 성당들로 옮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카타콤베에는 석관이나 벽면에 그리거나 새겨 넣은 벽화들이 많은데 주로 부활과 관련된 주제들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양을 어깨에 멘 ‘선한 목자’, 영혼의 영원한 삶의 상징인 ‘공작새’, 영혼의 안식을 의미하는 ‘닻’,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말씀에서 ‘물고기’ 그림도 많다.
물고기는 그리스어로 ‘ΙΧΘΥΣ’ 표기되는데 라틴어로 옮기면 ‘ICHTHYS’로 그 첫머리 글자가 ‘예수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문장이 된다고 한다.
예전 어느 책에서였던가 기독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 기독교인들은 만나면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막대기로 물고기를 그리면 서로 기독교인으로 알아보았다는 장면이 있었다.
14. 터키의 성 소피아(Sophia) 성당
성 소피아 성당 / 화려한 내부 모습 / 아들과 함께(2010년)
터키(Turkey) 이스탄불(Istanbul)에 있는 성 소피아(St. Sophia) 성당은 360년에 최초로 봉헌되었는데, 여러 번 화재와 내란으로 파괴되었다가 537년 유스티니아누스(Justianus) 대제(大帝) 때 완공된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이었다고 한다. 건물의 특징은 중앙 돔의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주변에 작은 돔을 만들었는데, 균형 감각과 예술미의 극치를 이룬다. 이런 건축 양식을 비잔틴(Byzantine) 양식이라 하고, 뒷날 오스만(Ottoman) 제국 시대의 이슬람 건축 양식의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중앙 돔은 높이가 55.6m로 20층 건물에 해당되는데 돔은 정확한 원형이 아니고 약간 타원형으로 하여 그 무게를 분산했다고 한다. 홀은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데 동서 길이가 77m, 남북 길이가 71.7m나 되어 한 바퀴를 둘러보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성당 둘레에는 첨탑(尖塔) 미나레트(Minaret)가 6개나 있다.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Mehmet Ⅱ)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은 ‘이스탄불(Istanbul)’로 이름이 바뀌고 이슬람 도시가 되었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비잔틴 제국의 종교적 심장인 성 소피아 성당으로 말을 타고 가서 이슬람식 예배를 드리고 콘스탄티노플의 종말을 알렸는데 이것은 그리스 정교의 종말을 뜻하기도 했다. 성 소피아 성당은 서로 다른 두 종교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의 공존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에서 다시 ‘수니(Sunni)’와 ‘시아(Shi'ite)’라는 이슬람 두 종파의 통합을 가져온 곳이기도 하다.
15. 이탈리아 피사(Pisa)의 사탑(斜塔)
피사의 사탑 이모저모
피사의 사탑(Torre di Pisa)은 이탈리아의 작은 중부도시 피사(Pisa)에 대성당을 건설하면서 맨 마지막 축조물로 종탑을 축초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173년 건축가 피사노(Pisano)가 흰 대리석으로 짓기 시작한 이 종탑은 전체높이가 56m로 설계되었는데 전체 8층 중 3층까지 완공되었을 때 무른 지반(地盤) 탓으로 탑이 기울어지는 것이 발견되어 중단했다고 한다. 현대 같으면 곧바로 헐어버렸겠지만 당시는 계속 기울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니 신기하다.
결국 중단되었던 공사를 다시 재개하여 1350년에 완공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 1년에 1mm정도씩 기울어져 지금은 5.5도나 기울어져 ‘기울어진 탑(斜塔)’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탑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이가 탑 위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는 낙하실험을 하기 수월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낙하의 법칙을 발견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논리의 오류를 지적하는데 그것으로 대학에서 추방당하고, 지동설(地動說)을 발표했다가 종교재판을 받고... 역사는 웃긴다.
현재 탑의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55m, 계단은 297개이고 전체 무게는 1만 4,453t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기울기의 진행은 여러 번의 보수 공사로 멈추었는데 또다시 조금씩 기울어지자 1990년 이탈리아 정부는 10년 동안 관광객의 입장을 막고 10년이 넘게 보수공사를 하여 지금은 기울기가 5.5도에서 멈추어서 2001년 6월 관광객에게 다시 공개를 하였고 보존을 하기위하여 입장인원과 관람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16. 이집트의 살라딘(Salah ad-Din) 요새(要塞)와 기사(騎士)의 성채(城砦)
살라딘(카이로) 요새 / 기사의 성채 / 성채의 성벽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있는 살라딘(Salah ad-Din) 요새는 이슬람 수니파(Sunni 派)의 술탄(Sultan) 살라딘(Salah ad-Din)이 십자군 전쟁 시기이던 AD 1176년에 십자군(十字軍)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하여 건설한 방어용 성채(城砦)로, 13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거의 700여 년 동안 이집트의 통치자들이 성채 안에 거주했다고 한다. 또한 기사의 성채는 1142년~1271년에 예루살렘의 성요한 구호기사단(Hospitaller Order of Saint John)에 의해 지어졌는데 그 후 13세기 말, 이슬람 국가인 맘루크(Mamluk) 왕조에 의해 증축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된 십자군 성채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한다.
살라딘의 요새는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지만, 수준 높은 건축물이 남아 있어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하는데 이 요새는 10세기에는 비잔틴(Byzantine) 건축 양식이었지만, 12세기 말에는 프랑크 건축 양식으로 변형되었으며, 이슬람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12세기 말~13세기 중엽)에 증축되었다고 한다.
이슬람 정통교파로 일컬어지는 수니파는 최후의 예언자를 무함마드(Muhammad)로 믿으며 이슬람교도 중 85%를 차지하고 있고, 시아파(Shi'ite 派)는 차지하는 규모(인원)는 15%로 작지만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단(敎壇)으로 무함마드의 사촌 탈리브(ʿAlī ibn Abī Ṭālib)를 정통 예언후계자로 보고 신봉한다.
17. 영국 로마네스크 건축의 진수(眞髓) 엘리(Ely) 성당
크로싱 타워 / 성당 내부와 창문장식 / 성당 내부 / Crossing Octagon
영국의 건물 중에서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건물로 캔터베리(Canterbury) 성당, 세인트 올번스(St. Albans) 성당과 엘리(Ely) 성당을 꼽는다고 한다. 엘리(Ely)는 영국 잉글랜드(England) 케임브리지셔(Cambridgeshire) 주의 우즈(Ouse) 강에 있는 작은 섬으로 길이 11km, 너비 6km 정도이다.
7세기 동 앵글리아(Kingdom of East Anglia) 왕국의 공주인 에셀드리다가 이곳에 수녀원을 세웠는데 870년 덴마크인들에게 파괴당했고, 970년 그 폐허 위에 베네딕투스(Benedictus) 수도회의 수도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11세기, 최초의 노르만인 수도원장이었던 시메온(Symeon, 1081~94) 원장이 지금의 주교좌성당(Ely Cathedral)의 기초를 세웠다고 하는 유서(由緖) 깊은 성당이다.
장식(粧飾) 양식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엘리성당은 화재와 붕괴 등의 재난을 겪으면서 증개축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성모마리아 예배당(1321~45), 크로싱 타워(1322~40), 성가대석 옆 난간(1336~37) 등을 장식 양식으로 지었다. 성모마리아 예배당에서는 벽체에 장식이 집중되었는데 오지형의 블라인드 아치가 두세 겹씩 겹치면서 바탕을 이루었고 그 위에 조각, 돋을새김, 성화, 금세공 등의 장식 처리를 더했다. 또 엘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크로싱 타워가 있는데 실내는 45미터와 22미터인 크고 작은 두 개의 동심형 (同心型) 팔각형으로 이루어졌는데 팔각형 꼭짓점마다 기둥을 세웠다.
작은 팔각형은 크로싱 옥타곤(Crossing Octagon)이라고 하는데 안쪽 면을 네 열로 분할한 뒤 블라인드 아치와 창으로 장식했고 블라인드 아치 위에는 성화를 그렸는데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18. 프랑스의 클뤼니 수도원(Abbaye de Cluny)
클뤼니 수도원(프랑스 부르고뉴)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은 정복왕 윌리엄 1세(William I, AD 910년) 때 기욤(Guillaume) 공작이 베네딕투스(Benedictus)파 수도사들을 위해 세운 수도원(修道院)이라고 한다.
초대 수도원장으로 베르노(Berno)를 임명했는데 베르노 수도원장은 베네딕도 규정을 철저히 지켰고 군주(君主)들이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등 수도원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분으로 지금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구교(舊敎)와 개신교(改新敎) 간의 분쟁인 위그노(Huguenot) 내란(內亂)과 봉건제도(封建制度)에 대항하는 공화정(共和政)의 선포로 대 혼란의 정국으로 빠져들어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7~99)을 거치며 수도원건물이 거의 파괴되고 말았는데 현재는 몇몇 부분만 남아있지만 역사적인 의미와 건축기법 등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해프닝 ‘카노사(Canossa)의 굴욕(屈辱)<1075>’ 사건을 잠시 조명해 보는데 중세(中世)에는 종교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중세초기 교황(敎皇)과 각국의 국왕(國王)들 사이에는 미묘한 흐름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지속했는데 11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 VII)가 각국의 국왕과 제후들이 갖고 있던 성직자들의 임명권(任命權)을 박탈하고 교황이 직접 임명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다. 다른 국왕들은 그런대로 수긍하는 자세였으나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Heinrich IV)는 왕권(王權)도 신이 직접 내린 것인데 교황의 주장은 신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런데, 결론을 말하면, 대부분 로마제국의 황제인 자신의 결정에 동조하던 각국의 국왕과 제후들이 모두 교황의 편을 들고 나서자 하인리히 4세는 설 곳을 잃게 된다.
<카노사의 굴욕>
1077년, 교황이 주최한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회의에서 결국 황제인 하인리히를 추방하기로 결의하자 하인리히는 교황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겠다고 발표하지만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왕비와 왕자,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몇몇 신하들을 데리고 추운 겨울 라인강을 건너고 알프스 산을 넘어 교황에 용서를 빌러 직접 간다. 마침 이탈리아 북부 카노사(Canossa)성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은 절대로 만나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인리히 황제는 카노사의 성문 앞에서 모자도 없이 맨발에 얇은 겉옷만 걸친 채 3일 동안을 꼬박 눈 속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이를 불쌍히 여긴 교황은 마침내 접견을 허락하고 모든 것은 교황의 허락을 받는다는 조건을 수락 받은 후 파문(破門)을 취소했다는..... 웃지 못 할 희극이다.
19. 칠레 이스터(Easter) 섬의 모아이(Moai) 석상(石像)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들
이스터(Easter) 섬은 남아메리카 서쪽 태평양에 있는 섬으로 칠레(Chile) 영토에 속하는 섬인데 곳곳에 900여 개의 거대한 석상(石像)들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고, 그 석상들을 모아이(Moai)라고 한다.
숫자로는 900여 개지만 400여 개만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데 일반적으로 키가 3.5~5.5m에 달하고 무게가 20톤 정도인데 가장 큰 모아이 석상인 엘 히간테(El Gigante-거인)는 높이가 22m, 무게는 150톤에 이른다니 놀랍다. 이 석상들은 대부분 서기 400년~1680년에 만들어졌지만 11세기경에 가장 많이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1722년 부활절에 처음으로 이 섬에 도착한 네덜란드의 야코프 로헤벤(Jacob Roggeveen) 제독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남태평양 한가운데, 지도에 표시되지도 않은 섬을 키가 10미터도 넘는 거인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 것이다. 제독은 세 척의 배를 조심스럽게 섬에 접근시켰는데 제독 일행이 상륙하자 여러 가지 색을 몸에 칠한 원주민들이 환영 나왔는데 원주민들은 보통 키에 붉은 머리칼의 백인이었고 로헤벤 일행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어마어마하게 큰 석상(石像)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로헤벤은 섬에 도착한 날이 부활절임을 기념해 섬 이름을 이스터섬(부활절의 섬)이라 붙였다고 한다.
이스터섬는 타이티섬에서 4,000킬로미터, 하와이에서 8,000킬로미터, 호주에서 9,000킬로미터, 칠레에서 3,8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으니 그야말로 절해고도(絶海孤島)라고 할 수 있다.
이 섬의 면적은 163.6㎢ 정도인데 북쪽과 동쪽, 그리고 남서쪽 꼭지점 위치에 사화산(死火山)이 있어서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섬으로 아열대(亞熱帶) 기후를 보인다고 한다.
이후, 이 섬이 알려지자 미국인들이 섬 주민 22명을 노예로 납치해 간 것을 비롯하여, 1862년에는 페루의 악명 높은 노예상들이 이 섬의 왕과 승려 대부분을 사로잡아 구아노(Guano:새똥이 굳어 돌처럼 된 비료) 광산에 인부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러한 노예상들의 횡포에 의해 이스터섬의 고대왕국은 1862~1870년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된다. 최대 1만 5000여 명이나 살고 있었던 이 섬에는 침략자들의 만행과, 천연두·매독 같은 전염병에 의해 1877년경 불과 110명의 원주민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하지만 1888년 칠레가 이스터섬을 병합한 뒤 인구는 계속 늘어 현재 4,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스터섬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귀가 작은 단이족(短耳族)과 귀가 크면서 인육(人肉)을 먹는 장이족(長耳族)이 살았는데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단이족이 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이 두 부족 모두 석상을 제작했는데 서로 상대방보다 크게 만들려 했고, 상대방 부족이 만든 석상의 눈알을 파내어 파손하는 짓거리가 이어져서 현재 파손되었거나 눈알이 없는 석상이 무척 많다고 한다.
20. 이라크의 사마라(Samarra) 유적
아바스 왕조의 황궁터 / 대 모스크 / 나선형 미나레트
중세 이슬람의 황금시대 아바스(Abbasid) 왕조의 수도였던 사마라(Samarra)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Baghdad)에서 북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살라딘(Saladin)주에 있으며 인구는 30만 명 정도이다.
이곳은 북아프리카의 왕국 튀니지(Tunisia)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히며 지배했던 이슬람 아바스 왕조(Abbasid dynasty)의 수도(首都)였다고 한다. 서기 836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Caliph) 알무타심(al-Mutasim)은 이곳을 수도로 정했지만 892년에 수도를 다시 바그다드로 옮겼다.
이곳의 유적은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130㎞ 떨어진 티그리스 강 양안에 흩어져 있는데 유적은 남북 41.5km, 너비는 4~8km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의 유적은 사마라(Samarra)에서 발달하고 이슬람 지역 너머까지 영향을 미쳤던 혁신적인 건축술(建築術)이 특징이라고 한다.
사마라 유적은 9세기에 건축된 대 모스크(Mosque)와 나선형 첨탑(尖塔-Minaret)이 대표적이다.
특히 나선형 첨탑(尖塔)인 미나레트(Minaret)가 매력적인데 비스듬히 경사면을 빙빙 돌아 정상까지 오르게 만든 구조이다. 이슬람지역 유적에서 BC 2200년경에 축조된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지구라트(Ziggurat-聖塔)도 발견하게 되는데 피라미드형 계단식 신전에 부속된 탑으로 그다지 높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까지 25기 정도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가장 큰 것은 엘람(Elam-이란)의 초가잠빌(Chogha Zambil)에 있는 것으로 길이가 각각 102m인 정4각형 기단에 높이는 24m인데 그것도 원래 높이의 반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고대 성탑 지구라트(Ziggurat)에서 발전한 것이 나선형 첨탑인 미나레트(Minaret)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