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주관적 느낌의 가치에 대해서라면,
찰스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도 성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의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설사 그 선택이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대신에 조동하고 걱정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삶을 보내는데,
이들의 DNA가 자신으 이기적 목적에 따라 그렇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아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ㄱ느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들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자져다주는 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으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송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은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 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느낄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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