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놀이
이동민
언어로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언어 이론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언어 개념은 언어와 대상은 동일하다고 보았다. 언어는 세계를 매개하고,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았다.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언어는
1. 단어는 개별적인 의미가 있다.
2. 의미는 그 단어에 부가되어 있다.
3. 단어의 의미는 단어가 지시하는 대상이다.
4. 문장은 단어가 결합하여 만든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단어가 의미를 갖으려면 단어 자신과 단어가 매개하는 대상이 일치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언어는 언제나 ‘애매함’과 ‘모호함’을 꼬리표로 달고 다닌다. 경험하는 것과 언어로 표현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상 언어가 대상과 단일한 지칭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환상이다. (우리가 책상이라고 하였을 때 어떤 책상을 구체적으로 딱 찍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니 때문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책상으로 수용한다.)
단어가 문장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을 보면 사전적인 뜻보다는 맥락에 의하여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파란색’이라는 단어를 보기로 하자.
1. 이 파란색과 저 파란색은 같은가?
2. 하늘의 파란색을 파란색 그대로 그려내기가 힘든다.
3. 날이 개면 파란색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 보라, 이 두 파란색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다른가.
5. 저기 보이는 파란색 바지를 가지고 오너라.
6. 신호등의 파란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7. 이 파란색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1’의 문장에 나오는 ‘파란색’을 보자. 사전적 의미로서는 두 개의 파란색은 같다. 그러나 문장의 맥락으로 보아서는 두 개의 파란색이 다를 수도 있다. 이처럼 언어에는 모호성이 있다.
위의 보기에 든 일곱 개의 파란색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인 뜻보다는 문장에 사용하는 맥락으로 읽어야 한다. 언어는 문장 속에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의미의 그물을 형성한다. 언어의 망이라고 할까. 그물 눈의 하나, 하나에 의미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 의미도 대상을 콕 꼬집어 내는 것이 아니고, 유사성으로 설명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가족 유사성이라는 말도 사용한다. 키와 얼굴과 몸세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의미를 만드는 데 가족처럼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파란색은 그냥 파란색이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무엇을 상징하는 어떤 의미나, 지시 대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문장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의하여, 즉 문장 안에서 언어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가에 의하여 서로 다른 의미가 생긴다. 즉 언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문학에서는 언어 사용을 ‘유사성’의 의미를 많이 활용한다.
다시 강조하면 언어에서 의미는 언어의 쓰임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할까(쓸까)를 생각하는 것은 ‘놀이’와 같다. 우리가 글쓰기를 하면서 문장을 만들 때 문장에 사용하는 언어를 골라내는 것은 퍼즐판을 만들기 위해 퍼즐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놀이라고 보았다.
놀이라고 할 때는 규칙이 있다. 언어 놀이라고 한다면 언어 현상의 바탕에 ‘규칙성’과 ‘맥락성’이 있다.(퍼즐을 선택할 때, 아무 퍼즐이나 고르는 것이 아니고, 규칙에 따른, 퍼즐 만들기에 적합한 것을) 문장에 사용할 단어를 가져와서 언어로 문장을 만들 때는 어떤 법칙과 문장이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맥락’이 있다고 보았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으면서 필요한 벽돌을 조수에게 요구한다. 시멘트 벽돌 세 장이라고 말하면 조수는 시멘트 벽돌 세 장을 가져온다. 벽돌을 쌓는데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면 그것을 가져다준다. 흰 벽돌이라고 하면, 흰색이 나는 벽돌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벽돌의 크기라든지, 배색이라든지, 벽돌 벽을 만드는데 필요한 규격의 벽돌을 사용해야 하고, 조수는 그런 벽돌을 정확하게 가져다 주어야 한다. 왜냐면 목표로 하는 벽을 쌓기 위해서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장이가 요구하는 단어가 흰 벽돌 세 개라고 할 때, 크기라든지, 시멘트 벽돌인지 도기로 만든 벽돌인지를 말하지 않아도 벽돌 쌓기라는 맥락과 규칙에 적합한 벽돌로 벽을 쌓는 다는 것은 암묵적인 약속이다.
언어로서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모여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것은 퍼즐로 퍼즐판을 맞추는 놀이와 유사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활동의 전 과정을 ‘언어 놀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도 규칙으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체계이다. 규칙에 해당하는 것으로 법, 제도, 윤리, 규범, 관습 뿐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소소한 규칙들, 교통질서라든지, 지하철에서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자리 양보하기, 에치켓 등등이 있다. 엄한 것도 있고 느슨한 것도 있지만 이런 것들이 삶의 규칙이다. 언어의 규칙도 이와 같다. 이러한 규칙들이 삶의 형식을 만든다.
무수한 언어들 중에서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언어가 그만큼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놀이에 동참하려면 언어의 문법을 따라야 한다. 언어의 문법은 한 문화권에서 오래 세월 동안에 걸쳐서 형성된다. 다시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지고 함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언어가 삶의 형식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언어의 규칙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규칙이 사용하는 맥락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언어의 맥락이란 단순히 언어의 소리, 기호, 단어, 문장의 기능을 안다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 즉 삶의 형식에 자신을 일치시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언어로 말한다는 것은 삶의 양식의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가 없으면 현실도 없다. 만약 어떤 문화권에서 희망, 후회라는 말이 없다면 현실에서도 희망, 후회라는 것이 없다. 현실 사회에 희망, 후회가 있을 때는 내가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그 단어가 사용되는 사회에서는 현실에서 희망, 후회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문학의 문장에는 문장 밖의 의미를 은밀히 드러내므로, 뉴앙스라는 것을 풍겨준다.
언어 놀이에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의 규칙을 그저 만난다는 것이 아니고 그 맥락을 이해하고, 행한다는 것이다. 규칙이란 언제나 공적인 것이다. 그러나 각자가 체험하는 경험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다. 경험을 언어로(발신자) 타자에게(수진자) 전할 때는 타자가 수긍할 수 있는 규칙을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비트켄슈타인은 사적 언어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다.(의미가 전달되려면 공적 언어라야 가능하다.)
규칙이란 실천을 의미한다. 규칙은 놀이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면서도, 놀이를 수행하는 사람을 규제하여 놀이가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한다.
그러나 규칙이 놀이의 진행에 걸림돌이 되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
언어의 총체가 인간의 삶이라면 언어는 인간과 삶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와 관계를 맺으면서 ‘엄마’라는 말을 배운다. ‘엄마’라는 말을 배울 때는 엄마의 실제의 대상과 엄마라는 말은 동일하다. 그러나 ‘엄마 = 엄마라 불리는 대상’이 처음에는 동일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동일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는 문화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 성장하면서 ‘엄마’가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익힌다. 여러 가지 의미가 곧 문화이다. 엄마에게 내가 해야 하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엄마와 나를 관계 맺게 하는 여러 규칙을 배운다. 한국 사회라면 ‘부모에 대한 효’라는 규칙을 배울 것이다. 엄마라는 말은 그 대상을 넘어서서 엄마와 관계를 맺어주는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사회 속에서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부터, 자신과 엄마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사회의 여러 규범을 습득한 후에는 ‘엄마’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글쓰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일상의 삶을 살면서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만날 때마다 그 대상은 나의 안으로 들어온다. 내 안으로 들어와서는 (나의)사유라는 과정을 밟으면서 본래와는 다른 모습으로 각색된다. 경험이라는 사적인 행위가 사색이라는 과정을 거칠 때는 문화를 만드는 모든 규칙들이 관여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사색을 거치면서 나의 경험은 다른 모습이 된다. 경험과 사색이 만들어 내는 모습이 바로 이미지이다.
이미지가 표출될 때는 언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다. 언어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 이외에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층이 또 있다. 언어로 표현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는 글의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작가가 나에게 ‘다가 옴’을 감정적으로 느낀다.
결론적으로 언어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예측을 할 수 없는 놀이처럼, 글쓰기는 ‘언어 놀이’를 통해서 얻어진다. 언어 놀이는 인간 삶의 형식(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글쓰기는 삶의 형식에서 일어나는 언어 놀이이다.
글쓰기에서, 즉 수필쓰기에서 어떤 언어를 선택할 것인가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아니 강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