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 정완영(鄭婉永,1919~)
그것은 아무래도 太陽의 권속(眷屬)은 아니다. 두메 산골 긴긴 밤을 달이 가다 머문 자리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은 거다.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다 못 달랠 회향(懷鄕)의 길목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돌담 위 十月上天을 등불로나 밝힌 거다.
초가집 까만 지붕 위 까마귀 서리를 날리고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천년(韓國千年)의 시장끼여. 세월도 팔짱을 끼고 情으로나 가는 거다.
白水 鄭婉永(1919~)선생님이 자작 대표시를 뽑을 때 빼놓지 않고 앞자리에 올려놓는 1979년 작품인 <감>이 내가 ‘다시 읽고 싶은 시조’ 로 뽑은 작품이다. 白水書簡集 <기러기 葉信>에 내게 보내신 서신 셋이 실렸는데 그 중 두 개는 임금님께 진상했다는 씨 없는 고산곶감을 보내드릴 때마다 답신을 보낸 내용이다. ‘감과 한국의 겨울밤은 한갓 동화 이거나 설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유의 깊이에 자리 잡은 하나의 등불 같은 과일입니다. 겨울밤의 시장기를 잘 달래겠습니다.’
白水선생님께서는‘감’ 을 남 다른 눈을 갖고 보셨다. 보통 사람이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감이 아닌 감의 속내를 헤아려 또 다른 상징성을 부여했다. 한국의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 달라서 쉽게 놓치기 쉬운 ‘감’ 이라는 시의 소재로 한국의 서정성을 극대화 시켜 현대시조의 전형적 정서로 형상화 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白水선생님의 情恨이 배어나오고 있다. 감은 아무래도 太陽의 권속(眷屬)은 아니다. 감은 맛으로 먹는 과일이 아니다. 情으로 나눠드는 과일이다. 감은 달빛이 실리고 노을을 마시고 돌담 위 十月上天을 밝혀드는 등불이다. 감은 까마귀가 서리를 날리는 초가 지붕위에 타고 있는 韓國千年의 시장끼다. 감은 근친(覲親)왔다 돌아가는 누님이 媤家에 따들고 가는 눈물이다. 사랑이다. 서리가 내릴 즈음 시골 길을 가다가 감나무에 매달린 붉은 감을 볼 수 있는 데 ‘감’ 이 어떻게 하면 그 둘레 달빛이 실려 꿈으로나 익을 수 있는 걸까. ‘감’ 이 산과 들 적시며 오는 핏빛 노을 다 마시고 저렇게 볼을 붉히고 있는 걸까. ‘감’ 이 어쩌면 눈물로도 사랑으로도 못 달랠 회향(懷鄕)의 절절한 심정을 자아내게 하는 걸까. 아마도 이 작품의 크라이막스요 절구라면 셋째 수 중장의 ‘한 톨 감 외로이 타는 한국천년(韓國千年)의 시장끼여’ 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 2000년 至月中浣老白. 정순량(시조시인)
‘옛 마을을 지나며’
··· 김남주(金南柱, 1945-94)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까치밥 남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기를
철부지는 계절을 모른다는 뜻이지요. 계절과 동의어인 ‘철’을 부지(不知)하니까요. 철모르고, 철없는 모기와 밤마다 씨름하다가 겨울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습니다.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려니, 벌써 입동(立冬)이네요.
입동은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가는 절기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무르익은 가을, 감나무의 감을 딸 때 추위에 배를 곯을 까치를 생각하며 감 몇 개를 남겨두는 따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 ‘까치밥’이라고 하지요.
서울 이태원에서 남산 올라가는 길, 어느 집 감나무 가지에도 ‘까치밥’ 이 매달려 있더군요. 가슴이 따뜻한 사람일 겁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가진 사람과 비교하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지요. 그러나 가슴이 푼푼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그 작은 것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입동을 앞두고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나눌 때 넉넉해지고, 감사할 때 행복해지는 것, 너무나 당연한 진리인데 왜 사람들은 아람치(제 차지, 제 몫)에 매달려 아등바등하고 감사한 마음을 품지 못할까요? 왜 행복과 먼 삶을 사는 걸까요?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 코메디닷컴 이성주의 건강편지 제634호 (2011-11-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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