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책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
이퐁
1. 『우리 동네 묘지 투어 소녀』(내털리 로이드, 씨드북, 2017)
얼마 전 청와대 홈페이지에 ‘자녀에게 엄마 성을 줄 수 있는 권리도 동등하게 보장해 주세요’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민법 제781조 제1항에 규정된 부성주의(父姓主義) 원칙을 ‘부부간 협의’로 개정하고, 자녀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구의 성을 줄 것인지는 출생신고와 함께 결정할 수 있도록 변경해 달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지금도 혼인신고 때 엄마 성을 주겠다고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되어 별도의 부부간 협의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부부가 함께 키우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우선적으로 주어지는 현실은 너무 익숙해서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했던 차별과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에서 여성에서 여성으로 이어지는 엠마 집안의 계보가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다.
엠마는 블랙버드 마을의 공동묘지 바로 옆 ‘본야드 카페’에 사는 여자아이로, 전직 권투 선수에 오토바이를 즐겨 타고 타투를 새긴 할머니, 복숭아 라벤더 머핀을 기가 막히게 잘 굽는 토퍼 오빠와 함께 산다. 엠마 집안에는 독특한 가풍이 전해지는데, 대대로 ‘들꽃’이라 불린 선조 여성들이 모두 ‘운명의 꿈’을 꾸고 난 뒤 인생을 스스로 결정해 살았다는 것이다. 집안의 가보인 ‘운명 일기장’에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스파이로 활약했거나 기자, 교사, 공중그네 곡예사, 수영 선수, 발명가, 소방관, 배우 등 천차만별의 삶을 살았던 선조 여성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엠마의 엄마는 뮤지션으로 일생을 살았다.
드디어 엠마도 들꽃이 가득한 묘지에서 작은 열쇠를 줍는 ‘운명의 꿈’을 꾼다. 엠마는 그 꿈이 블랙버드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 속 보물을 찾는 운명을 암시한다고 믿는다. 사실 본야드 카페는 몇 년째 수익이 나지 않아 부동산 재벌 워렌 스틸에게 팔릴 위기에 처해 있다. 묘지에 출몰하는 귀신을 무서워하긴커녕 묘지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곳곳을 안내하는 일을 도맡아 하는 엠마는 한없이 소중한 본야드 카페를 지키고 싶어 한다. 전설 속 보물을 찾아 부자가 되고 싶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엠마의 단짝 코디 벨과 토네이도를 겪은 뒤 선택적 함구증을 앓는 친구 얼 챈스가 전설의 보물찾기에 합류하고, 수상쩍은 인물들이 하나둘 출현하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흥미진진해진다.
내용이 찢겨 나간 운명 일기장의 몇 부분과 블랙버드 마을의 구전 가요 ‘사랑스러운 데이지’, ‘자연의 이메일’ 역할을 한다는 덩굴꽃에서 들리는 초자연적인 소리를 단서로 보물의 정체를 추적하던 엠마와 친구들은 엄청난 비밀에 맞닥뜨리게 된다. 특히 ‘사랑스러운 데이지’의 가사에 숨겨진 단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야드 카페의 마룻바닥에 뚫려 있는 별들과 묘지를 떠돈다는 ‘안내자 귀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순간의 감동은 예상을 뛰어넘는다. 마침내 엠마가 발견한 보물은 손으로 만지거나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엄혹한 시절을 살았던 선량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가치이자 용기였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들꽃과도 같은 여성들의 계보를 탐색하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들꽃 여인들 그리고 엠마의 운명이 처음부터 완벽하게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온갖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 있게 부딪쳐 만든 정직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용기와 두려움은 한 쌍이라 마음속에 둘 중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도 꼭 있다’는 말의 무게를 엠마와 여러 인물이 증명해 낸다. 자신은 운명의 꿈을 이루지 못한 유일한 존재라고 냉소하던 엠마의 할머니가 뒤늦게 기록한 운명 일기도 심금을 울린다. 엠마의 마음속 ‘텅 빈 자리’가 차곡차곡 채워지는 과정에 동참하다 보면 아마 별 가루가 담긴 ‘본야드 초코’ 한 잔이 간절해질 것이다.
2. 『닭다리가 달린 집』(소피 앤더슨, B612북스, 2018)
앞선 작품의 주인공 엠마가 묘지 옆에 산다면, 마링카는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위해 찾아오는 ‘닭다리가 달린 집’에 사는 여자아이다. 게다가 해골과 뼈와 나무와 닭다리로 이루어진 집은 생명을 갖고 있어 틈만 나면 어디론가 이사를 해 버린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저승문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고 없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마링카는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고 친구도 하나 없이(까마귀 잭이 있긴 하지만)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바바 할머니는 마링카의 유일한 가족으로, ‘야가’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고지식한 인물이다. 작가 소피 앤더슨은 충실한 자료 조사를 거쳐 러시아 민담에서 ‘마녀’ 혹은 ‘조력자’로 묘사되는 바바 야가*를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인물로 재창조해냈다.
바바 할머니는 마링카도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들을 맞이해 정성껏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준 뒤 저승길로 배웅하는 수호자 ‘야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도시의 불빛을 동경하고 살아 있는 친구를 만나고 싶은 마링카에게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진 일들도 있어. 그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야”(36쪽)라는 바바 할머니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릴 리 없다. 누가 정했는지 모를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아이였다면 마링카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마링카는 자신의 운명을 부정하고 바바 할머니의 당부를 줄기차게 어긴다. 뼈 울타리를 벗어나 마음대로 바깥을 활보하고, 저승문으로 들여보내야 할 유령 친구를 자기 방에 몰래 숨긴다. 그저 사소하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만 보이던 마링카의 일탈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 가슴 아픈 이별로 이어진다.
마링카라는 인물도 사랑스럽지만, 읽는 내내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하는 묘사들이 차고 넘치는 것도 재미를 더한다. 닭다리 달린 집의 잦은 이사로 만나게 되는 세계 여행에 버금가는 다양한 풍광들, 박수치고 발 구르고 춤추며 긴 여행을 준비하는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파티, ‘마링카의 용어 사전’으로 따로 정리해야 할 만큼 자주 등장하는 이국적인 음식들이 그렇다. 전체 야가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닭다리가 달린 집들이 달리기 경주를 벌이는 장면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저승문 너머 펼쳐진 시꺼먼 바다와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산, ‘별로 돌아가는 길 부디 평화롭기를. 위대한 순환 고리는 완전합니다.’로 마무리되는 ‘저승길 고별사’에 담긴 슬라브족의 사후관을 바리데기나 강림도령이 등장하는 우리 신화와 비교하며 읽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마링카는 스스로에 관한 중대한 비밀들을 새롭게 알게 된다. 자신이 왜 갓난아기 때부터 바바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마링카의 목숨과 관련된 깜짝 놀랄 만한 사연이 있었다), 바바 할머니는 왜 한사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는지(마링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닭다리 달린 집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는지(집의 애정과 의지가 아니었다면 마링카는……) 깨닫게 된 것이다.
슬픈 이별까지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마링카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자신의 의지로 저승길의 수호자 ‘야가’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기특하게도 새로운 수호자 마링카는 바바 할머니와 달리 인간 세계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공존하는 방법도 터득해 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링카와 연대하는 닭다리 달린 집과 까마귀 잭의 우정이, 마링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인간 친구 벤자민의 마음이,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가는 마링카의 건강함이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바바 야가(Baba Yaga): 러시아의 숲속에 사는 요괴로, 말라서 뼈와 가죽만 남은 노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마녀 같은 존재로, 숲속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이퐁 │ 『어린이와 문학』에서 동화를 추천받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의 새로운 이야기를 읽고 싶고 쓰고 싶다. 최근에는 『해가 되고 달이 되고』와 『홍어장수 문순득 표류기』, 『열두 살의 데이터』(공저), 『슬이는 돌아올 거래』(공저)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