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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묵상글 들 ( 성녀 클라라 축일-감수, 감당, 감내하는 삶.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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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녀 클라라 축일-감수, 감당, 감내하는 삶
요즘의 저는 옛날과 비교하면 그리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하지 않은 이유가 가난하게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칸이 되고 처음에는 프란치스코의 가난을 무척
따라 살고 싶었고, 그래서 흉내를 많이 내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살았고, 지금도 사는 가난이 정말 즐겁고 기꺼운
가난이기보다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늘 군더더기처럼 있는,
그런 가난이어서 오늘 축일을 지내는 클라라 성녀가 무척 부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부러운 것이 꼭 클라라 성녀뿐이 아니고,
부끄럽게 하는 것도 클라라 성녀뿐이 아닙니다.
얼마 전 특별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영상을 봤는데
이름하여 Minimal Life를 사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 Minimal Life를 우리말로 바꾸자면 최소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1)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는 것, 당연히 2) 과도한
소비를 줄이는 것, 그리하여 3) 시간과 공간을 단순화하고 낭비치 않는 것,
4)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가지고 사는 것, 이로써 5) 환경을 보호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이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 등입니다.
이것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가난한 삶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아무튼, 그들은 제가 서약으로 살고 의무로 살려는 것을 서약 없이도
자유롭게 그리고 기꺼이 살고 그런 사람들끼리 동호회 모임도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처음 가르치셨고,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그렇게 열렬히 살고자 한
가난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여유롭게 하며,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문제는 이 자유와 여유와 행복을 실제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느끼며 가난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저는 종종 그러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의 서약과 우리의 선택이 박물관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서약이 갱신되지 않고
우리의 서약이 매일 새롭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여전히 살면서도 서약과 선택은 박물관에 가 있기에
가난이 주는 자유와 여유와 행복도 갱신하지 못하는 것인데 저는
이것들을 박물관에 보내고는 제일 먼저 '나'를 다시 소유하였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나 클라라가 살았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야 할 가난은
물질이 없는 가난에 앞서 내가 없는 가난이고,
물질이 없는 가난에 앞서 욕심이 없는 가난이며,
욕심이 없는 가난에 앞서 사랑이 있는 가난입니다.
그런데 그 버린 나를 다시 주워 가짐으로써
물질에는 가난하면서도 사랑이 없고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가난의 자유와 가난의 여유와 가난의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유언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께서는 우리가 육신적으로 연약하고 미약하지만
그 어떤 궁핍도, 가난도, 수고도, 시련이나 수치도, 세상의 멸시도
마다하지 않고, 우리가 이를 더없는 큰 기쁨으로 여기는 것을
보시고,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도 클라라처럼 프란치스코가 보고 크게 기뻐하는 삶,
가난과 고통과 멸시를 감수, 감당, 감내하는 삶을 살기로
오늘 다시 마음 먹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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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성녀 글라라 동정 기념일/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염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우분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왜 염색 하지 않으세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염색 하지 않아도 미남이라서요.’ 현문우답(賢問愚答)이었습니다. 웃으면서 한 이야기입니다. 염색하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변화(變化)’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변화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적인 변화입니다. 염색을 하는 것도 변화입니다. 체중을 줄이는 것도 변화입니다. 점을 빼거나, 성형 수술을 하는 것도 변화입니다. 여성들의 화장도 변화의 한 모습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마이클 잭슨도 외적인 변화를 많이 추구했습니다.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변화를 맞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타볼 산에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외적인 변화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다른 하나는 내적인 변화입니다. 내적인 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잘 알기 어렵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이기 때문에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적인 변화는 익숙했던 세상과의 단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내적인 변화는 목숨을 바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체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락방을 열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처럼 표징을 보여주었고,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길 위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학과 교리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내적인 변화는 오랜 침묵과 수양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사막이나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서 수행하는 은수자들이 있었습니다. 은수자들은 단식, 극기, 묵상,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 하였습니다. 이런 은수자들을 통하여 수도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전통이 교회의 영성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글라라 성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글라라’라는 말은 ‘빛’이라는 뜻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힐 수 있듯이, 글라라 성녀는 기도와 관상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글라라 성녀는 그녀의 기도와 관상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게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꽃을, 위로의 불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는 좌, 우의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날 수 있듯이, 자동차는 4바퀴가 균형을 이루어야 잘 달릴 수 있듯이 신앙인은 활동과 기도가 균형을 이루어야 잘 살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면, 글라라 성녀는 그 활동이 잘 될 수 있도록 기도와 관상을 하였습니다. 마치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듯이 프란치스코와 글라라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였습니다. 우리들 역시 활동과 기도라는 날개를 달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린이처럼 겸손한 사람,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 돌보는 사람,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사람, 가족과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내적인 변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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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연중 19주간 화요일. 클라라 동정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 하여라”(마태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 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세속의 기준과 하늘나라의 기준은 분명히 다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18,17). 부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하느님은 우리 입술이 아니라 가슴에 귀 기울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느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잊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 눈높이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봐주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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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한상우 신부님.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오염된 세상을
정화하는
성녀 클라라의
삶이 있습니다.
성녀 클라라의
삶은 단순하기에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가난을 밟고
걸어갑니다.
자신을
낮추는 삶이
충만한
가난의 삶입니다.
많은 길을 걸어
당도하는 삶또한
가난의 삶입니다.
하늘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은
이와같이
자신을 낮추는
낮아짐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낮아짐이
회심의 삶입니다.
회심의 삶은
내적 가난을
추구합니다.
낮아지는 것이
진정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낮출 때만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셨습니다.
낮아지는 성숙이
참된 성숙입니다.
낮아지는 삶이
하느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삶입니다.
낮아지면 기꺼이
주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성녀 클라라를
통해 가난하신
예수님을
보게됩니다.
깨어있는 삶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가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적
가난을 통해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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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동전으로 성전 세를 내는 것을 보고, 그것도 동등한 세금을 냈다는 이유로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높아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하고 물었다. 베드로가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고, 자기들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렇게 물은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이 말씀은 바로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는 원한을 품을 줄도 화를 낼 줄도 모른다. 악을 악으로 갚을 줄 모르며, 지저분한 생각을 할 줄도, 간음도 방화도 살인도 모른다. 어린이는 도둑질도 말다툼도 모르며, 죄로 이끄는 그 무엇도 모르며, 남을 비방할 줄도, 하느님을 모독할 줄도, 상처를 줄줄도, 거짓말을 할 줄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타고난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고 하셨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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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태오는 복음서 전체의 구성을 천을 짜듯 치밀하게 다듬으면서, 독자들에게 올바른 그리스도의 모습을 일관성 있게 보여 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을 주제별로 모아 다섯 개의 담화문으로 정리합니다. 복음적 담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 설교(5―7장), 제자들에 대한 파견 설교(10장), 하늘 나라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모아 놓은 설교(13장),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하여 하신 말씀만 모아 놓은 교회 설교(18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담화문인 심판 설교(23―25장)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설교 가운데 두 부분을 전해 줍니다.
곧 ‘겸손하여라.’로 시작하여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로 이어진 내용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부르시어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잘난 신자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도 이르십니다.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에 ‘되찾은 양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아무리 못난 신자라도 구원을 받도록 공동체 모두가 돌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1210년,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클라라 성녀는 2년 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밤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속의 수도복’을 받아 입고 순명을 서약한 뒤, 복음적 가난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은 절대적 가난 속에서 인간 존재의 가난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삶으로 밝혀 준 성녀야말로,
오늘 복음이 말하는 잘난 체하는 마음으로 작은 이들을 쉽게 업신여기는 우리에게 겸손의 참본보기가 됩니다.
클라라 성녀는 말합니다.
“그대는 다른 이들이 바라보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 가고 있는가?”
답은 오늘 복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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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작음의 신비로 초대합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이 질문은 당시 제자들의 관심사를 반영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의 산상수훈에서 하늘 나라가 누구의 것이며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힘 주어 말씀하셨지만, 이미 그들 마음 깊숙히 심겨진 욕망의 뿌리가 그 가르침을 휘감아 덮어버린 것 같습니다.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마태 18,3)
예수님께서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큰 사람으로 대접받으려는 욕망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는 제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즉 길을 되돌려 인간됨의 진정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큰 사람이 되기는커녕 하늘 나라에도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5)
예수님께서 그들의 질문에 명확히 답하십니다. 물론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한 답은 아니었을 겁니다. 입만 열면 제 자랑에 골몰하는 세속 삶에서 겸손의 덕은 무시당하고 손해보기 일쑤니까요.
사실 자기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자기 비하에 빠져 허우적댈 뿐, 진정으로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겸손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건강한 자존감에서 나오니까요. 겸손을 선택할 줄 아는 이는 외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척"하는 겉꾸밈이나 위선, 허세를 부리지도 않지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그래서 상대의 깊이를 통찰하기 전에 자기에게 이익이 될지 말지를 스캔하듯 정보화하는 세상은 작은 이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미소하고 가난하고 미약하고 침묵하는 작은 이들은 쉽게 업신여김 당하고 무시와 조롱에 노출되지만 자기 방어조차 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호를 세상 권력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아버지께 의탁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도록 애쓰라고 당부하십니다. 쉽게 간과되고 소외되고 무관심으로 지나치기 쉬운 그들이 사실 하늘에서 더 기뻐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 실리와 권모술수에 밝은 귀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이지요.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받는 장면이 생생히 그려집니다.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에제 2,8)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2,8)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에제 3,1)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에제 3,3)
"내 말을 전하여라."(에제 3,4)
예언자는 이런 존재여야 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하라시는 대로 하고 이끄시는 대로 따릅니다. 그래야 예언자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것임이 드러나지요.
복음 속 "작은 이"란 예언자처럼 모든 것을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따르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의 수동성은 무기력이나 회피가 아니라 의탁의 열매입니다. 그는 자의적 욕망보다 하느님의 뜻에 충실합니다. 자기 욕망과 하느님 뜻이 긴장을 일으키지 않는 이유는 이미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입니다.
세상 눈으로는 순박하다 못해 바보 같고 함부로 농락해도 되는, 쉬운 사람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의 도움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는 것은 하늘의 천사들이나 하느님 아버지께 맞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어떤 보호 장구나 인맥을 갖추지 못한 그의 힘센 후견인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녀 클라라 축일에 작음 안에 감춰진 하느님의 힘을 볼 수 있기를 청합니다. 자신의 작고 어리석음을 슬퍼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웃의 작음을 업신여기지 않는 지혜를 청합니다. 작음은 우리를 하느님과 더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는 축복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성녀 클라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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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0)
오늘 복음은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작은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가난과 겸손을 몸으로 사셨던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영적 동반자이자 영적 친구이며,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불리는 '성녀 글라라 동정녀'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백합'이라는 뜻을 지닌 '성녀 수산나 동정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두 성녀를 우리에게 영적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영명축일을 맞이한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번에 내린 집중 호우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많은 분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피해가 크고, 농부들의 피해가 큽니다.
자식처럼 애써 키워 온 것들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휴가를 맞아 홀로 계신 어머니의 바쁜 일손을 도와드리려 친정어머니를 찾았다가 어머니와 딸과 사위가 함께 희생된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우리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사연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작은 자들'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작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자들을 업신 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두를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희생된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하느님께 청하고, 깊은 낙담에 빠져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글라라'는 '빛'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가 살았던 가난과 겸손을 살면서, 작은 자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희망의 빛'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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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3,4
마태오 18,1-5.10.12-14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 일제강점기가 씻을 수 없는 수모요 아픔의 역사였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바빌로니아로부터의 침략과 멸망, 그리고 유배는 엄청난 수치요 슬픔의 역사였습니다.
휘황찬란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잘 나가던 다윗 왕조는 하루 아침에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볼모로, 포로로, 노예로 물설고 낳선 땅으로 끌려갔습니다.
1,500Km가 넘는 먼 타국 땅으로 끌려가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바빌로니아 유배는 50년간 이어집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파괴와 멸망, 그리고 유배라는 혹독한 고초를 겪던 순간
유배지에서 소명을 받고 활동했던 사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기원전 597년 1차 바빌론 유배 때 포로로 끌려갔으며, 유배지에 정착한지 5년이 지난 기원전 593년 바빌로니아 크바르 강가에서
예언자로 불림받습니다.
에제키엘은 환시 중에 천상 어좌에 좌정하신 주님의 눈부신 영광을 목격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보이셨는데, 거기에는 주님의 비탄과 탄식과 한숨으로 가득한 말씀이 가득 적혀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 두루마리를 에제키엘의 입에 넣어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에제키엘 3장 1~3절)
주님 말씀 따라 두루마리를 낼름 받아먹고 난 에제키엘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이스라엘은 집단적 타락과 우상숭배와 거듭된 배신과 불충실의 결과 철저하게도 패망 당했으며, 유배까지 떠나는 등, 범국가적으로 역사상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에제키엘은 그런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동족들에게 회개와 새생활을 외쳐야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에제키엘의 삶은 참으로 혹독하고 기구했습니다.
그는 부르심을 받자마자 언어장애인이 되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됩니다.
그의 언어 장애는 부르심을 받은 이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6~7년간 지속됩니다.
예언자로서 선포하지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니 이보다 더 큰 고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침묵 속에 다양한 상징 행위들을 통해
예언을 이어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주님께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씀을 에제키엘에게 건네십니다.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네 눈의 즐거움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너에게서 앗아가겠다.
너는 슬퍼하지도 울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마라.
조용히 탄식하며. 죽은 이를 두고 곡을 하지 마라.
머리에 쓰개를 쓰고 발에 신을 신어라.
콧수염을 가리지 말고 사람들이 가져온 빵을 먹지 마라.”(에제키엘 24장 16~17절)
이틑날 아침 정말이지 기가 막힌 일이 발생합니다,
에제키엘이 주님께서 건네주신 예언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날 저녁에 에제키엘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참으로 끔찍했던 에제키엘이었습니다.
때로 아무리 외쳐도 귀를 막아버리는 동족들이었습니다.
마치도 밑빠진 독의 물붓기 같았던 예언자로의 삶이었습니다.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던 에제키엘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때 마다 에제키엘은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첫 순간의 달콤한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주님께서 입에 넣어주셨던 꿀처럼 달콤했던 두루마리의 맛을 떠올렸습니다.
늘어진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또 다시 기약없는 예언자로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참혹한 상황 앞에서도 에제키엘이 건네는 메시지의 결론은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패망을 거듭 외쳤지만,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돌아서기만 한다면, 새로움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새 하늘, 새 땅, 새 마음, 새 기운, 새 생명, 새 계약, 새로운 미래를 선물로 주실 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고통과 쓰라린 절망 가운데서도 에제키엘은 새로움을 외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물질적 의미의 새로움을 넘어 존재론적인 의미의 새로움입니다.
그 새로움은 새로운 마음, 새로운 정신, 새로운 기운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존재로서의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완고하고 무딘 돌 심장이 아니라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살 심장이 뛰며 움직일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 안에는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 피가 순환되는 따뜻한 마음, 연민과 자비로 가득한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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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에제키엘 2,8─3,4
마태오 18,1-5.10.12-14
어른이 미각을 끊으면 어린이처럼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자신을 낮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은, ‘겸손’하여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낮추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고 하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교만해지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좋아하지만, 겸손하면 모든 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응웬 차우 로안’은 ‘골형성부전증’이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베트남 여성입니다.
이 병은 특별한 원인 없이도 뼈가 쉽게 부러지는 선천성 유전 질환입니다.
뼈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키가 매우 작고 허리가 굽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조롱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응웬 반 부옹’이란 청년이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겉모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누구보다 착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옹은 로안과 결혼을 하고 함께 평생을 기약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로안은 부옹에게 평생 짐이 될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4년 4월 4일, 로안은 지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초대받아 휠체어를 이끌고 결혼식장으로 향했습니다.
결혼식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었습니다.
이때 로안의 앞에 예쁘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등장했고, 소녀들은 로안을 결혼식장 한가운데로 이끌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로안을 환영했습니다.
로안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신랑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바로 자신의 남자친구 부옹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옹이 로안을 위한 깜짝 결혼식이었습니다.
상처가 많아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로안을 위해 부옹이 준비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실을 안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결혼식 7개월 만에 부옹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로안도 병세가 악화하여 이듬해인 1915년에 남편을 따라 하늘나라로 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쪽 얼굴에 붉은 모반을 가지고 태어났고 다른 쪽 얼굴은 암이 들어 뼈까지 깎아내는 수술을 해야 했던 김희아씨를 사랑해 결혼한 남편이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의 세상에서 이런 분들이 진정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여겨집니다.
받아들임이 곧 겸손입니다.
왜 어린이와 같은 이들은 세속적으로는 전혀 매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린이들은 세속적인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예전에 청년이었다가 결혼하여 아기들을 데리고 나오는 신자들을 만납니다.
아기들은 식당 밥을 먹지 못합니다.
엄마가 미리 이유식을 준비해 오는데 저는 거저 줘도 안 먹을 전혀 간이 되지 않은 보기만 해도 맛이 없어 보이는 음식입니다.
그러면서 어른이란 세상의 맛에 길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에 길들었다면 그 사람은 어른이고 그러면 예쁘지 않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눈은 잃습니다.
자신은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하는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은 사람을 받아들일 그릇을 좁힙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어린이처럼 될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바로 세상의 맛을 끊으면 됩니다.
요즘 좀비 영화가 한창입니다. 좀비는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사람을 먹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사람을 음식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비는 인간이 아닙니다.
어린이의 마음을 잃은 사람들은 좀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맛볼 무언가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실 선물을 바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결혼을 하니 그 찾는 맛을 더는 발견할 수 없게 되면 곧 이혼을 생각하게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그 허기를 채우려 합니다.
그렇게 누구와도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사춘기가 시작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부모님과 세상이 빨리 아이들을 성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통해서 만들까요?
바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세상의 맛을 빨리도 맛보게 만듭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말투와 표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유튜브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말투를 따라 합니다.
유아용 방송이라고 해서 세상의 맛이 없을까요?
교묘하게 숨겨진 유혹이 더 많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방송과 게임 등을 통해 세속-육신-마귀의 맛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깊이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빼앗는 엄마까지도 미워하게 됩니다.
엄마도 이제 스마트폰이라는 맛을 주는 도구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7살 이전에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쥐여준다는 것은 아기들을 빨리 어른으로 만들어 자신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렸을 때 맛 들인 것들을 끊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10분에 맛 들인 맛을 끊는 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간이 나면 아직도 영화를 보는 게 낫지 따분한 활자들의 조합인 책을 읽으려 하지 못합니다.
억지로 노력하는데도 아직 잘 안 됩니다.
‘어렸을 때 TV를 보지 않고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겸손함이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 크기는 세상의 맛을 알수록 줄어듭니다.
겸손은 세상의 맛을 끊는 것과 하나입니다.
그 맛 때문에 사람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의 맛을 끊어가야 하는 이유이고, 어린이처럼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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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새벽을 열며.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빠다킹신부님.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를 떠올려 봅니다. 땅따먹기, 천당 집기, 말까기(비석 치기), 얼음 땡, 오징어, 오징어(찜뽕), 축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정말로 많은 놀이를 했습니다. 한 친구가 “우리 이 놀이 할까?”라고 말하면, “그래, 재미있겠다.”라면서 그 놀이에 집중해서 놀았습니다. 그 누구도 “그거 재미없어.”라면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놀이에 상관없이 함께 노는 것 자체가 중요했었습니다.
성인이 되면서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뭐 할까?”라고 누가 말하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지요. 그래서 한 명이 어떤 것을 하자고 제안하면, 재미없다며 또 관심이 없다면서 하지 않을 이유를 말합니다.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 교수인 존 크럼볼츠는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된 행동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호기심, 지속성, 낙관성, 유연성, 모험심을 갖고 “재미있겠는데?” 하는 자세로 모든 일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을 성인이 되어서도 간직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어린이를 상징하는 순수함과 호기심 등을 잃어버렸다면 얼른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정적인 마음은 벗어 던져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삶의 방식을 따름으로써, 순수한 어린이들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 없는 어린이처럼 되어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주님 앞에서 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주님보다 더 큰 어른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습니까? 때로는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없다면서 주님께 협박과 공갈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순수함과 호기심을 잃어버리면서 주님 곁에서 멀어지는 사람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는 이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양들을 위해서 길 잃은 양을 포기할 만도 한데, 힘들어하는 길 잃은 양의 아픔을 보시고 오늘도 길 잃은 양을 직접 찾아 나서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과 호기심을 다시금 키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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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모여 아무것이 된다(윤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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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없이 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사업 실패로 힘들어하는 친구입니다. 술 마시다가 문득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더군요. 힘들 때 기억나는 친구라는 사실에 감사했지만, 제가 먼저 나서서 위로해주지 못했음에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제가 먼저 연락하고, 같이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눠야 했는데, 늘 내게 먼저 연락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한참을 통화하다가, “조만간 연락할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괜찮아. 너는 늘 바쁘잖아.”
남들이 보기에도 여유 없이 살았나 봅니다. 여유를 찾아봐야 하겠습니다. 여유가 없으면 내 주변의 아픔을 감싸줄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사랑할 수도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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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성녀 클라라 동정(1194-1253)기념일 / 이수철 신부님.
순수한 동심童心의 회복 - 말씀과 회개 -
오늘은 성녀 클라라 기념일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면 떠오르는 분이 성인의 평생 영적 도반인 성녀 클라라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을 통해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자가 되어 작고 가난한 삶을 살았더 참 아름답고 사랑스런 성녀입니다.
클라라, ‘빛’이란 이름 뜻대로 어둔 세상을 밝히며 별빛으로 살았던 성녀입니다.
특히 성녀 클라라는 병약한 몸으로 만 61세까지 사셨고, 성모 마리아처럼 주님의 가난을 실천하며
40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섬기며 살았습니다.
성녀의 마지막 임종어도, 선종 2년만인 1255년에 클라라를 시성한 교황 알렉산델의 언급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받으옵소서.”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순수한 동심은 누구나 소망하는 바이며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사람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진정한 매력은 순수한 마음에 있습니다.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는 ‘마음의 순수’에 있고 ‘하늘 나라’를 궁극의 목표로 합니다.
어제는 뜻밖에 저녁 휴게 시간에 수도형제와 동요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잠시 선을 보여 불러 주기도 했습니다. 후에 수도형제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입니다.
“요즘 산책시 동요 부르는 행복으로 삽니다. 가사 내용도, 곡도 좋고 쉬우니 불러 보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내 좋아하는 동요는 ‘푸른잔디’ ‘파란마음 하얀마음’ ‘시냇물’ ‘송아지’이고, 옛 가곡 ‘금강에 살으리랐다’와
50년대 민요풍 노래 ‘일터로 가자’이지요. 가사도 곡도 참 좋지요. 예전에도 좋았했는데 지금은 더 좋아지네요.”
정말입니다. ‘일터로 가자’는 후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요즘은 산책 때 마다 동요 부르는 재미로, 행복으로 삽니다. 아무도 없으니 혼자 맘껏 큰 소리로 부릅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기도해서 좋고, 노래해서 좋고, 묵상해서 좋고, 운동해서 좋으니 참 좋은 산책시간입니다.
요즘 장마철에 흐르는 물이 좋아 시냇물을 보며 물오리들 보는 기쁨과 함께 동요를 부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순수한 동심은 누구나 지닌 하느님 주신 선물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동심의 순수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안에는 온유, 겸손, 자비, 지혜가 그대로 함축되었습니다.
그냥 천진무구한 마음만은 아니며 그대로 예수 성심을 닮은 순수한 동심입니다.
다음 아들 사제를 위해 기도를 청하는 어머니의 정성 가득 담긴 예물 봉투 겉면에 쓰여진 기도 글도
감동스러웠습니다. 바로 끝까지 순수한 사제가 되게 해달라는 열망이 담긴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모든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세례자 요한 사제를 더욱 축복하시어 죽기까지 하느님만 사랑하고, 하느님 뜻에 맞는 사제로써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 지식, 겸손, 온유, 사랑과 필요한 모든 은총을 주시어 하느님의 도구로 겸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참 간절한 소망이 담긴 어머니의 순수한 기도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에로 이끌어 더욱 성덕에로 나아갈 아들 사제입니다.
답은 말씀과 회개에 있습니다.
끊임없는 말씀 사랑과 말씀 공부와 실천의 수행은 회개의 사랑으로 이끌어 순수한 동심을 회복하게 합니다.
‘순수한 동심의 회복-말씀과 회개’, 자연스럽게 도출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순수한 동심의 회복에 회개가 결정적임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결코’란 말마디가 엄중합니다. 회개가 하늘 나라의 순수를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가 아니라 회개의 은총으로 어린이처럼 될 때 저절로 자기 낮춤과 자기 비움의 겸손한 작은 자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사람은 오늘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늘 나라를 삽니다.
사랑의 회개가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게 합니다.
이런 이들은 저절로 작은 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임으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됩니다.
바로 작은 이들을 환대함이 주님을 환대함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환대입니다.
회개로 순수해진 사랑의 사람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 여지기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작은 이들 하나라도 업신여김이 바로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대죄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로 순수해진 사람들은 저절로 하느님의 마음이 되어 작은 이들을 아낍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를 돌보는 그들의 수호천사가 늘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도 어머니에겐 우주와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아들이듯 작은 이들 하나하나도 하느님 아버지께는 그러합니다. 하느님이 작은 이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다음 구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 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아, 바로 이것이 예수 성심이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순수해질 때 이런 예수성심의,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갑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끊임없는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원천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의 은총은 저절로 회개를 촉발시킵니다.
제1독서의 에제키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합니다.
바로 화답송 시편들이 이런 말씀의 맛이 얼마나 좋은지 웅변적으로 보여줍니다.
말씀이 회개를 촉발시키며, 말씀의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말씀의 맛은 하느님의 맛이며 비로소 세상맛, 돈맛으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줍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말씀 맛과 더불어 순수한 동심을 회복시켜 주시어
하늘 나라의 행복을 살며 전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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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이영근 신부님.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관심은 ‘큰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르코복음>의 병렬구문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묻는데 여기서는 “하늘나라에서”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제자들의 물음을 영성적인 관심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보다는 ‘누가’ 큰 사람인지에만 관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선임을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가장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서는 이 물음에 세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는 먼저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여기서 ‘어린이’란 열두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를 가리는데, 고대인들은 ‘어린이’가 천진무구하다고 여기지 않고, 손이 많이 가고 책임감도 없으며, 늘 어른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하찮은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회개하여 어린이 같이 된’ 사람이란, 어린이가 어른에게 의지하고 지시에 따르듯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지시에 잘 따르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어른처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주인께 신뢰로 의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를 산상설교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마태 5,3)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자신이 주인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께 의탁하고 사는 사람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둘째>는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인지’를 밝히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
하늘나라에서는 명예나 권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 낮추어 섬기는 이가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님을 예배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가장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마태 5,19)이라고 제시하시는데, 여기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누가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일’, 곧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일, 미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일, 바로 그것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당신 제자들, 곧 미천하고 무력한 이들을 당신 제자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시며,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하십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뜻”이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마태 18,1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작은 것 하나마저도 귀중하게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가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지 않고 사랑하게 하소서!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소서!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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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녀 클라라는 1194년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고 수도생활의 열망으로 클라라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클라라는 청빈과 가난의 삶으로 프란치스코와 함께 수도생활을 정진하였습니다. 1253년 선종하였고,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서 시성되었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은 에제키엘과 길 잃은 한 마리 양까지 찾으시는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에제키엘에서 주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주셨습니다. 그것을 먹자 꿀처럼 달았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작은 이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시간의 각 현장을 되돌아 가서 봅니다. 나와 사람들. 활동, 곧 만남, 대화, 행위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잘못, 부정과 거짓을 보며, 나의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와 함께 묵상합니다.
-. 지난 모든 일과 만남에 감사하며, 그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
그분껫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 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에제 2,8-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잇는 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일을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양을 찾게 되면, ...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마태 18,1-5.10.12-14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주님은 에제키엘의 입에 두루마리를 넣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달았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파견하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말씀은 달지만, 동시에 파견의 소명을 받습니다. 말씀을 받은 이는 모두의 모든 것을 위한 구원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말씀을 받았습니다. 에제키엘과 같이 말씀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작은 이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주위에, 각 분야와 세대들이. 정신적, 육체적, 영적 등 소외되고 가난항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도와줍니다. 관심을 갖고 다가가며 그들을 찾아가고, 세워주는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명입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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