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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氏 선계에 관하여 조금...2012. 12. 23. 14:25 : 別
시조인 辛鏡신경에 관하여,
姓名성명 / 辛鏡신경
本貫본관 / 靈山영산
號호 / 巖谷암곡
영산人 시조始祖 1세손
中國중국 宋송나라 太觀태관 元年원년 高麗고려 睿宗예종 2년 1107년 丁亥生정해생
吾等오등의 始祖시조이신 公공은 本是본시 中國중국 땅 롱산인隴山人으로 夏하나라 2대 啓王계왕의 支子지자로써 莘신이며, 그후 子孫자손이 草초를 떼어 버려 辛氏신씨로 된 것이다. 하였으니 中國중국의 王孫왕손이며, 高麗고려 중엽 中國중국의 北宋북송때 當代당대 8성(張, 洪, 河, 郭, 慶, 李, 辛, 池)이 義兄弟의형제를 맺고, 이름을 모두 거울 鏡경자로 같이하여 우리나라에 건너 왔다는 이른바 8學士학사, 鏡公8경공의 한사람으로 전한다.
宋송나라 高宗고종 8년 庚戌경술(1130)에 侍郞시랑(황제 호위관)으로써 高麗國고려국에 入國입국하였고, 그 후 8경공 中중에 李, 張, 河, 洪 4경공은 임무를 마치고 中國중국으로 歸國귀국하시고, 慶, 池, 郭, 辛 4경공은 오늘날 4성씨의 始祖시조가 되신다.
※ 隴山농산_陝西省隴縣섬서성 농현 서북에 있는 산. 앵무새의 서식지로 유명하며, 앵무새를 ‘隴客농객’이라고도 함.
隴山鸚鵡能言語 爲報家人數寄書
농산앵무능언어 위보가인수기서
농산의 앵무새 능히 말을 하나니, 고향집에 부치는 몇 마디 글월 알려줄 수 있으려나.
岑參잠삼 赴北庭度隴思家부북정도농사가
牢鏁玉籠無計出 隴山歸夢漸蹉跎
뇌쇄옥롱무계출 농산귀몽점차타
옥 둥우리에 갇혀 빠져날 길 없으니, 농산에 돌아갈 꿈 점점 아득하구나.
李奎報이규보 鸚鵡앵무
고려 睿宗예종 2년 단기 3440년 丁亥정해(1107) 생이다. 高麗고려 11대 仁宗인종 16년 戊午무오(1138)에 及第급제하여 벼슬에 나서서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의 官職관직에 올랐다. 號호는 巖谷암곡 諡號시호는 貞懿정의 또는 廷議정의, 始祖公시조공이 中國중국에서 건너올 당시 平壤평양 大洞江대동강 상에 共作臺공작대를 八鏡臺팔경대라 하고, 그곳에서 지었다는 詩시가 傳전한다.
有溪無石 溪還野 有石無溪 石不奇 此地有溪 兼有石 天爲造化 我爲時
물이 있고, 돌이 없으면 물은 의미없는 돌과 같고,
돌이 있으되 물이 없으면 그 돌의 모양이 기이하지 않는 법인데,
이곳은 물과 돌이 함께 있어 하늘은 조화를 이루어, 내 詩시를 짓노라.
鄕史향사의 傳來전래에 依의하면, 始祖시조 辛鏡신경 公공은 자신이 살던 中國중국 江西省강서성 大庾縣대유현 東北동북 60里리에 있는 天竺山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至今지금의 경남 창녕군 靈山郡.縣영산면에 있는 鎭山진산인 靈鷲山영축산 아래에 이르러 터를 잡고 이곳이 후손들이 모여 可가히 살만한 땅이라하여 辛氏신씨의 世居之地세거지지가 되었다고 전해 내려 오고 있다. 또한 함께 入哭입곡하신 郭鏡곽경 公공께서는 靈山영산, 昌寧창녕의 이웃고을인 玄風현풍의 包山포산(비슬산) 아래에 터를 잡고 本貫본관을 包山포산이라 定貫정관 하였다고 한다.
경북 영일군 기계면 화봉동의 禾峯齋舍화봉재사는 1940년 庚辰경진에 후손 辛泳升신영승(상장군공파)씨가 發起主動발기주동이 되어 元來원래 興海縣흥해현의 客館객관이던 望辰樓망진루 建物건물을 拂下불하 받아 그해 음력 1월 14일 建物건물을 上樑상량하고 그후 단기4297년 甲辰갑진 서기1964년에 禾峯齋화봉재와 肅然祠숙연사를 建立건립하여, 門문의 이름을 敬乎경호라 稱칭하고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였는데, 後孫후손 辛鎭洙신진수가 碑비를 세우고 神道碑銘신도비명에 驪江여강 李綵源이채원이 撰銘찬명하고, 後孫후손 辛福敎신복교가 記文기문을 幷書병서하였다. 매년 음력 3월 15일에 享祀향사를 지내고, 檀記단기 4298년 乙巳을사 서기1965년에 後孫후손 辛東植신동식(상장군공파)과 靈山居住영산거주 宗人종인등이 發議발의하여, 경남 창녕군 영산면 校洞교동에 詠格祠영격사를 建立건립하였다.
始祖公시조공, 2세 雲敏운민, 3세 永繼영계, 4세 夢森몽삼, 5세 覺繼각계, 5세 周繼주계 先祖선조의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였으며, 단기 4304년 辛亥신해 서기 1971년 詠格祠영격사와 同所동소에 鷲山齋축산재를 건축하였고, 鷲山齋축산재 記文기문에 後孫후손 辛檍신억(초당공파)이 撰찬했는데, 매년 음력 9월 1일에 享祀향사를 지낸다. 始祖公시조공의 墓묘는 開城府개성부 西花潭里서화담리에 있었으나 近代근대에 失傳실전하였다.
※ 파주 문화원,「坡州文化」제3호에 보면 "파주군 탄현면 법흥리에 墓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父부 / 辛懿신의 官관 侍中시중 中國人중국인
子자 / 辛雲敏신운민 2세 官관 左贊相좌찬상, 영산人 2세손
始祖시조 1세 貞懿公정의공 鏡경의 아들이다.
高麗고려 仁宗인종 7년 단기3462년 己酉生기유생(서기 1129년)이다. 高麗고려 毅宗의종 6년 壬申임신(서기1152년)에 及第급제하여 官관이 寶文閣보문각 大提學대제학 修文殿學士수문전학사 左贊相좌찬상에 올랐다.
檀記단기 4303년 庚戌경술(서기 1970년)에 靈山영산 詠格祠영격사에 始祖公시조공과 同一동일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여, 매년 음력 9월1일에 享祀향사를 지낸다.
文獻문헌
1. 辛氏신씨 大同譜대동보 (1권 1p)
2. 창녕군지 제 14장 성씨, 인물 (영산, 영월신씨) 788
3. 姓氏성씨의 故鄕고향 중앙일보사 發行발행
4. 穎左文集 영좌문집 1902 (광무6) - 1976
辛檍신억 字자 : 子美자미 本본 : 靈山영산 父부 : 海鎭해진 居거 : 永川영천 *초당공파
鷲山齋축산재 記기
始祖시조 巖谷암곡 府君부군 遺事유사 丙申병신 733
5. 靈山영산 辛氏신씨 世獻錄세헌록
辛氏신씨 得姓錄득성록 1
文科榜문과방 55
仕宦사환 56
6. 파주문화원「坡州文化파주문화」제3호
고려중기 문신 辛鏡신경 靈山人영산인
7. 靈山영산 寧越영월 辛氏신씨 世德錄세덕록 1권 347p
靈山 寧越辛氏영산 영월신씨_자료출처 : 신씨 대종회 푸른 저널
辛鏡신경
始祖시조, 高麗叡宗丁亥年고려예종정해년 서기1107년생, 仁宗인종 戊午年무오년 서기1138년 급제,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朗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 諡號貞懿公시호정의공, 묘 개성부 서화담리
신씨의 처음 世居定着地세거정착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昌寧郡창녕군 靈山面영산면이다.
그 由來유래는 始祖公시조공께서 살았던 中國중국 西省강서성 大庾縣대유현에 있는 天竺山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영산면 뒷산 靈鷲山영축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辛氏신씨의 始源시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靈山 寧越辛氏 영산 영월 신씨_자료 출처 : 전통족보문화사
영산은 경상남도 창녕군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서화현인데 경덕왕이 상약으로 고쳐서 밀성군(밀양)의 영현으로삼았고, 고려 때 영산으로 개칭하여 감무를 두었다가 조선 초에 縣監현감을 설치했다.
1895년(고종 32)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3년에 군을 폐하여 길곡면 사촌리는 함안군에 병합하고 나머지 지역은 창녕군에 병합하여 영산면이 되었다.
신씨의 선계는 중국 농서성 출신인 신시랑이 당나라 현종 파락사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 중엽에 중국 8학사의 한 사람인 辛鏡신경이 동래하여 1138년(인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金紫光錄大夫금자광록대부로 門下侍郞平章事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에 있는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창녕 영취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신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 鏡경이 처음 정착한 영산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判密直司事판밀직사사를 지낸 천(추밀원사 지화의 맏아들)을 파조로 하는 덕재공파와 左贊成좌찬성을 지내고 靈山府院君영산부원군에 봉해진 革혁을 파조로 하는 초당공파, 中正大夫중정대부 成烈성렬(공근의 아들)을 파조로 하는 중정공파로 갈라졌고, 지화의 세째 아들로 寧越府院君영월부원군에 봉해진 蘊온을 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吏部判書이부판서를 지낸 한을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후손들은 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晦憲회헌 安珦안향의 문인으로 스승과 함께 우리나라의 성리학을 개척한 덕재공파 천의 아들 인거가 백이정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문장과 학행으로 명망이 높았으며,충숙왕 때 正順大夫정순대부로 判通禮門事판통례문사와 慶州判官경주판관을 거쳐 충묵왕조에 政堂文學정당문학을 역임했다.
천의 8세손으로 습독을 지낸 질의 아들 景行경행은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正言정언과 兵曹佐郞병조좌랑을 거쳐 韓山郡守한산군수로 나갔다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淸難三等功臣청난삼등공신으로 靈城君영성군에 봉해졌다.
草堂公초당공 革혁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裔예가 총혜왕 때 左正言좌정언과 知申事지신사 僉議評理첨의평리 등을 지내고 총목왕 때 鷲城府院君취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의 아우 富부는 홍건적의 난 때 함종 전투에 출정하여 將軍장군 李堅이견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한편 조선 태조 때 開國原從功臣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된 有定유정은 태종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경원에 침입한 야인 우디거의 정벌에 左軍都摠制좌군도총제로 副元帥부원수가 되어 都元帥도원수 趙涓조연과 함께 출정했다. 특히 그는 성품이 곧고 급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남의 일이라도 꾸짖거나 손을 대지 않고 못배기는 무인 기질이 있어 남에게 미움도 많이 샀다.
그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왜적은 그를 꿇어앉히고 칼로 위협하며 기밀을 탐지하려했으나 그가 완강하게 굴하지 않자 화가 치민 왜적은 차마 목을 베지는 못하고 다리 사이의 신낭을 베었다고 한다. 유정의 아들 引孫인손은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문신으로 여러 대군들과 서사를 강론했고, 都承旨도승지와 判漢城府使판한성부사 刑曹判書형조판서 등을 지낸 후 藝文館大提學예문관대제학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의 아들 碩祖석조는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集賢殿學士집현전학사에 등용되어 著作郞저작랑 直提學직제학 우右사간 등을 지내고 세조 때 공조와 이조의 參判참판을 거쳐 대사헌과 開城府留守개성부유수를 역임했으며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에 능하여「세종실록」과「의방유위」,「경국대전」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던 永禧영희(현감 수담의 아들)는 과거에는 급제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南孝溫남효온, 洪裕孫홍유손 등과 함께 <죽림우사> 라 결의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행의를 닦아 크게 문명을 떨쳤고, 인손의 6세손 宗遠종원(군수 진의 아들)은 선조 때 禁府都事금부도사와 連川縣監연천현감을 거쳐 호조 좌랑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寧城府院君영성부원군 蘊온의 후손에서는 光靖大夫광정대부로 문하시중에 오른 仲碩중석과 洪州牧使홍주목사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翊贊功臣익찬공신에 책록된 廉염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온의 6세손으로 寧原君영원군에 추봉된 叔据숙거의 아들 允文윤문과 允武윤무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중종반정 때 무신인 朴元宗박원종과 더불어 반정행동대로 공을 세워, 형인 윤문은 靖國功臣정국공신으로 寧越君영월군 봉해지고 아우 윤무는 정국공신으로 병조 판서와 좌찬성을 거쳐 寧川君영천군에 봉해졌으나 무신반정을 음모하고 있는 천인 정막개의 무고로 억울하게 대역죄를 뒤집어 쓰고 죽음을 당했다.
문하시중 仲碩중석의 9세손 應時응시(부사 보상의 아들)는 열 여섯 살에 대과에 응시하여 그 성적이 뛰어났으나, 좌의정 安玹안현은 어릴 때 재력으로 등과함으로써 불행해진 많은 전례를 미루어 그를 위해 낙방시켰다고 하며, 명종 초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설서와 정언을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옮겨올때부터 이랬음)한 후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선조 때 經筵官경연관이 되었다.
그 뒤 모친상을 당했을 때「주자대전」중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발췌하여「주문문례」를 편찬했으며, 全羅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와 대사간을 거쳐 弘文館副提學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응시의 아들 慶晉경진은 栗谷율곡 李珥이이의 문인으로 선조 때 등과하여 병조 좌랑으로 陳奏使진주사 韓應寅한응인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體察使체찰사 柳成龍류성룡의 휘하에서 從事官종사관으로 전공을 세우고 江陵府使강릉부사와 사간을 거쳐 이조 참의, 성주와 충주의 목사를 역임하여, 戮?손자로 많은 저서를 집필했던 돈독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판서 한의 후손에서는 그의 손자 비(군재의 아들)가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태자시윤을 지내고 奈城君내성군에 봉해졌으며, 증손 거는 충혜왕 때 등과하여 光靖大夫광정대부로 知門下贊成使지문하찬성사에 이르렀고, 한의 7세손 保安보안은 세종 때 繕工判事선공판사와 光州牧使광주목사를 역임했다.
상장군파에서는 성렬의 손자 斯薦사천이 고려 말에 典工判書전공판서를 지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낙향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조선에서 무과에 급제하여 龍宮縣監용궁현감과 星州牧使성주목사 겸 판관을 지낸 希壽희수의 아들로 재종숙인 원에게 출계한 礎초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창녕의 화왕산성에 주둔한 郭再祐곽재우의 막하로 들어가 전공을 세우고, 玄風縣監현풍현감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방비를 굳게 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 밖의 인물로는 성종 때 知中樞府使지중추부사에 오른 均균(증호조 판서 중선의 아들)과 명종 때 光州牧使광주목사를 지낸 崙윤(참의 필주의 아들)이 유명했으며, 응성의 아들 景衍경연은 平安都事평안도사를 역임하여, 광해군 때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校理교리와 사간을 지낸 光業광업, 인조 때 禮曹正郎예조정랑을 거쳐 坡州牧使파주목사를 역임한 應望응망, 판관 應命응명, 현감 必馨필형 蕃번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산영월 신씨는 남한에 총 25,602 가구, 105,97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경(辛鏡) / 영산, 영월 신(靈山, 寧越 辛)씨
유래
신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나라 사람 신시랑과 엄시랑(영월 엄씨의 시조로 엄임의라고 한다)이 使臣사신으로 신라 35대 景德王경덕왕 때 우리나라에 파락사라는 使臣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婚姻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과 후대를 알 수가 없어서 高麗고려 인종 때 金紫光祿大夫금자광록대부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를 지냈던 辛鏡신경(시호는 정의)을 1세 祖上조상으로 하고 있다. 本貫본관은 靈山영산에서 9세손 4형제중에 3째아들과 4째 아들이 寧越영월로 분관이 되었다.
*영주신씨는 없음, 일부 무식한 사람들의 주장임.
인구 / 영산 56,301명, 영월 49,676명, (1985년)
본관 및 시조의 유래
靈山영산은 慶南경남 昌寧郡창녕군에 위치한 地名지명으로 본래 新羅신라의 서화현인데 경덕왕이 상약으로 고쳤고, 고려 때 靈山영산으로 改稱개칭하였으며 1913년에 창녕군에 병합하여 靈山面영산면이 되었다.
辛氏신씨의 선계는 中國중국 농서성 출신인 高麗고려 중엽에 中國중국 8학사의 한 사람인 辛鏡신경이 동래하여 벼슬길에 올라 금자광록대부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자신이 살았던 중국 강서성 대유현에 있는 천축산과 산세가 비슷한 지금의 昌寧창녕 영축산 아래에 뿌리를 내린 것이 우리나라 辛氏신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後孫후손들은 시조 鏡경이 처음 정착한 靈山영산을 本貫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잇게 되었으며, 9세손에 와서 판밀직사사를 지낸 천을 派祖파조로 하는 덕재공파와 左贊成좌찬성을 지내고 영산부원군에 봉해진 革혁을 派祖파조로 하는 초당공파, 5세 上將軍상장군 周繼주계를 派祖파조로 하는 상징군공파로 갈라졌고, 8세 至和지화의 세째 아들로 寧越영월 府院君부원군에 봉해진 蘊온을 派祖파조로 하는 부원군파와 이부판서를 지낸 한을 派祖파조로 하는 판서공파의 後孫후손들은 寧越영월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덕재공파 천의 아들 인거가 판통례문사와 慶州判官경주을 거쳐 충묵왕조에서 政堂文學정당문학을 역임했다.
천의 8세손으로 習讀습독을 지낸 질의 아들 景行경행은 兵曹佐郞병조좌랑을 거쳐 한산군수로 나갔다가 이몽학의 난을 平定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청난삼등공신으로 영성군에 봉해졌다.
초당공 革혁의 후손에서는 그의 孫子손자 裔예가 좌정언과 지신사, 첨의평리 등을 지내고 총목왕 때 축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의 아우 富부는 홍건적의 난 때 함종전투에 出征출정하여 장군 이견과 함께 壯烈장렬하게 戰死전사했다.
한편 朝鮮조선 태조 때 개국원종공신에 책록된 有定유정은 성품이 곧고 급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남의 일이라도 꾸짖거나 손을 대지 않고 못배기는 무인기질이 있어 남에게 미움도 많이 샀다. 그가 倭賊왜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적은 그를 꿇어앉히고 칼로 위협하였으나 완강하게 抵抗저항하여 굴하지 않자 倭賊왜적은 차마 목을 베지는 못하고 다리 사이의 신낭을 베었다고 한다.
유정의 아들 引孫인손은 都承旨도승지와 판한성부사, 형조 판서 등을 지낸 후 藝文官예문관 大提學대제학에 이르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의 아들 碩祖석조는 集賢殿집현전 학사에 등용되어 저작랑, 직제학, 우사간 등을 지내고 世祖세조 때 공조와 이조의 참판을 거쳐 대사헌과 開城府개성부 留守유수를 역임했으며 文章문장에 능하여 『세종실록』과 『의방유위』, 『경국대전』 등의 編纂편찬에 참여했다.
영성부원군 蘊온의 후손에서는 광정대부로 門下侍中문하시중에 오른 仲碩중석과 홍주 목사로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익찬공신에 책록된 廉염의 부자가 유명했으며, 영원군 叔据숙거의 아들 允文윤문과 允武윤무 형제가 뛰어났다.
이들 형제는 中宗反正중종반정 때 박원종과 더불어 반정 행동대로 공을 세워, 형인 윤문은 정국공신으로 영월군 봉해지고 아우 윤무는 정국공신으로 兵曹判書병조판서와 左贊成좌찬성을 거쳐 영천군에 봉해졌으나 천인 정막개의 무고로 억울하게 대역죄를 뒤집어쓰고 죽음을 당했다.
상장군공파에서는 成烈성렬의 孫子손자 사천이 高麗고려 말에 전공판서를 지내고 高麗고려의 國運국운이 기울자 곡강으로 落鄕낙향하여 節義절의를 지켰으며, 牧使목사 希壽희수의 아들로 再從叔재종숙인 樑량에게 出系출계한 礎초는 壬辰倭亂임진왜란 때 창녕의 火旺山城화왕산성에 주둔한 곽재우의 幕下막하로 들어가 戰功전공을 세우고, 玄風현풍 縣監현감으로 나가 善政선정을 베풀고 防備방비를 굳게 하여 크게 名聲명성을 떨쳤다. 특히 집성촌이 昌寧郡창녕군 靈山영산, 桂城계성, 道泉도천, 南旨邑남지읍, 釜谷부곡, 吉谷길곡 丈麻장마지역에 일천호(1000호)이상 居住거주하며 全國전국 신씨중 最大최대 居住地거주지이나 一斑일반기록에는 누락되어 있고 나머지 집성촌에는 인구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
1985년 經濟企劃院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靈山영산·寧越영월 辛氏신씨는 南韓남한에 총 25,602 가구, 105,97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경남 창녕군 계성면 계성리 / 경남 창녕군 영산면 교리 / 경남 창녕군 도천면 도천리 / 경남 창녕군 도천면 남지읍
경북 금릉군 아포면 사대동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 / 전북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 /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후포리
경북 월성군 강동면 모서리 / 충북 괴산군 화평읍 남차리 / 충남 금산군 제원면 수당리 / 함남 이원군 차호읍 포항리
靈山 寧越辛氏 영산 영월신씨_자료 출처 : 뿌리를 찾아서
신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당나라 사람 신시랑과 엄시랑(영월 엄씨의 시조로 엄임의라고 한다)이 사신으로 신라 35대 경덕왕때 우리나라에 파락사라는 사신으로 들어와서 그대로 머물러 살면서 엄씨와는 서로 종씨라 부르며 혼인도 하지 않고 의좋게 살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름과 후대를 알수가 없어서 고려 인종때 금자광록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냈던 辛鏡신경(시호는 정의)을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본관은 중간에 영산, 영월로 분관이 되었는데 최근에 발견한 신경의 4세손인 신몽삼의 묘비에 "태사공영주신지묘"라고 되어 있어서 원래는 영주신씨였음을 알게되었다.
靈山辛氏 世系錄 영산신씨 세계록
영산신씨 세계록에
大唐時 奉使來 新羅仍留官 披斯樂而名傳 本 中國 隴山人云
대당시 봉사래 신라잉류관 피사락이명전 본 중국 농산인운
이란 기록에 의하면 辛鏡신경은 중국 농서성에서 고려에 들어와 始祖公시조공이된 것이 古證고증을 통해서도 확실하다. 고려에 오신 시조공은 啓王계왕의 차남 鎭진에서 171세손이고 辛鏡신경께서 고려인종 11년에 중국인 8명 동지(8學士)가 國賓국빈으로 초대받아 고려에 들어와 평양 連廣亭연광정에서 큰 연희를 베풀었는데 그당시 신경 시조께서 유시(遺詩)에
有無石還谷 有石無溪 石不奇 此地有 兼 有溪 石天能造化
유무석환곡 유명무계 석불기 차지유 겸 유계 석천능조화라고 전하고 있고
八人 同志 名同一身死 同一穴
팔인 동지 명동일신사 동일혈
이란 글에서 決義文결의문의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씨의 得性背景득성배경
辛氏신씨 世系錄세계록에 의하면
夏啓之子 五人 分封 于衙爲 五觀其支自 莘者 子孫 去草爲 辛氏
하계지자 오인 분봉 우아위 오관기지자 신자 자손 거초위 신씨
에 辛신씨 성은 4108년전 중국의 夏하나라 제2대 계왕啓王 제로고신왕帝盧高莘王이 아들 4형제를 두어 장남은 伊이요, 차남은 鎭진이요, 3남은 秀수요, 4남은 仲중이라, 장남 伊이는 高고씨로 성하고, 차남 鎭진은 莘신씨로, 3남 秀수는 柴시씨로, 끝에 仲중은 奏주씨로 각각 득성하였다.
계왕이 분봉시 차남 鎭진에게 그 성을 莘氏신씨로 創性창성하였으며, 그 후손이 중국 농서성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寧主영주는 甘肅城감숙성이 속현이며 隴山농산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농서隴西라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일부지방(동남아지역등)에서 莘신을 그대로 쓰고있는 사람도 간혹있다고 한다. 4형제 모두가 중국에서 당시 대성이요 왕자였다.
그후 莘신씨는 후손이 艸초를 제하고 辛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하는 得性境圍득성경위가 전해지고 있다.
始祖公시조공의 우리나라 歸化定着귀화정착
始祖公시조공께서는 高麗고려 제11대왕인 인종16년(서기1138년)에 中國八學士중국팔학사인 辛신, 李이, 張장, 河하, 洪홍, 慶경, 池지, 郭곽씨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이름을 모두 鏡경자로 作名작명하고 結義兄第결의형제를 맺어 우리나라의 科擧과거에 及第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奉職봉직하였다.
현재 始祖시조의 諱휘를 鏡경으로 하는 姓氏성씨는 辛신, 郭곽, 池지씨 임.
신씨는 전국 45번째 성씨가문
우리 성씨인 매울 신辛씨 가문은 52,427가구에 167,62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286개 성씨 가운데 45번째로 많은 숫자이다.지역별로는 서울이 32,023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30,020명, 부산21,137명, 경남이 17,518명, 강원이 11,441명인 것으로 조사됬다. 이 자료는 통계청이 지난 2000년에 실시한 전국 인구 조사통계이며, 통계청은 매 5년마다 전국 인구 조사를 실시하는데 올해 실시되는 2005년 자료는 10월쯤 나올 예정이다.
辛氏신씨 五派5파란?
첫째 上將軍派상장군파
辛周繼신주계
상장군파의 派祖파조는 5세조 문종공, 휘는 각계의 넷째동생이신 諱휘는 주계이시고, 정아상장군의 官職관직을 歷任역임하심으로 상장군파의 파조가 되어 9세조에 와서 중정대부 성렬을 파조로 하는 중정공파(상장군파)로 하여 五오파로 갈라져 있다.
둘째 德齊公派덕재공파
신천
덕재공파의 派祖파조는 9세조 중 큰 아드님이신 諱휘는 천이고 덕재는 號호이시다. 諡號시호는 문헌이고, 예문관대재학을 지내신 명망이 높으신 學者학자이시고, 정당문학 판밀직사사이며,동국공맹 17현의 한 분인 세계적인 학자로서 스승인 안향선생을 문묘에 모시게 한 우리나라 서원의 창시자 이시기도 하다.
셋째 草堂公派초당공파
辛革신혁
초당공파의 派祖파조는 9세중 둘째 아드님이신 諱휘는 혁이시고 초당은 號호이시다. 공은 좌찬성(지금의 부총리와 같은 종1품 벼슬)의 官職관직과 영산부원군의 작위를 받으신 분이다.
넷째 府院君派부원군파
辛蘊신온
부원군의 派祖파조는 9세중 셋째분으로서 諱휘는 온이시고, 영월부원군의 작호를 받았으며 本貫본관도 영월신씨로 하여 부원군파의 派祖파조이다.
다섯째 判書公派판서공파
신한
판서공파의 派祖파조는 9세중 넷째분으로서 諱휘는 한이시고, 이부판서(정2품, 장,차관,도지사)의 官職관직을 지내신 분으로서 셋째 형인 부원군을 따라 本貫본관도 영월신씨로 하였고 판서공파의 派祖파조이다.
其他기타
後孫후손 靈山辛氏영산신씨, 寧越辛氏영월신씨
영취산靈鷲山을 영산고을 사람은 "영축산"이라 부른다. 始租시조 辛鏡신경이 이 산山의 형세가 자신이 살던 中國중국의 天竺山천축산과 흡사하다해 이름 한 것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해진 때문이라 한다.
父부 辛懿신의 官관 侍中시중 中國人중국인
祖父조부 辛井淑신정숙 官관 阿贊아찬 中國人중국인
曾祖증조 辛澄源신징원 官관 大阿贊대아찬 中國人중국인
高祖고조 辛尙伯신상백 官관 尙書상서 中國人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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