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버스를 타기 위해 집 밖을 나섰는데, 세상이 밝아지기 직전에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굵지 않았지만 몸을 적시기에는 충분해 보였기에, 자그마한 우산을 챙겼다. 부여행 고속버스를 탈 때만 하더라도 빗줄기가 제발 그쳤으면 하는 소망을 품은 채, 나를 태운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바삐 달렸으나 하늘은 참으로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목적지 도착 후, 먹구름만 가득한 하늘에 기적과도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물론 그 순간은 매우 짧았으나, 여행의 시작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당일 여행을 시작하고 목적지까지 꽤 거리가 있었지만 버스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기에 걷기로 했다. 수천 년 전, 백제의 마지막 수도를 감싸 앉았던 백마강은 당시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장미가 흐드러 졌던 봄의 절정이었음에도 스산했던 강바람이 꽤나 강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기록을 되뇌며 한참을 걷다 보니 첫 여행지에 도착했다. 단지 여태껏 남아있는 기록과 문화유산들을 통해 가늠할 뿐, 많은 것들이 베일에 쌓여있는 고대왕국 백제. 사비백제의 모습을 구현해 둔 곳으로 들어가 본다.
1. 사비성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이 자리했던 곳이다.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웅진시대를 끝내고 성왕에 의해 그 시작을 알렸으나, 그저 기록과 얼마 되지 않은 유산들로 당시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당하며, 백제의 많은 부분들이 사라지고 파괴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을 적어 둔 것이 바로 정림사지 3층 석탑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곳 백제문화단지에 바로 들어서니 흐린 날씨와 왕성의 그 웅장함이 자아내던 분위기에 빠져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제 사비성이 자리했던 곳은 부소산성 부근이었지만, 남아 있는 것들이 별로 없었기에 사비백제의 모습을 그려보며 문화단지 곳곳을 누벼보기 시작했다. 궁의 형태는 익숙했으나, 처마 끝의 그것들에서 고증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으며 바로 옆에 자리한 연지는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짐작하 수 있는 요소로 자리했다. 오늘날 경주에 남아있는 그 모습들처럼, 공주와 부여에서 당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대목이었다.
한가로이 주변을 걷다가 백제의 왕과 왕비가 착용했던 의복 그리고 당시에 종이 대신 활용됐던 대나무들 까지 나름 이것저것 신경을 쓴 부분들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백제문화단지에서 기억에 남았던 부분은 성왕이 홀로그램에 등장해서 신하들 앞에 사비성 천도를 천명하는 모습이었는데, 꽤 웅장했던 분위기가 매우 괜찮은 몰입감을 선사했다. 엄청난 수작으로 유명해 국보로 지정되며,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따로 전시관까지 배정된 '백제금동대향로'. 그 뛰어난 기법들이 총 집약됐을 사비궁의 진짜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당대의 그 웅장했던 모습들과 함께 무덤양식까지 묘사해 둔 섬세함이 참으로 괜찮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한 눈에 들어온 건축물은 5층 목탑 이었다. 왕성에서도 그 장엄한 모습이 바로 밟힐 만큼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했다. 게다가 위치에 따라 다른 건축물들과 어우러지며 다채로운 매력을 선사했는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도는 목탑 주변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물론 이곳에서도 화각의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었지만, 만족감이 더 컸기에 결과물을 보고 뿌듯한 마음을 표정에서 숨길수가 없었다.
문화단지 깊숙한 곳 까지 백제 그 자체로 꾸며진 곳이었다. 허기진 배를 달랠만한 식당가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토성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것은 온조왕이 백제의 시작을 알렸던 곳으로 위례성을 조성해 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돌담을 높게 쌓은 성이 아닌 야트막한 언덕을 두른 토성과 크기를 달리하던 움막들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앞에 백제 후기의 가옥들도 자리했기에 아이디어가 좋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냥 걷기만 해도 수백년의 그 시간을 뛰어 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거나 구석구석 느끼고 싶은 분들이 아니라면 해설사와 함께 입구에서 운행 중이던 열차를 타고 편하게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나가다 얼핏 들은 내용에 의하면 내용도 꽤나 구체적이라 몰랐던 부분도 접할 수 있었기에 이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으니 말이다. 만보기를 확인해보니 여행의 시작부터 1만보를 우습게 넘겨버린 것을 보고 이유모를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백제에 대한 기록. 당시의 그 급박했던 시대상황이 더욱 궁금해진다.
2. 분위기
백제문화단지 구석구석 자리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잔잔한 음악소리가 돋궈주던 분위기가 상당히 친숙했다. 가장 크게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간을 넘나드는 것 같은 기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당시의 위례성과 사비궁. 더불어 그 사이에 자리한 가옥들의 형태까지 분 단위로 몇십 년이 금방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정자에서 바라보는 문화단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백제의 축약판 그 자체였다.
이곳을 찾았을 때, 코로나가 한창 진행 중이라 모든 프로그램이 잠정 중단된 상태라 돌아보는 것 말고는 따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잠잠했던 비구름이 모여들어 부슬비가 내렸을 때, 전세라도 낸 것처럼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정자에 앉아 주변을 관망했다. 비바람에 흩날리던 금계국은 황금빛 물결 그 자체였고,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소리에 맞춰 지쳐있던 심신을 달래 본다. 만약이라는 단서를 달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말이다.
백제의 모습을 담은 곳은 이곳의 유일하다시피 하기에 백제문화단지에서 꽤나 많은 작품들이 촬영됐었다. 계백을 필두로 황후의 품격까지 이곳에서 촬영이 됐으며, 홈페이지에 나열되지 않은 작품들도 이곳을 거쳐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단 백제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작품들도 이곳을 활용했다 하니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탄생될지도 문득 궁금해졌다. 게다가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지역 야경 명소로도 잘 알려져 그 수려한 모습을 담고자 사진작가 분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날씨도 흐렸기에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느낌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돌아 나왔을 때, 벌써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추적추적 내린 빗줄기도 삽시간에 사라져 정림사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은 각각 부소산성과 정림사지로 이어져 덩그러니 놓여있는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해 경주와는 사뭇 다른 백제의 분위기를 즐겨볼 수 있었다.
당일 여행으로 짧게 다녀온 곳이지만 텅 빈 공간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담아내며 즐길 수 있었던 곳. 불현듯 다시금 그 분위기를 느끼고자 부여행 버스 시간표를 살펴보는 내 모습을 보며 사뭇 그때가 그리웠구나 라는 기분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복원했으면 좋았겠으나, 존재만으로도 너무 좋았던 곳이다. 다음에는 밤의 그 유려한 풍경을 담으러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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