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즙과 칼날 사이에서 피어나는 언어 감각
- 백지의 시
오홍진(문학평론가)
백지의 시는 “달콤한 과즙”과 “세 치의 칼날” 사이에서 물결치고 있다. 「혀」라는 시에 나타나는 과즙과 칼날의 역설은 ‘혀’에 드리워진 시적 문맥과 연동되어 있다. 시인은 혀를 “붉은 빛깔의 연체동물”로 표현한다. 인간은 혀로 맛을 느끼고 소리를 낸다. 맛이 식욕과 이어진다면, 소리는 말과 이어진다. 가장 본능적인 영역부터 무언가를 창조하는 영역까지 감싸 안는 게 혀라고 말하면 어떨까? 시인이 혀에서 과즙과 칼날의 역설을 들여다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향기로운 독주를 닮은 과즙은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고, 날뛰는 말과 같은 칼날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거나 심하면 죽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래서 세 치 혀를 한없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한다. 향기로운 과즙이 흘러넘쳐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한 혀를 가만히 떠올려 보라.
문제는 과즙이 지나쳐 날뛰는 칼날로 변질하는 데 있다. 세 치 혀에 숨은 칼날은 상대의 가슴을 아무렇지 않게 도려낸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세 치 혀는 마음 깊은 자리에 깊고도 깊은 상처를 낸다. 몸에 난 상처야 치료하면 그만이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보이지 않으니 치료하는 게 힘들다. 달콤한 과즙으로 이 상처를 덮으려고 해도, 세 치의 칼날이 뿜어내는 살기(殺氣)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혀를 “이빨 울타리를 만들어 영영 가둬버렸다”. 시인은 “붉은 동굴에 갇힌 영원한 무기수”로 혀를 표현하지만, 혀를 끊어내지 않는 한 혀에 서린 욕망을 우리는 쉬이 제어할 수 없다. 혀는 끊임없이 맛을 보고,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영원한 무기수는 상황에 따라 영원한 자유인으로 탈바꿈한다. 시인이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시(詩) 또한 언어 속에서 언어를 뛰어넘는 모험을 감행하는 양식이니까 말이다.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 붙어 운다
말복 지나고 처서 지나고
한차례 소나기 지나간 오후
목청껏 울면
죽은 엄마가 돌아올 것만 같아서
나도 저렇게 운 적이 있다
언니는 신던 스타킹을 내 입속에 쑤셔 넣었고
그럴수록 나는 더 악다구니를 쓰며 울었다
매미도 알았을까
울음도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는 걸
매미 소리 잦아들면
나도 꺽꺽 울다가 잠이 들었다
언니에게서 엄마 젖 냄새가 났다
자고 나니
방충망에 매달려 울던 매미는 없고
시든 울음만 허물처럼 붙어 말라가는 오후
여름에도 발목이 시리다는 엄마가
절룩절룩
울음을 끌고 가고 있다
- 「여름 울음」 전문
시는 향기로운 과즙의 언어에도, 말처럼 날뛰는 칼날의 언어에도 매이지 않는다. 과즙의 언어로 시를 쓸 수 있고 칼날의 언어로도 시를 쓸 수 있지만, 시 언어는 본래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맥락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일상 언어와 불립 문자의 사이에 시 언어가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이를테면, 「여름 울음」에서 시인은 방충망에 붙어 맹렬하게 우는 매미 한 마리에 주목한다. 매미는 온몸으로 울며 자기를 표현한다. 울지 않으면 아무도 매미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죽은 엄마가 그리워 목청껏 우는 아이라고 이와 다를까? 울지 않으면 아이는 엄마가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없다. 언니가 스타킹으로 입속을 틀어막으면 아이는 더욱더 악다구니를 쓰며 울음을 터뜨린다. 이 울음으로 아이는 자기를 드러낸다. 아이에게는 울음(이라는 감각)이 곧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시어에는 사물의 감각이 스며 있다. 매미 울음과 아이 울음은 언니에게서 나는 “엄마 젖 냄새”로 곧바로 이어진다. 죽은 엄마는 젖 냄새로 남아 울다 지친 아이를 편안하게 해준다. 물론 이 감각을 기억하는 일만으로 아이가 죽은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감각이 살아 있어야 아이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살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시인은 매미 울음이 사라진 상황을 “시든 울음만 허물처럼 붙어 말라가는 오후”로 표현하고 있다. 허물이 말라가는 시간은 울음이 시드는 시간을 그대로 반영한다. 아이는 그 속에서 “여름에도 발목이 시리다는 엄마가/ 절룩절룩/ 울음을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한다. 엄마는 아이의 울음을 끌고 저편으로 가고, 아이는 엄마의 젖 냄새를 맡으며 이편에서 살 기운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감각의 힘이다. 시인은 바로 이 감각을 통해 ‘여름 울음’에 드리워진 시적 맥락에 접근하는 셈이다.
「표정 없는 악몽」에는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의 꿈을 꾸는 시적 화자가 등장한다. 죽은 고양이는 화자의 얼굴을 밤새 할퀸다. 그럴 때마다 죽음 직전의 고양이 기억이 떠오른다. 헤드라이트 불빛과 고양이 눈빛이 부딪히는 그때 고양이(화자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고가도로 위를 쳐다보았다. 사다리를 놓아도 올라갈 수 없는 그곳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졌다”. 쌩쌩 달리는 차 안에서 어떻게 죽어가는 고양이의 표정을 볼 수 있을까? 시인은 “아무도 나의 표정을 읽지 않았다”라는 시구로 이 상황을 표현한다. 헤드라이트 불빛과 맞닥뜨린 순간 고양이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무표정한 사람들과 대비되는 고양이의 표정이 그려질 때마다 화자는 “침묵할 수 없어서/ 변기 물을 자꾸 내”린다. 변기 물을 내려도 죽은 고양이는 어김없이 나타나 화자의 얼굴에 상처를 낸다. 아프다는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다. 화자는 이미 죽은 고양이와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난 상처로 시적 화자는 죽은 고양이의 감각을 느낀다. 죽은 고양이와 이어지는 이 감각이 사라져야 화자는 비로소 잠을 잘 수 있다. “무표정한 고양이 이모티콘”은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에게 전송된다. 무표정한 사람들은 무표정한 고양이를 상상함으로써 한 생명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만들어버린다. 머리맡에 놓인 표정 없는 고양이는 ‘표정 없는 악몽’을 꾸게 할 뿐이다. 감각이 사라진 이 악몽을 시인은 “무표정한 고양이 이모티콘”과 연결한다.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다. 감각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에서 어떻게 표정을 읽을 수 있을까? 표정을 드러내면 죽은 고양이가 찾아와 자꾸만 얼굴을 할퀸다. 꿈이라고 해도 좋고, 현실이라고 해도 좋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무표정한 고양이를 낳는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상처가 나지 않는다. 참으로 기막힌 악몽 탈출법이 아닌가?
「숨바꼭질」에도 표정 없는 얼굴이 나온다. 성주군에서 배회 중인 박영자씨를 찾는 메시지는 꽃무늬 몸빼바지, 검정 운동화, 파마머리, 155cm, 45kg이라는 문자와 기호로 기록되어 있다. 시인은 문자로 배달된 “주문하지 않은 사람”과 “주문 배달되지 않는 잔치국수를” 같은 선상에 올리고 있다. 잔치국수를 찾는 시인의 눈에 “국수 위 고명처럼 맛깔스러운 가요주점 간판들”이 보인다. 시골 읍내에 들어선 가요주점은 주머니 두둑한 동네 영감들을 노린다.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든 인간은 소비하는 기호가 된다. 시인은 “삼거리 전봇대에 젖은 국수처럼” 매달린 확성기의 복화술로 이 풍경을 노래한다. 복화술(腹話術)은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시인은 그러니까 침묵으로 자본화된 시골 마을 풍경을 이야기한다. 꽃무늬 몸빼바지를 입은 76세 박영자씨는 지금 이런 세계를 떠돌고 있다.
“못찾겠다! 꾀꼬리!”라는 시구에 서린 시적 맥락을 가만히 음미해 보자. 곳곳에 사람들이 보이지만, 술래는 숨은 사람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표정 없는 기호들이 이곳저곳을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사람들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상대는 그저 아무 표정도 없는 기호일 따름이다. 이런 기호를 찾은들 무엇 하며, 이런 기호와 소통한들 무엇 하랴? 백지 시인은 무엇보다 똑같은 기호들로 변한 생명의 얼굴에 표정을 불어넣는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표정은 감각과 연동되어 있다고 했다. 아이가 죽은 엄마를 젖 냄새로 기억하듯, 모든 생명은 저마다 특유의 감각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시는 이러한 감각을 언어로 복원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과즙과 칼날의 언어로 실현되는 백지 시 또한 다르지 않다.
「꽃집이 있는 정문」에서 시인은 30년 된 낡은 아파트에 생기를 불어넣는 꽃집을 시 세계로 불러낸다. 여인초는 풍성한 초록 치마를 입었고, 가슴 넓은 몬스테라는 손가락을 좍 펴고 있다. 문 안의 아이비는 앙증맞은 아기손 같은 이파리를 흔들고, 옹기종기 모인 트리안은 밤새 들어온 소식을 바람에 실어 퍼 나른다. 모든 꽃이 저마다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연분홍 볼 터치를 한 베고니아와 빨간 립스틱을 바른 도도한 장미도 그렇고, 목을 길게 뺀 꽃기린과 제 미모에 넋을 잃고 흔들리는 거울 앞 수선화도 그렇다. 시인은 꽃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 표정을 독자 앞에 압축적으로 펼쳐낸다. 꽃들의 표정이 모여 꽃집에 생기를 불어넣고, 꽃집의 생기가 낡은 아파트에 새 힘=표정을 불어넣는 힘으로 작동한다. 사물이 생기를 띠면 언어도 생기를 띤다. 일상 언어와 구분되는 시의 언어는 바로 여기서 생성된다고 보면 좋겠다.
오늘 미국에서 아들 내외가 온다는 103호 노부부가 꽃집에 들렀다 집안 곳곳에 밴 축축한 세월의 냄새를 내보내고 싶었을까 비었던 장바구니에 찬거리 대신 형형색색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꽃집이 있는 정문을 지나 회색 콘크리트벽 녹슨 울타리 속으로 한 평 가웃 꽃밭을 안고 들어가는 노부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 「꽃집이 있는 정문」 부분
꽃집에 생기를 불어넣는 꽃들은 노부부가 사는 “집안 곳곳에 밴 축축한 세월의 냄새” 역시 털어낸다. 노부부는 미국에서 오는 아들 내외를 형형색색 꽃들이 장식된 집에서 맞이하려 한다. 시인은 회색으로 넘쳐나는 아파트 안으로 꽃밭을 안고 들어가는 노부부 얼굴에서 “환한 미소”를 발견한다. 노부부의 환한 미소는 가요주점의 불빛과는 사뭇 다르다. 가요주점의 불빛에는 인간의 표정이 지워져 있다. 그것은 인간을 기호로 만든다. 감각이 제거된 기호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불빛이라고나 할까? 노부부의 얼굴에서 샘솟는 환한 미소는 인간의 표정이 감각으로 드러나는 어떤 순간을 보여준다. 그 미소는 꽃의 표정을 닮았다. 과즙과 칼날의 언어로 그려지는 백지의 시는 궁극적으로 노부부가 짓는 환한 미소를 향하고 있다. 노부부의 미소가 환해질수록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 또한 환해지는 거라고 말하면 어떨까?
입속에 갇힌 “영원한 무기수”(「혀」)는 이렇게 생기를 퍼뜨리는 꽃들을 만나 영원한 자유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선다. 영원한 무기수가 억제하는 감각을 영원한 자유인은 활짝 핀 꽃들처럼 마음껏 펼쳐낸다. 혀에 스민 칼날이 두려운 사람들은 자꾸만 언어 속으로 숨으려 하지만, 향기로운 과즙의 언어를 이미 맛본 시인은 끊임없이 노부부의 환한 미소와 같은 감각을 언어로 표출하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칼날로 작용하는 혀=언어가 아니다. 시는 칼날의 언어를 감싸 안은 과즙의 언어로 사물을 애무하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 울음」에 표현된 대로, 울다 지쳐 잠든 아이는 언니의 몸에서 엄마의 젖 냄새를 맡는다. 엄마의 젖 냄새를 몸과 마음에 새긴 아이는 이제 시를 품고 사는 존재가 된다. 시간이 흐르면 이 아이가 쓰는 언어에도 그 감각이 새겨질 것이다. 백지의 시는 바로 여기서 뻗어 나온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약력)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문학평론가, 지은 책으로 『연인들 사랑을 묻다』 등이 있음.
첫댓글 시 한 편 한 편 섬세하게 평론해주신 오홍진 평론가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시작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백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