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부인
제 10 화
용골대는 더욱 정신이 아찔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데, 문득 한 여자가 칼을 들고 표현히 나서며 외치기를
“어떠한 도적이길래 죽기를 재촉하느냐?”
용골대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느 댁이신지 모르고 들어왔사오나 덕택을 입고 살아 돌아가기를 바라옵니다.”
계화가 또 일러 가로되,
“나는 이 댁 시비 계화라 하는데 너는 어떤 놈이길래 죽을 곳을 모르고 적은 힘을 믿고 당돌하게 들어왔느냐? 우리 댁 부인께옵서 너의 모리를 베어 오라 하시옵기에 이처럼 나와 너의 머리를 베어 가고자 하니 어서 내 칼을 받아라.”
하는 소리 천둥처럼 진동하는지라 호국 장수가 이 때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들고 계화를 치려하니 칼든 손이 맥이 없어 손으로 남을 칠 수가 없으므로 마음에 놀라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슬프구나 사내 대장부가 세상에 벼슬하여 한 나라의 장수로 만리 타국에 나와 공을 세우지 못하고 가냘푼 여자의 손에 죽게 될 줄을 어이 알았으랴?”
하고 탄식을 금치 아니하니, 계화가 크게 웃으면서 가로되,
“무지한 적장 놈아, 불쌍하고 가긍(可矜)하구나. 대장부로 태어나서 타국에 나왔다가 오늘날 나처럼 연약한 여자하나 당하지 못하고 탄식만 하니 너 따위가 어찌 한 나라의 대장이 되어 타국을 침략하러 나왔는가? 너는 내 말을 한 번 들어보라. 법도가 없는 너의 임금이 하늘의 뜻을 모르고 가당찮게 예의지국(禮儀之國)을 침해하려 하고 너처럼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조무래기를 보내었으니 네 임금의 지모를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습고 너의 신세를 생각해 보니 불쌍하고 가련하나 내 칼을 받아라. 내 칼이 정머리가 없어 용서하지 못하고 네 머리를 벨 것이니 무식한 필부 놈일망정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말고 죽은 후에 혼백이라 나를 원망하지 마라.”
하고 칼을 휘둘러 호국 장수의 머리를 내리치니 금빛을 내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계화가 적장의 머리를 베어 들고 피화당으로 들어가 부인께 드리니, 부인께서 그 머리를 받아 밖으로 내던질 제 그제서야 바람과 구름이 그치고 밝은 달이 은은하게 비치는지라 호국장수의 머리를 다시 가져다가 뒤뜰 높은 나무 끝에 매달아 두고 다른 사람이 보게 하였다.
한편 상감이 남한산성으로 떠나신 후 호적이 노도처럼 밀려 들어와 만조백관들을 산 채로 가두어 놓고 호령이 서릿발 같은지라 나라 운이 불행하여 이토록 되었으니 영의정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제는 호국과 강화하심이 좋을 줄로 아옵니다.”
하므로 상감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는 글월을 띄워 호국 진영으로 보내시니, 호적이 곧장 들어가 왕비와 세자대군 삼형제와 비빈을 모두 산 채로 가두어 군사를 시켜 죄인 취급하되 장안으로 떠나니, 상감이 그 행함을 보고는 더욱 애통하 하시거늘 모든 신하가 또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위로하기를,
“전하의 옥체 보존하시옵기를 천만축수(千萬祝手)하옵나이다.”
하며 김자점의 고기를 먹기를 원하되, ‘이와같이 불행하게 됨은 하늘의 명이려니와 만고의 소인배 김자점이 적세를 도와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슬픈일이 아닌가?’ 하며 모든 백성이 한결같이 자점의 고기를 원하였다.
용울대가 강화를 받아가지고 장안으로 행군하여 들어가니 순라 돌던 초병이 보고하되,
“용장군께서 여자의 손에 죽었나이다.”
하므로 용골대의 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통곡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조선왕의 강화를 받고 왔거늘 어느 누가 감히 내 아우를 죽였단 말이냐?” 하며,
“앙갑음하는 것은 내 손안에 있으니 어서 들어가자.”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호령함에 서릿발같이 하여 우의정 집에 도착하여 바라보니 뒤뜰 초당 앞의 나무 위에 골대의 머리가 매달려 있는지라 골대의 머리를 본 울대는 더욱 분통을 참을 수 없어 칼을 뽑아들고 말을 모아 들어가고자 하는데 도원수 한유가 피화당의 울창한 나무를 보고는 크게 놀라 울대를 말려 이르되,
“용장군은 잠시 분한 마음을 가라앉혀 나의 말을 듣고 들어가지 말라, 초당에 있는 나무를 보아하니 보통나무가 아닌지라 옛날 제갈공명의 팔문급사진법을 함께 갖추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을손가? 용장군의 아우는 원래 위험한 계략이나 험한 땅을 모르고 남을 업수히 여긴 나머지 목숨을 재촉하였으니 그 누구를 원망 할 것인가? 용장군은 옛날 삼국지절 오나라 명장이었던 육손이 어복포에서 제갈량의 팔진도에 들어가 고생하였던 것을 생각하여 험지를 알지 못하고 들어가지 말라.”
용울대는 분함이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라 칼을 들고는 땅을 두두리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가로되,
“ 그러하옵시면 공대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오리까? 만리 타국땅에 우리형제 같이 나왔다가 대사를 이룬 후에 분연히 동생만 죽이고 앙갚음을 못하오면 한 나라의 장수로서 한낱 여자에게 굴복하는 것이오라 이는 차마 불가 하옵니다. 어찌 후세의 웃음거리를 면하오리까?”
한유가 대답하여 가로되,
“용장군, 그대는 잠시 분함을 참지 못하여 한갓 용맹만을 믿고 저와같은 험지에 들어갔다가는 앙갚음 하기는 커녕 도리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이니 잠깐 마음을 가라앉혀 그 신묘한 재주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로다.
비록 억만대군을 이끌고 처들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감히 도모하지 못하고 또한 군사 한명도 살려오지 못할 것인즉 하물며 더=kstls으로 뛰어들고자 하니 어찌 살아오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용울대가 그 말을 듣고는 옳게 여겨 차마 들어가지는 못하고 한꺼번에 불을 놓으라 하니 군사들이 명을 듣고 일시에 불을 놓으니, 오색구름이 자욱한 가운데 나무가 변하여 수많은 장병이 되어 징소리 북소리와 억만대군이 함성이 하늘과 땅을 진동하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비룡과 맹호가 서로 맞대고 바람과 구름이 크게 일어나며 앞뒤 좌우로 겹겹이 에워싸며 공중에서 신장들이 갑옷과 방패를 갖추어 장창대검을 들고 내려와서 수 많은 신병을 이끌어 닥치는대로 죽이니 징소리 북소리와 억만 대군의 함성이 하늘과 땅을 무너뜨리는 듯하여 그 웅장한 호령소리에 호국 병사들이 혼을 잃어 대오를 차리지 못한 채 서로 밟히어 죽는자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호국 장수가 정신을 못차리고 후퇴하니 살벌한 소리가 그치고 신장이 간곳 없는지라 호국장수 등이 그 모양을 보고 더욱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다시 칼을 뽑아들고 지체없이 들어가고자 하니 푸르고 맑던 날씨가 일순간에 안개가 자욱하여 눈앞을 분간치 못하게 되므로, 용울대는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골대의 머리만 쳐다보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때에 갑자기 나무 사이에서 한 명의 여자가 선연하게 나오며,
“ 이 무지한 용울대 녀석아, 네 동생 골대가 내 칼에 놀라 혼백이 되었거늘 너마저 내 칼에 죽고 싶어 신명을 제촉하느냐?”
울대가 이 말을 듣고는 더욱 격분하여 크게 꾸짖어 말하되,
“너는 도대체 어떠한 여자이길래 장부를 보고 요망스런 말을 하는가? 나의 아우가 불행하여 네 손에 죽었지만 나는 이미 조선왕의 항성을 받았거니 이제는 너희도 우리 호국의 신민인데 어찌하여 우리를 해치려 하느냐? 이는 소위 나라를 알지 못하는 여자로구나. 참으로 살려서는 쓸 곳이 없으니 어서 나와 나의 칼을 받고 죄를 뉘우쳐라.”
하므로 계화는 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골대의 머리만 자꾸 욕질하여 가리키고 말하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충렬부인 시비 계화라 하는데 너희 일을 생각하니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하구나. 네 동생 골대는 나와 같은 한낱 여자의 손에 죽고 너는 또한 나를 당하지 못하고 저다지도 분함을 참지 못하니 이 어찌 가련하다 아니하겠는가?”
울대는 더욱 분한 마음이 크게 일어나 철로 만든 활에 짧은 화살을 꽂아 쏘니 계화는 맞지 않고 육칠 걸음 앞에 가서 땅에 떨어지는지라 울대는 더욱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활을 쏘라하니 군사가 명을 듣고 쏘는데 하나도 맞지 않는지라 울대는 화살만 허비하고 가슴이 막혀 어쩔줄 모르는 가운데 그 신묘함을 탄복하면서 또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한 채 김자점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도 이제는 우리 호국의 신민인데, 서둘러 도성 군사를 모아 저 초당의 팔진도를 부수고 박씨와 계화를 생포하여 들이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하면 호령이 엄숙하므로 김자점이 몸둘 바를 몰라하며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장군의 명령을 어기오리이까?”하며,
공포 일발을 쏘아 군사를 호령하여 팔문진을 포위하고 좌충우돌 하였으나
어찌 능히 팔문진을 부술 수가 있으리오? 그 때 용울대가 한가지 꾀를 생각해 내고는 군사에게 명령하여 팔문진 사방에 화약과 염초를 묻고 크게 호령하여 이르되,
“너희들이 제아무리 천변지술이 능하다 한들 오늘에야 어지 살기를 바랄 것인가? 목숨이 아깝거든 어서 나와 항복하라/”
하며 무수히 꾸짖어 욕을 하였으나 한 사람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