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움을 이기는 신앙
(창 45: 1~15)
(1)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2)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더라고 전하소서
(12) 당신들의 눈과 내 아우 베냐민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
(13) 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14)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15)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
들어가는 말 /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이기는 신앙’ 여덟 번째 시리즈로 창 45:1~15절 말씀을 가지고 ‘미움을 이기는 신앙’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론 /
혹시 여러분은 남을 미워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없으시다고요? 아마 없으신 분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훌륭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두 번 이상은 남을 미워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어떤 경우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남을 미워해 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미움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2002년 6월 10일에 분당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교수 아들인 장남이 아버지를 미워하다 못해 급기야는 죽이고자 결심하여 꾸지람을 심하게 들은 그날 밤에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비명소릴 듣고 달려 나온 할머니까지 죽이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방화까지 한 사건입니다. 남들 보기에 모든 것이 갖춰진 ‘있는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에서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일류 코스’만을 거쳐 서울의 명문대학 교수로 명성을 얻고 있는 아버지와 한국의 일류 대학을 나온 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라며 서울의 대학에까지 들어간 아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이 같은 짓을 저질렀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4년 전부터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친다고 장남에게 꾸중과 통제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어 군대 가기 열흘 전에 늦게 귀가했다며 심하게 나무란 날 절정에 달해 결국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것입니다. 이는 미움이 얼마나 큰 일을 초래하는 지를 말해주는 단서입니다.
그러면 미움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미움이란 말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미워하는 일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과 22절을 보십시오. (마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라가 -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 이라는 의미의 아람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 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이 말씀이 주는 의미는 미움은 살인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전에 예를 들었던 예화도 그런 경우이잖아요. 아버지를 미워한 것이 결국은 살인으로 이어진 것처럼 미움은 살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남을 미워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우리는 살다보면 여러 사람과 부딪히면서 살게 되는데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기가 쉬운가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에게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있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용서는커녕 미워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릅니다.
본론 /
그러면 이렇게 맘대로 되지 않는 미움을 어떻게 하여야 이길 수 있을까요? 오늘은 바로 이 문제를 놓고 해결점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가 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상대방을 처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큰 잘못을 하고 아픔과 상처를 주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법정최고형에 처해지기를 바랍니다. 그 예로 지난 수요일인 3월 10일에 여중생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김길태씨를 검거하였을 때 피해자의 아버지는 분노가 극에 달해 이렇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범인에게는 법이 허용하는 최대의 형량이 선고돼 다시는 햇볕을 못보게 해야 한다”고 처벌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말은 죽은 자녀를 보고 있는 부모라면 누구나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당장 달려가서 자기 손으로 자기 딸을 죽인 그 범인을 자기 손으로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미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되고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는 미움을 영원히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미움을 이길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처벌하기보다는 상대방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 때에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렇게 하여서 형들을 미워하지 않고 형제로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요셉의 입장에서 볼 때에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처벌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인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신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요셉의 형들은 지난 날에 대한 잘못을 시인하고 있었기에 더욱 요셉은 인간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처신했던 것입니다. 창세기 42장 21절을 보십시오. (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이는 그동안에 문제 생길 때마다 죄 값을 받는다고 한탄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형들이 변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그 증거로 창세기 44:33~34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을 구속하려하자 유다가 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창44:33~34)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막내 동생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희생하려는 마음,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게 되자 요셉은 그 마음에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사랑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던 것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2절)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얼마나 크게 울었는지 궁중에 다 들렸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희생정신과 아버지를 지극히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기에게 행한 죄에 대한 미움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웠던 형들을 처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3-4절)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이처럼 요셉은 형들을 용서해주고 긍휼을 베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요셉이 ‘나는 당신들의 아우입니다.’ 라고 말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뛰어넘어, 이제는 다시 형제로 맞아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요셉은 애굽에서 제2인자가 되었기 때문에 과거 자신에게 못할 짓 했던 형들을 생각하면 자신의 권한으로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처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고자 형들을 원수가 아닌 형제로 맞아준 것입니다.
그렇지만 형들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뒤로 어떻게 됐든지 전혀 알 수 없었고, 설마 살았다 할지라도 애굽의 총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너무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복이 두려웠습니다. 이때에 요셉은 형들의 마음을 알고서 안심시켜 드리고자 ‘나는 당신들의 아우입니다.’ 라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미움의 관계가 아니라 형제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요셉의 형처럼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기고만장하여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고민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할지라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자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말도 안되는 기도를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 같으면 과연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야 말로 도저히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죄에 빠진 이웃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걷잡을 수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럴 때에는 상대방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에 빠져 살아가는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면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자기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하고 저렇게 행동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둘째, 상대방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큰 잘못을 하고 아픔과 상처를 주었다면 용서하기보다는 분노가 일어나서 미워하고 심할 때에는 저주까지 퍼부으며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상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상대방의 행동에서 하나님의 목적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위만 눈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도 넘기고 노예와 죄수의 삶을 사는 등 말로 다 못할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모든 일이 바로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장에서 요셉의 말 중에 빈번하게 나오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허락한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그 목적이 바로 생명의 구원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십시오. (7~8절)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이처럼 요셉의 생각은 분명합니다. 형들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허락하신 일이니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고 보복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동안 요셉이 겪은 고통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창대케 하시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하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일이 있어도 상대의 행위를 보고 미워하거나 대적하지 마셔야 합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조용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묵상하셔야 합니다. 또한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당신의 억울하고 피 맺힌 절규를 듣고 계십니다. 그 뿐 아니라 신음소리까지 듣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과 억울한 삶을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상처투성이의 삶을 더 큰 유익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런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어떤 미움도 하나님께 내려놓고 그 분이 일하시도록 하셔야합니다. 시편 55편 22절을 보십시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이 이뤄지도록 바꾸실 것입니다.
(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셋째, 상대방의 파멸보다 상대방의 회복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었다면 상대방도 내가 받은 것만큼 똑같이 아픔과 상처를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미운 사람이 사고가 났거나 일이 잘못되어 큰 낭패를 보았을 때에는 통쾌하게 생각합니다. “아이구 속이 다 시원하네. 그 놈은 그래도 싸다구. 진작에 그렇게 되어야 하지” 라며 오히려 맞장구를 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아리랑 노래에도 그런 가사가 있잖아요.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이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에게는 미워서 잘못되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설령 받은 상처가 있더라도 ‘너도 당해 봐라.’는 식으로 대응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루게 하겠다.’고 앙심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상대방의 파멸을 기뻐해서는 안되고, 상대방의 회복을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로 19절을 보십시오. (롬12:17~19)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할 수만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화목 수준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축복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4절을 보십시오. (롬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바로 이 말씀이 화목 수준이 아니라 축복하는 수준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머 강사가 ‘용서의 노하우’란 글을 썼습니다. 그의 글을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말로만 실수한 사람은 용서하자. 나쁜 행동을 한 것은 아니니까. 둘째, 나쁜 행동을 했어도 피해본 게 없으면 용서하자. 셋째, 피해본 게 있어도 경미한 건 용서해주자. 넷째, 피해가 막심해도 잘못했다고 빌며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주자. 다섯째,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도 사과도 않는 친구, 한마디로 인간 말종인 경우에 한해선 용서해 주지 말고 겁나게 복수해버리고 싶지만, 나 아니라도 매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인생을 비난해 무엇하리. 인생이 불쌍하니 용서해주자.’ 이 글의 특징은 용서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얼마든지 복수할 수 있는 권세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잘못된 감정을 푸는 수단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절)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이제 요셉은 모든 가족이 하나 되어 흉년 속에서 함께 살아갈 기대를 나누고 있습니다. 또한 상대를 향한 진노를 쏟아 붓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고 가족공동체로 살아 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미움을 극복하고 화해와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을 이기고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요셉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도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예화)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수용소에서 아버지와 언니를 잃은 코리 텐 붐 여사는 자기의 삶을 원망하고 자기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에게 원한을 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전했습니다. 어느 날 코리 텐 붐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과 용서를 전하고 있을 때 나치 수용소에서 그녀를 가장 지독하게 괴롭히고 고문했던 어떤 간수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히던 그가 지금 그녀 앞에 서서 손을 내밀며 “나를 용서해 줄 수 있겠소?”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뜨겁든 차갑든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으며 내가 그리스도께 순종할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예수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나를 향해 내민 그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것을 체험했다. 마치 전기와 같은 어떤 것이 나의 어깨로부터 시작해서 팔을 통해 우리가 서로 맞잡고 있는 손과 손으로 퍼져갔다. 이 따뜻한 화해가 나의 존재 전체에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내 양쪽 눈에 눈물이 맺혔다. ‘형제님, 형제님을 용서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우리는 한참동안이나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과거 수용소 간수였던 그 사람과 말이다. 내 인생에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고 강렬하게 깨달았던 순간은 없었다.”
결론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이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상대를 향해 파괴적인 복수의 칼날을 꺾고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살다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아픔도 겪고, 결코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분노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 내려놓으십시오.
복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주의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만이 극도의 분노로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움의 멍에를 내려놓게 될 것입니다. 이제 미움을 이기고 주님 안에서 사랑과 평강의 삶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그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미움을 이겨내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적용
당신은 미워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용서해줄 것인가?
정리
미움을 이기는 방법 (미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첫째, 상대방을 처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둘째, 상대방의 행위보다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파멸보다 상대방의 회복을 기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