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는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보트나 동물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인격체인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유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자유라면서 사탄과 악을 따른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자아의 문제입니다.
자아를 영어로 "self"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옛 자아와 새 자아가 있습니다. 옛 자아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을 가리키지만, 새 자아는 성령으로 새로워질 뿐 아니라 실패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새로 형성된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새 자아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를 존중하고 그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 새 자아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에서 형성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입니다. 본문의 열 뿔의 비밀이 바로 자아의 비밀입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자아란 무엇입니까?
1. 자신의 의지를 가리킵니다.
12절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열 명의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10은 모든 전부 가득 만수로 충분하고 가능함이 있다는 것이고, 뿔은 권세나 권능의 상징입니다. 이처럼 자아의 권세는 큽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그것은 옛 자아지 새 자아가 아닙니다. 권세가 극에 달한 메데파사의 아하수에로 왕이 생각납니다. 문제는 이 권세가 하나님의 주권에 충돌하거나 도전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자아는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습니다.
12절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나라 없는 왕은 무력합니다. 이처럼 모두가 자아를 소유하고 있지만 각인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성장과정이 좋았거나 어려움이 없는 환경 속에서는 자아의 세력은 크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린이의 경우는 자아가 발달되지 않아 더욱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아가 없다고 할 수 없고 없는 것 같아도 은근히 강하기도 합니다.
3. 자아는 무엇과 결탁될 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2절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나라 없는 왕 같은 자아였으나 붉은 빛 짐승이 가세함으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자아가 무언가와 결탁될 때 그 권세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탐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지식이나 감동이나 상처를 받았을 때, 혹은 사상 등 세뇌교육을 받았거나 어떤 동기가 주어졌을 때 그 자아는 극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행했다면 새 자아일 텐데 부패한 마음과 함께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4. 자아의 세력은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한동안 권세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아처리 훈련입니다. 야곱은 한동안 형과 겨루는 등 태생적으로 자아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혹독한 연단 속에서 깨어지고 부수어졌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고통이요 손해라는 것을 채득했습니다. 특히 천사와 씨름하다 가장 강한 뼈인 환도뼈(고관절)가 위골된 후에야 새 이름의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모세도 애굽의 왕자로서 한 동안 자기 권세와 능력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려 했지만 40년의 실패 속에서 이제는 두 손 들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도 한동안 몰랐을 때는 그리스도릏 대적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연단의 맷돌 속에서 부스러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평범하지 않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하고 가방끈 길고 돈 많고 권세와 능력도 많으면 많을수록 더 처리하기 힘듭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주장이 더 강하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룟유다가 그런 사람입니다.
자아처리란 하나님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기록된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셨습니다. 광야에서 사탄의 기발한 제안도 물리치시고, 제자를 선택하실 때 아버지 뜻대로 하기 위해 밤새 기도하셨고, 십자가를 앞두시고도 아버지의 뜻만 구하셨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소유해야 할 새 자아의 모습입니다. 광야에서 함께 하던 이 들짐승이 바로 우리를 처리하시기 위해서 붙여주신 악의 파트너입니다(시57:4-5, 고전15:31-32).
어떤 순간에도 내가 죽어야 한다면서 힘들어 하는데 악의 파트너가 시험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처리할 수 있다면 많이 죽어진 것입니다. 갈등 없이 즐거움으로 할수록 좋습니다. 반면 죄가 기승을 부린다면 이것은 자아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생활의 부족이요 경외함 부족의 문제입니다. 잠16:6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5. 자아는 우리를 더욱 육신적이게 합니다.
13절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계13:15에도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더라는 비슷한 관계입니다. 그들이란 열 뿔 즉 열 왕을 가리키고, 짐승은 일곱 머리 붉은 빛 짐승을 가리킵니다. 계 13장의 세상정욕이 육체를 부추기듯이, 자아 역시 육신적인 마음인 지식과 사상과 감정들과 결합하여 한 뜻을 이룹니다.
그래서 자아가 어떤 마음과 결탁하느냐에 따라 현실주의 도피주의 쾌락주의 개인주의 독신주의 완전주의 채식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각종 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자아의 형태는 각각 다릅니다. 주의자라고 다 나쁜 건 아닙니다. 하나님제일주의 경건주의 자유민주주의 새 자아가 가져도 좋을 주의들이 많습니다.
6. 자아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립합니다.
14절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자아가 잘못된 사상이나 마음 등 부패한 마음과 결탁되었기 때문입니다. 고전3:3에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한 것과 같습니다.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운다는 것은 대속의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육체를 따라 범죄하거나, 자기의 의로움과 노력을 주장하거나,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는 완악함이 그것입니다.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는 자아라면 그 반대되는 개념으로 고집스러운 염소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도 믿음이 없어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과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1세 국민들이 다 죽은 후에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듯 은혜 가운데 살려면 옛 자아가 죽고 믿음과 순종의 새 자아의 형성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웁니다. 천상천하에 예수님께 맞상대하려는 자는 사탄과 자아 빼고는 없습니다 (사14:12-14). 자아처리를 하지 않으면 사탄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적하는 것이 됩니다. 주여 주여 부르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주님의 자리를 차지한 것입니다. 순종하는 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40:8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한 예언 대로 사신 예수님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7. 그러나 어떤 자아도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만주의 주와 만왕의 왕은 같은 의미로서 반복한 것은 강조형입니다. 예수님을 만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소개한 것은 자아가 스스로 주와 왕처럼 행동함에 대한 단호하신 주님의 모습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은 더 강하신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로서 그 위에 군림하십니다(단8:25, 계19:16). 그들을 이기신다는 것은 전투적 용어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는 미가엘 천사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은 자아의 세력을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자아가 강할수록 고난의 연단이 심합니다. 눅20:18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셨습니다. 만약 대항하다가는 가루로 만드실 것입니다. 극도로 완악하면 병상에 눕히기도 하시고 소유를 치기도 하시고 지옥 체험까지 시키시며 그 완악함을 깨뜨리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하시고 강한 손길 앞에서 두 손 드는 것이 현명합니다.
8. 자아처리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여기 약 네 가지로 힌트를 주셨는데 그들은 누구일까요? 첫째 힌트는 "함께 있는 자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입니다(막3:13-14, 막5:18-19). 두번 째는 "부르심을 받고" 나를 따라오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셋째 힌트는 "택하심을 받은" 주님이 밤이 맟게 기도하신 후 특별히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힌트는 "진실한 자들" 즉 예수와 함께 살고 죽기를 약속한 진실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자아처리하려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라는 교훈입니다. 제자훈련에서 자아처리는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제자의 정신을 가져야 자아를 처리할 수 있다는 말씀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자기 이론과 주장에 사로잡힌다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며 비록 학문이 부족하더라도 열심으로 주님을 배우고 따를 자를 선택하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사울과 같이 교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삼상15:23). 그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을 땐 얼마나 겸손했습니까?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못하여 말씀을 떠나 자기를 위하여 군대를 만들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기다리라는 7일을 참지 못하여 석양에 제사를 드리고, 자기 이름을 알리려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내 맘대로의 행진곡에 맞추어 나가다가 결국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고, 13절에서는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해도 예수를 우리의 주 우리의 왕으로 삼았으니 그를 존중하고 그 말씀을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로 믿고 그 정권에 순복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불순종의 자아 다 내려놓고 주님의 제자들처럼 기쁨으로 순종하는 가장 아름다운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