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256
■ 1부 황하의 영웅 (256)
제4권 영웅의 길
제 32장 제환공(齊桓公)의 죽음 (1)
임치(臨淄) -
동방 최대의 도시다.
성 동쪽으로 흐르는 치수(淄水)라는 강을 바라보고 있다하여 임치라는 지명이 붙었다.
그 전에는 영구(營丘)라고 불리었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임치(臨淄)는 그렇게 화려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제환공(齊桓公)이 즉위하고 관중이 재상으로 부임하면서 임치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산계곡의 물이 초원의 강으로 흘러들듯 사람들은 모두 임치로 몰려들었다.
성안은 새로 지은 집들로 가득했고, 심지어는 성밖에도 마을이 형성될 정도로 번잡했다.
그리하여 임치(臨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 !“
중이(重耳) 일행 역시 임치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 자신들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이 천하 패업을 이룬 나라의 도성이로구나!‘
동시에 한가닥 불안이 마음속을 스쳐갔다.
'이곳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중이(重耳)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남방 대국 초(楚)나라가 있긴 했지만......
아아,
어찌 또 그 곳까지 구걸하며 걸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만한 힘도, 정열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중이(重耳)일행은 임치성 남문 앞에 서서 기대와 불안의 눈빛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감히 문지기 앞으로 나서기가 두려웠다.
이때 중이 일행의 행색을 살펴보면 한마디로 가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옷에서는 악취가 풍겨났고, 신발은 모두 헤어져 맨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얼굴은 때로 얼룩졌으며, 머리카락은 먼지를 뒤집어써 마치 백발 노인들 같았다.
게다가 굶주림에 지친 얼굴 표정들은 가련함을 넘어 섬뜩함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중이(重耳) 일행의 모습을 문지기가 보았다.
"뭐야, 저것들은.........?“
문지기는 그들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뭐라 막 호통을 치려 할때 한 사나이가 나서며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굵고 위엄어린 음성이었다.
초라한 행색과는 전혀 다른 음색.
문지기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했다.
새삼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앗, 하고 문지기는 속으로 외쳤다.
보잘 것 없는 생색과는 달리 눈매만은 여간 날카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방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와 그 가신들이오.
제나라 군주를 알현하고 싶어 이렇듯 만릿길을 달려왔소,"
가신단의 우두머리인 호언(狐偃)이었다.
문지기의 고개가 갸웃 흔들렸다.
믿어야 할지 믿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이런 행색으로 임치(臨淄)를 방문한 타국의 공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발로 차서 내쫓았을 것이지만, 호언(狐偃)의 눈빛에 기가 질린 문지기는 감히 호통칠 수가 없었다.
진짜 진(晉)나라 공자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문지기는 신중하게 대처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시 기다려주시오.
곧 궁에 알리겠소.“
중이(重耳)를 비롯한 호언, 조쇠 등은 초조했다.
이미 위(衛)나라에서 한 번 입성을 거절당한 바 있지 않은가.
그러나 제(齊)나라는 위나라와 달랐다.
모든 것이 빠르고 절서정연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 모든 게 관중(管仲)이 재상으로 있을 때 이루어졌다.
- 정치와 행정은 간편해야 한다.
관중(管仲)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가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그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공자 중이(重耳)라고........?“
제환공은 이례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군의 죽음을 기화로 군위에 오를 수 없다고 말한 그 중이(重耳)말인가?“
제환공(齊桓公)은 천하 패업을 이룬 영웅답게 서방에서 일어난 작은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제궁(齊宮)은 삽시간에 부산해졌다.
진(晉)공자 중이(重耳)를 맞이하기 위한 행사를 서두르는 것이었다.
제환공(齊桓公)은 먼저 사람을 보내 중이 일행을 성안으로 들게 하여 귀빈만이 머물 수 있는 영빈관으로 안내했다.
중이(重耳)는 영빈관으로 들어 목욕을 하고 제환공이 내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가신들도 마찬가지.
삽시간에 그들의 행색은 바뀌었다.
어엿한 진(晉)나라 공자와 그 가신단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궁으로!“
오히려 중이(重耳) 일행이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제나라 관리들의 안내로 궁정으로 들어갔다.
"오오, 서방의 현자여!“
제환공(齊桓公)은 두 팔을 벌려 중이를 환영했다.
"비록 그대와는 초면이지만, 그대의 명성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소.
오랜 친구를 본 듯 기쁜 마음이오."
중이(重耳)와 그 가신들은 제환공의 환대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간의 고생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르다.
과연 천하 패공의 면모!‘
자신들을 박대한 위문공(衛文公)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제환공에 대한 모욕이다 싶을 정도였다.
제환공(齊桓公)의 입에서는 계속 그들을 감복시키는 말이 터져 나왔다.
"언제까지 이곳에 머물러도 좋소.“
최고의 대우였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지낼 수 있는 저택을 내주고, 말과 수레도 20승(乘)을 내주었다.
식량과 생활용품도 상경(上卿)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제공하였다.
제환공(齊桓公) 자신 공자 시절에 타국으로 망명했던 기억이 생생해서인가.
중이를 가까이 불러 물었다.
"가족들은 데리고 오셨소?“
"도망다니는 사람이 어느 겨를에 가족을 데리고 다니겠습니까?“
중이(重耳)의 대답에 제환공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객지에서의 하룻밤은 마치 일 년만큼이나 지루하오.
내 그대에게 시중드는 여자를 하나 보내주겠소."
중이(重耳)는 웃기만 했다.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한 여인이 중이의 침소로 들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시중드는 여자로만 알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중이(重耳)는 그 여인이 제환공의 친딸인 것을 알고 기절초풍했다.
"그대는.......?“
"제강이라 불러주십시오.“
제강(齊姜).
제나라 공실의 여자 강씨라는 뜻이다.
"좋은 혼처 자리가 많이 있을텐데, 하필이면 나 같은 망명객에게........“
"소첩은 그저 공자께서 금의환향(錦衣還鄕)하실 날만 기다리겠습니다."
중이(重耳)가 제환공을 만난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죽음 직전에 입술을 적셔주는 감로수(甘露水).
모든 고생은 끝났다.
이제부터 새 출발이다.
중이와 그 일행은 제(齊)나라에 정착했다.
아침에 눈을 떠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더없이 신선하고 밝아 보였다.
중이(重耳)는 자신의 곁에 늘 아름다운 여인 제강(齊姜)이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행복했다.
과거의 고생스러웠던 시간이 차츰 머릿속에서 지워져갔다.
'이것이 바로 내가 꿈꾸던 생활이다.‘
백적(白翟) 부락에 남겨두고 온 계외와 두 아들의 얼굴이 차츰 그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가고 있음을 중이(重耳)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
첫댓글 지기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