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나그네(stranger)
집을 떠나 여행길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나 성경에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를 나그네로 보았다(히 11:13; 벧전 2:11).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 사람은 이 땅의 삶을 나그네의 길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의 자세를 견지했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갔다(히 11:13-14).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칭함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한성을 예비하신다고 하셨다(히 11:16).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지낸 것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2:21; 23:9; 레 19:33-34; 신 10:19; 23:7).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나그네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쉬는 것(출 23:12), 공평한 재판을 받는 것(신 16:18), 추수 때 이삭과 열매를 남겨 두는 것(레 19:9-10), 제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의 소산을 주어 먹게 하는 것(신 26:12) 등을 나그네에게 행하라고 명하셨다. 선지자들도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사 58:7; 겔 18:7).나그네들도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었으며(출 12:43-44, 48) 이스라엘의 절기와 희생 제사, 율법에 관련된 조항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출 12:49; 레 16:29; 17:8-9; 18:26: 민 15:29).
성경에는 아브라함(창 18:1-8)이나 롯(창 19:1-3), 욥(욥31:32) 등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중요하게 가르치셨으며(마 25:35-40)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강조하여 가르쳤다(롬 12:13; 갈 6:10; 딤전 6:18; 딛 1:8).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감독과 장로, 참 과부의 자격 요건 중 하나였다(딤전 3:3; 5:10; 딛 1:8).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하였다(벧전 1:17).
다음은 성경 속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거나 나그네의 삶에 대해 고백한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헷 족속에게 사라의 매장지를 구할 때 자신이 나그네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했다(창 23:4).
이삭: 나그네의 삶을 살던 이삭은 블레셋 사람의 시기를 받았을 때 그의 우물을 몇 차례나 양보하였다(창26:12-25).
야곱: 바로를 만난 야곱은 자기의 나이를 밝힐 때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라고 하였다(창 479).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팔지 말라고 하시며 그들은 이 땅에 사는 나그네라고 말씀하셨다(레 25:23).
잇대: 블레셋에서 귀화한 잇대가 압살롬의 반란으로 쫓겨 가는 다윗을 따르려고 하자 다윗은 그가 나그네로 지내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반대하였다(삼하 15:19-20).
다윗: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예물을 드린 다윗은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 머무름이 없으며 인생이 나그네의 삶이라고 고백하였다(대상 29:15).
예수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심을 말씀하셨다(마8:20).
성도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 나라에 소망을 두며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벧전 2:11).
출처- 『비전성경사전』(두란노).
첫댓글 성도는 천국에 본적을 둔 순례자로서 이 땅을 거쳐가는 과객에 불과합니다. 짧지만 은혜로운 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히11:13
<호크마 주석>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이 사람들'이란 8-12절에 언급된 인물들 즉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킨다. 그들은 모두 가나안 땅과 그 후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었으나, 그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보고'는 신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Morris). 즉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의 성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된 구원을 가리킨다(Bruce).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외국인과 나그네'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한 말 즉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와 야곱이 바로에게 한 말 즉,
'내 나그네 길...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창 47:9)을 인용한 것이다. 저자는 본절에서 옛 신앙의 위인들의 그러한 고백을 통해 그들이 이 땅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나그네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참된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살았음을 강조한다.
벧전2:11
<호크마 주석>
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베드로가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 모두 7회나 언급한 애정어린 호칭이다(4:12; 벧후 3:1,8,14,15,17). 이 호칭은 수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사용된 호칭이며(롬 12:19; 살전 2:8, Blum, Caffin) 본서와 베드로후서에서는 간곡한 권면이나 무엇을 환기시킬 때 사용되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 '나그네'의 헬라어 '파로이쿠스'( )는 일시적으로 거주하여 법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한 자를 가리키며'행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피데무스'(* )는 거쳐 가는 길손으로 정착자가 아닌 자를 나타낸다. 베드로는 이 용어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 시민으로 신령한 신분을 가지고 있으며(빌 3:20)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은 나그네나 행인처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유한(有限)한 것임을 시사한다(시39:12; 히 11:13, Stibbs, Lenski).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 '육체'의 헬라어 '사르키콘'(* )은 단순한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육체에서 비롯된 정욕은 영혼 즉 하나님께서 부여하셔서 그리스도인이소유하고 있는 영적인 삶을 어렵게 한다. 본문에서 언급된 '육체'와 '영혼'은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신분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합당한 영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락된 악한 본능과 대적하여 싸워야만 한다(롬 6:6; 7:23; 고전 9:27; 갈 5:16,17; 골 3:5, Stibbs, Caffin, Blum, Leighton).
히11:16
<호크마 주석>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그들이 찾았던 고향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좋은 곳, 즉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다. '사모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레곤타이'(* )는 '...을 향해 뻗치다', '열렬히 갈망하다'라는 의미로 그들이 간절히 하늘나라를 갈망하였음을 시사한다. 한편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 15, 16)이라고 말한 사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결코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하늘나라에 '한 성'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 '성'은 '장막'(9절)과는 대조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영원한 처소를 가리킨다.
출22:21
<호크마 주석>
너희도...나그네이었음이니라 - 나그네 압제 금지의 법을 베풀면서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의 종살이를 기억시킨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타국에서 이미 이방인 되어 겪었던 설움을 먼저 체험한 자들로서 이방인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기 위함이며(23:9) (2)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랑의 빚을 진 민족임을 깨닫게 하여 그 사랑의 빚을 약한 이웃에게 갚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레19:33, 34
<호크마 주석>
본문은 타국인에 대한 보호 규례이다. 이 규례는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해 주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실천 의무가 있음과 동시에 하나님의 명령은 민족적인 편협성을 뛰어넘어 보편적인 성격을 띤 것임을 교훈해 준다. 이처럼 기독교 윤리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기초하여 성도들에게 행동 규범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요일 4:11).
타국인 - 이스라엘 사회에 동화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17:8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 차별 대우하거나 멸시치 말고 타국인을 이스라엘 본토 백성 곧 동족처럼 대해 주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지연이나 혈연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인류애를 발견할 수 있다.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 타국인 사랑의 규례를 말씀하시는 중 하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그 지긋지긋한 종 시절을 상기시키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절실히 겪었던 설움을 먼저 체험한 자들로서
그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기 위함이며(출 23:9) (2) 자신들도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랑에 빚진 민족임을 깨닫게 하여 그 사랑의 빚을 약한 이웃에게 갚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장코뱅 사랑의 빚을 이웃에게 갚게 하신다는 표현이 참 은혜롭습니다.
신10:19
<호크마 주석>
전에 너희도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 이스라엘의 과거 나그네 역사에 대해 모세가 새삼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백성들로 하여금 애굽에서 이방인으로서 먼저 절실히 겪었던 설움을 통해, 동일한 상황에 놓인 자들의 심정을 헤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출 23:9). (2)자신들 역시 하나님께 큰 사랑의 빚을 진자들임을 주지시켜, 그 빚을 연약한 이웃들에게 갚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분들은 하나같이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네요.
나그네의 삶은 고단하지만 목적지는 뚜렷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삶이죠. 이 세상과 타협해서 안위와 부귀를 누리는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르는 어려운 길을 택한 모든 나그네로 살아간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뚜렷한 목적지? 좋은 함축적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장코뱅 아멘! 공감합니다.
롬12:13
<호크마 주석>
성도들의 쓸 것을 - 성도들은 로마에 있거나 예루살렘에 있거나(15:25)를 막론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든 신자들을 일컫는다. '쓸 것'에 해당되는 헬라어 '크레이아이스'(* )는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사본, 비잔틴(Byzantine) 사본 등을 따른 본문이며 어떤 사본들은(D, F, G) '크레이아이스' 대신 '기억', '기념'의 뜻을 가진 '므네이아이스'(* )로 나오는데, 고대 라틴 사본들이 이를 지지한다. 또한 여러 학자들(Barth, Zahn, Kuhl)은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해 연보한 것을 언급하면서 '므네이아이스'를 지지한다. 그러나 '기억', '기념'이라는 뜻의 '므네이아이스'보다는 '쓸 것'이나 '궁핍'을 뜻하는 '크레이아이스'가 내용에 더 부합하며 알렉산드리아 사본이나 비잔틴 사본은 다른 사본에 비해 오래되고 우수한 사본이다. 즉 사본상의 우위성과 문맥상 전자가 우월하다.
공급하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코이노네오'(* )의 현재 분사형인 '코이노눈테스'(* )이다. '코이노네오'는 물질적이며 재정적인 도움의 의미를 띤 '주다',
'몫을 기부하다'(15:27;빌 4:15), 또는 '참예하다'(빌 4:14;벧전 4:13), '함께 하다'(갈 6:6)의 뜻을 가진다. 성도들에게 서로 어려운 성도의 필요와 궁핍을 도와줄 뿐 아니라,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라는 권면이다. 당시의 로마 제국은 식민지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고 토지를 몰수하는 등 많은 재정적인 압박을 가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따라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거기다 성도들은 신앙에 대한 박해도 감수해야 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성도간의 곤경(困境)을 도우며 동참하는 것은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것이다.
손 대접하기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롸세니안'(* )은 '필'(* )과 '크세노스'(* )의 합성어이다. '필'은 '사랑하는', '좋아하는'의 뜻이며 '크세노스'는 '손님', '이방인', '객'을 뜻한다. 따라서 '필롸세니아'는 '손님이나 이방인, 즉 나그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손님을 환대함을 일컫는다. 애굽에서 '객'으로 있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과거 역사를 생각하면서 '손 대접'하기를 강조하곤 했다.
또한 초대 교회 당시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심했으므로 이곳 저곳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행하는 자들(바울과 그의 동료들)과 핍박으로 도망하는 자들, 돈 때문에 심부름 다니는 자들은 곳곳에서 신자들에게 대접을 잘받았다. 신자들은 한 가족이면서(10절) 모두 나그네이므로(히 11:13), 서로를 손님으로 여기고합심하여 서로를 돌본 것이다.
힘쓰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형은 '디오코'(* )인데 '추구하다', '좋다', '노력하다'를 뜻한다. 여기서는 현재분사형 '디오콘테스'(* )가 사용되어 계속적으로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권면이다. 이는 14절에 나오는 '핍박하는 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디오콘타스'(* )와 같은 동사에서 파생한 것으로 바울이 의도적으로 문맥상 상반되는 곳에 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 '힘쓰라'는 의미가 상대적으로 강조되었다.
@장코뱅 상세한 설명 잘 읽고 참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