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최남단에 우뚝 서 있는 두륜산. 해발 706m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땅끝 기맥의 남단에서 다도해를 굽어보며 우뚝 솟아있는 풍경이 멋있어 해마다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명산이다.
두륜산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골짜기들이 한줄기로 어우러져 '너부내'라는 제법 큰 계곡을 이루는데 이곳에 멋드러진 사찰 하나가 있다. 바로 201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천년고찰 대흥사다. 매표소에서 대흥사 입구까지 길이 유명한데, 거리고 10리(2km)로 꽤 멀어 '십리숲길' 또는 봄날이 오랫동안 머문다 해서 '장춘숲길'로도 불린다. 소나무·벚나무·단풍나무·편백나무 등 해묵은 나무들이 연출하는 10리 숲길은 상쾌하고 정갈하다. 청정한 숲길을 걸으니 몸이 금새 반응한다. 연실 입과 코를 열고 들숨날숨을 크게 쉬며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를 듬뿍 들이 마셨다. 눈이 맑아지고 머리속이 깨끗해진다. 대흥사의 시작이 아주 기분좋다.
호방한 가람배치 속 평온함
사찰에 대한 전문지식이 많지 않더라도 대흥사에 도착하는 순간, 사찰의 배치가 특별하고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우선 일반적인 사찰에 비교해 규모가 꽤 크다. 보통 사천왕을 지나면 중앙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법당들이 'ㅁ'자형의 경내를 둘레로 배치되어 있다. 법당 뒷편으로 깊숙이 암자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눈에 다 들어올만한 구조다.
하지만 대흥사는 그 크기가 상당해 위용이 넘친다.
규모가 상당하다보니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어진다. 하지만 규모가 크더라도 당우 사이사이에는 낮은 돌담과 오래된 노송들이 놓여있어 위용이 넘치면서도 아늑함이 느껴진다.
사찰 뒷편에 두륜산 자락까지 병풍처럼 더해지니, 마치 조선시대 산수화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진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나에게 국내 답사여행의 가장 큰 묘미는 이렇듯 자연과 어우러져있는 사찰에 있다. 산속 사찰은 주로 동북아시아 국가들에 많은데, 그러면서도 우리 사찰은 중국와 일본과는 또 다른 풍취와 기품이 담겨있다. 자연을 방해하지 않는 겸손함, 욕심부리지 않은 소박한 우리 사찰의 분위기가 좋다. 국내를 여행하며 이렇듯 멋진 사찰을 마주할 때면 늘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흥사는 유물들을 살펴봤을때 신라말 고려초에 창건됐다는 게 정설이다.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의 마애불(국보 제308호)와 삼층석탑(보물 제301호)가 모두 나말여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조용한 사찰있던 대흥사가 유명세를 떨친 건 서산대사의 유언 부터였다.
서산대사는 지리산, 묘향산, 금강산 등을 다니며 불법을 닦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흔살이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승병을 모아 일본군에 맞서 싸운 승려다.
그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제자 사명당과 처영스님에게 자신의 의발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영정 뒷면에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80년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나와 너는 구분할 수 없는 존재라는 노승의 마지막 가르침이 500년 뒤에 대흥사를 찾는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전해진다.
초의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인연
대흥사에서 서산대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초의스님이다.
초의스님은 대흥사에서 40여분쯤 걸어가는 산중턱에 일지암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는 종교로서 불교의 굴레를 벗어 학문으로서 선교를 연구하고 유학과 도교에까지 지식을 넓혀갔다. 당대의 학자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김정희는 평생지기라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고 또 초의가 보내주는 차 마시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자주 보냈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없고
다만 두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게 좋을거요.
근엄한 문체로 적혀있지만, 추사가 얼마나 초의스님의 차를 간절하게 원했는 지 그리고 차 배송이 늦어지는데 서운해하는 마음까지 적혀있다. 이렇듯 서스름없이 편지를 보낼 정도로 그들은 막역한 사이였다.
실제로 추사는 제주도 귀향길에 내려갈때나, 귀향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 또한 초의스님도 추사 유배기간 중 제주도에 내려가 6개월간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대웅보전에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데 여기에도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대흥사에는 동국진체라는 조선고유의 서체로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있었다. 제주도 귀양길에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는데, 추사는 현판 글씨를 보며 호되게 비판했다. 초의는 결국 추사의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고 추사의 글씨를 달게 된다.
햇수로 9년이 지나 드디어 유배생활을 끝난 추사는 서울로 올라가며 다시 대흥사를 찾았다.
그리고 추사는 말했다.
"옛날에 내가 귀양가면서 떼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이 어디있나? 있으면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땐 내가 잘 못 보았어"
긴 귀양살이 동안 추사는 포용력과 넓은 사상을 가진 대학자로 변모했다.
그 덕분에 여행자들은 대흥사에서 조선시대 두 명필의 글씨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이 생긴 셈이다.
초의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