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어빵과 아메리카노
정현수
어제, 고질적 귓병을 치료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이비인후과를 찾았다. 동네 의원의 약이 신통치 않아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다. 오랜만에 시내에 나간 나들이 겸 볼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30여 분을 걷는 길은 묘한 때와 의미를 한 곳에 모은 것 같은 정해진 곳을 가는 느긋하고 거리낌 없다. 비 온 후 맑은 하늘은 파랗다 못해 두려움 없는 사랑의 깊이가 뚜렷한 것 같다. 그 엄연하고 고귀한 맑음은 어떤 변화, 흐트러짐이 없이 나에게 가슴 뭉클한 친밀감을 준다. 다리 위를 지날 때 꽤 넓은 내(川)의 흐름은 대답 없는 사랑을 품은 듯 무심히 흐른다. 스미듯 불어오는 내 얼굴에 실바람이 스친다. 순간 상쾌함이 다가오고 선한 세상과 마주한다.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서 흐르는 물을 보니 주위 자연의 섬세하고 경이로움이 차분하게 다가온다. 개천 위 창공을 나는 새는 우아하게 공중을 가르고 멀리 산은 아직 푸르러 생기를 감싸 더 신비롭다. 청승일까 미련일까, 넓은 풍광을 바라보니 과몰입이 되는 것 같다. 새삼 느긋해지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초침이 째깍거린다고 바삐 뛰지 말자 하는 마음이다. 째깍거리는 소리를 삶의 절대 가치라 생각 말고 그저 저쪽 한편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라 느껴봄은 어떠한가? 이 모든 서정(抒情)은 아직 들판에 숨어 있는 차가운 냉이가 가슴이 따뜻하고 달콤한 달래에게 전하는 사랑 편지라 생각하고 싶다. 변해야 할 녹색과 들판의 황금빛이 의미심장한 무엇과 무엇으로 나를 몽롱하게 한다. 영원히 다시 못 볼 것 같은 찬란한 가을의 시작이다.
오전에 일을 끝낸다 하고 왔는데 좀 느긋했나, 도착하니 점심시간이다. 2 시에 다시 개원한다니 난감하다. 상당한 시간을 허비할 것 같다. 오갈 데 없는 처지이다 보니 도리 없이 밖으로 나와 서성이다 거리 한 귀퉁이의 붕어빵 노점상이 있다. 이참에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아침을 안 먹는 난 4 개를 사 한적한 카페로 들어갔다. 쥔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쌈직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난생처음 먹어보는 붕어빵의 맛은 별 특이한 맛이 아닌 평범한 맛이었다. 붕어빵의 노릇한 자태는 길거리를 다니면서 항상 보았던 터였다. 됨직해 쫀득쫀득한 맛이 아닌 달 직한 팥 맛과 말캉말캉한 밀가루 반죽 맛이다. 붕어빵의 달콤한 맛과 커피의 중후한 맛이 깃든 유쾌함을 입안에 담아 그 맛을 기분 좋게 느껴보고 싶었는데 생각 따로 맛 따로였다. 붕어빵은 그냥 풀빵이었고 먹은 후에 가슴에 뭉쳐 있듯 단맛 만 농후했다. 어딘가 모자란 미숙함이 역력한 맛이다. 난 항상 은은한 계피 향이 혓바닥을 간질이고 입 천장에 노니는 그런 맛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저 그런 맛이다. 원래 먹는 맛이란 일 차로 혀로 느끼고 다음엔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 맛을 못 느끼고 아무렇게나 지나쳐버림은 쓴웃음이 가득함 만 남는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표현과 구김살 없는 천진난만한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붕어빵을 만듦은 어떨까?
다행히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내 입맛에 딱 맞는 커피의 맛이었다. 마치 내 기억 속에 잠재되어 어느 순간 튀어나와 나를 한가로움에서 깨우 듯 산뜻하게 입안에 머금는 편안한 맛이다. 혓바닥에 노닐 때 아련한 신맛과 향수에 젖을 듯한 쌉쌀한 맛은 순수하고도 부드러웠다. 가끔 밖에서 커피를 마실 때 그냥 아무 맛도 못 느낄 때가 많았지 만 이 커피 맛은 특별했다. 커피의 참 맛을 조금 아는 나는 이 맛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아니 행복할 수가 없다. 21 년째 집에서 생두를 수망에 정성스레 볶아 티를 거른 뒤 마시는 완전 수제인 따뜻한 커피는 지금 내가 쓰는 글의 원천이다. 나에겐 기계로 빼는 신물물의 커피 기계는 아예 없다. 항상 커피를 내릴 때 이번 커피 맛은 어떨까 하는 마음이 궁금하기도 하다. 그 카페에서 마신 아메리카노는 그만큼 신선하고 내 입맛에 딱 맞았다. 그 카페를 나올 때 커피의 맛이 훌륭했다는 평가를 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붕어빵과 아메리카노의 두 가지의 시퀀스가 하나로 엮어져 맛있게 품어 저 에피소드가 풍부해야 하는데 내 상상을 깨버리고 말았다. 난 완벽주의자는 아니지만 인생이든 음식 맛이든 참 맛을 느끼려 노력한다. 내 인생의 맛은 나에게 국한되어 의미를 부여하지 만 붕어빵 맛이든 커피 맛은 나를 떠난 누군가가 이끌어야 할 책임이다. 기업이든 구멍가게든 우리 사회에서 같이 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그대로 들어내지 않고 적당히 감추고 포장한다는 건 자신을 위장하는 것이다. 붕어빵과 아메리카노, 제목 글의 어울림은 정 반대인 듯한데 어희는 제법 잘 어울려 재밌는 뉘앙스를 준다. 늘 환희와 함께하고 따스한 온화함이 있는, 막막 다가오는 저 하늘의 길목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느끼고 있다.
2024. 10.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