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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혁명의 여명
20세기 후반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정보통신 분야에서의 놀라운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에 유럽과 특히 미국인들 역시 정보통신 분야에 있어서의 혁명적인 변화를 느꼈었다.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은 빛과 소리와 같은 전통적인 정보 전달 수단 이외에 전기를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즉 전신을 창안해 내었다.
이 전신을 이용해서 사람들은 주식의 변동, 시장 가격의 변동, 열차 출발 시간, 정치적 사건, 전쟁 소식 등 멀리 있는 곳의
소식을 과거에는 상상도 못하던 빠른 속도로 전달받을 수 있게 되었고, 당시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 혁명적인 변화였다.
모스의 전신
전기를 이용한 전신의 초기 역사
전기를 이용해서 신호를 전달하려는 전신 은 이미 갈바니 ( Luigi Galvani )와 볼타 ( Alessandro Volta )가 동전기를 발견
하면서 그 가능성이 엿보였다.
1809년 독일의 폰 죄머링 (S.T. von Soemmerring, cf. 1 , 2 , 3 , 4 )은 전기가 용액을 통과할 때 거품이 생기는 것을 관찰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알파벳을 전달하는 전신 장치를 고안해 내었다.
이때 그는 26개의 전선을 이용해서 약 3킬로미터까지 알파벳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기분해를 이용한 그의 전신 장치는 당시에는 이용가능한 전기 부품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경제성이 없어 실용화
되지는 못했다.
1820년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던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자침의 회전에 미치는 새로운 전자기 현상을 발견했다.
외르스테드의 이 놀라운 발견은 곧 프랑스의 과학자 앙페르 ( André Marie Ampère )에 의해서 확인되었는데, 이후 많은
사람들이 자침을 이용해서 신호를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1833년 독일의 유명한 수학자 프리드리히 가우스 는 그의 조수였던 물리학자 빌헬름 베버와 함께 자침을 이용한 전신
장치를 발명했다.
그들은 두 개의 구리 전선을 이용해서 약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실제로 통화를 해보기도 했다.
1837년 영국의 쿠크 (W.F. Cooke) 와 휘트스톤 (Charles Wheatstone)은 5 개의 자침을 이용해서 알파벳을 전송하는
전신기를 창안해서 특허를 출원했다.
쿠크와 휘트스톤이 창안한 방식은 곧 영국의 철도 회사에서 채용되었고, 이후 이들의 전신은 영국의 전신 방식을 지배
하게 된다.
이들이 만든 최초의 전신 장치는 죄머링의 장치와 마찬가지로 여러 개의 전선을 이용해서 신호를 전송하는 병렬 데이터
전송(parallel data-communication) 방식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병렬 전송 방식은 곧 비용 문제와 부딪히게 되었고, 자침의 수는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하나의 자침만을
사용하는 체계로 변하게 된다.
이로써 자침 전신기는 최초의 직렬 데이터 전송(serial data-communication) 장치로도 기록되게 되었다.
모스의 전신
영국의 쿠크와 휘트스톤의 자침 전신기보다도 19세기 전신의 혁명에 더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은 1837년 미국의 저명한
화가였던 모스 ( Samuel F. B. Morse , cf. 1 , 2 , 3 , 4 )가 특허를 출원한 전신기였다.
모스는 1832년 유럽으로 여행하던 중 배 안에서 보스턴의 화학자 잭슨(Charles T. Jackson, cf. 1 , 2 )에게서 앙페르의
전자기 실험과 전기의 속도가 전선의 길이에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이것을 통신에
이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많은 화가들이 발명가로서도 활약했는데, 모스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개념 설계를 마치 미술품을
제작하는 식으로 해나갔다.
또한 화가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듯이, 모스는 자신의 기계 작업실에서 전신기라는 발명품을 고안하고 개량해
나갔던 것이다.
모스의 발명에 영향을 준 사람들
모스의 전기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빈약했지만, 그는 예일 칼리지를 졸업하고 뉴욕 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뉴욕의
과학자들과 연결을 맺을 수 있었다.
우선 모스는 자신의 대학 동료이며, 화학, 지질학, 광물학 교수였던 레오나드 게일로부터 전기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무엇보다도 게일은 전자석을 이용해서 전신기를 창안했던 조지프 헨리 ( Joseph Henry ) 의 작업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조지프 헨리는 1831-2년에 이미 건전지, 전도체, 전자석 등을 이용해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력을 전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했었다.
전자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헨리는 전신에 관한 기본적인 장치를 창안해 내었지만, 그는 이것을 더욱 진척시켜서 특허
로 출원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이미 1832년 잭슨으로부터 앙페르의 전자기 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것을 전신에 이용해보려고 생각하고
있던 모스는 헨리와는 달리 헨리의 실험에 대한 정보를 게일로부터 얻은 뒤에 이것을 더욱 개량해서 마침내 전신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게 된다.
알프레드 베일의 역할
모스는 기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기계공 출신의 알프레드 베일(Alfred Vail)의 도움을 얻어 전신에 필요한 기계를 제작할 수 있었다. 모스의 발명품이라고 하는 전신은 사실 상당히 많은 부분은 베일이 개량한 것이었다.
베일은 1844년까지 수신기를 다양한 시계 기술을 이용해서 단순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송신 장치도 놀랄 만큼 간단하게
개량시켜 놓았다.
심지어 오늘날 '모스 부호'라고 부르는 기본적인 통신 코드도 실제적으로는 대부분 베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베일의 몫이 아니라 최초의 창안자였던 모스의 업적으로 돌아가 버렸다.
베일은 단지 모스를 도운 보조자로서만 사람들에게 알려졌던 것이다.
모스 체계의 확산
모스는 자신의 전신 체계를 확산시키기 위해서 의회의 도움을 얻어내려고 노력했다.
당시 미국의 의회는 전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전신의 군사적 이용 가능성과 연방 우편체제의 한 방편으로 전신이 유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의회의 협조를 얻는데 성공한 모스는 1844년 5월 24일 마침내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서 전신 사업을 시작했다.
전신이 지니는 공공성 때문에 모스의 발명은 연방 정부에 의해서 구입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잭슨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연방정부의 힘을 될 수 있으면 제한하고, 대신 사기업과 개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모스는 자신의 발명품으로 개인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모스는 전신의 발명자라는 명예와 함께 부도 함께 누리게 된다.
경쟁과 발전
모스의 전신 체계는 몇몇 사기업들이 이 체계를 채용하게 되면서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버팔로 등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하지만 전신이 연방정부가 아닌 사기업에 의해서 주도되면서 개인의 창의력이 진작되었고, 이에 따라 전신에 대한 새로운 발명품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즉 전신 사업이 확대되면서 모스의 전신체계 이외의 새로운 발명품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모스 전신 체계의
독점을 견제하는 치열한 경쟁 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런 치열한 경쟁 체계 속에서 전신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하우스와 베인의 전신체계
모스의 전신 체계에 도전한 전신 체계 가운데 하나는 뉴욕의 발명가 하우스(Royal E. House)가 특허를 출원한 인쇄형 전신 체계였다.
이외에도 영국에서 전신 체계로 특허를 낸 휘트스톤과 협력해서 창안해낸 베인 (Alexander Bain) 의 전신 체계도 새롭게
등장했다.
금속 드럼 위로 천공된 종이를 통과시키는 방식 의 베인의 자동 전신 체계는 모스 체계와 특허 침해 문제를 놓고 법정 공방까지 했지만, 1853년 모스의 사업자들이 베인 체계 사업자들을 지배하게 되면서 싸움은 하우스 체계와 모스 체계와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모스 체계 사업자들은 하우스 체계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체계가 지닌 기술적 장점을 더욱 극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우스의 인쇄형 전신은 속도는 빨랐지만 장치가 너무 복잡해서 원거리 통신에서는 모스 장치에 비해 신뢰도가 떨어졌다.
185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모스 체계는 종이 테이프로 수신하던 방식을 음향기(Sounder)로 대체하는 기술적 진보를 이룩
했다.
그 결과 통신 속도가 놀랍게 향상되었으며, 착오율도 상당히 줄어 들었다. 또한 음향기에 의한 체계는 가격면에서도
하우스의 인쇄형 전신 체계에 비해서 유리했기 때문에 마침내 하우스 전신 체계를 압도하게 된다.
결국 모스 전신 체계는 하우스의 전신 체계를 비롯한 여러 경쟁 체계들을 누르고 미국의 전신체계를 지배 하게 되었으며,
19세기 정보통신 혁명의 핵심적 발명품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벨과 그레이의 전화 발명
오늘날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잡은 전화는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 ( Alexander Graham Bell , 1847-1922.
cf. 1 , 2 , 3 )과 엘리셔 그레이 ( Elisha Gray , 1835-1901, cf. 1 )에 의해서 거의 동시에 발명되었다.
1876년 2월 14일 그레이는 벨보다 조금 늦게 특허를 신청했는데, 이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간발의 차로
엄청난 기회를 놓쳐 버린 극적인 사건으로 자주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발명에 얽힌 실제 내막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레이의 발명가로서의 전력
이라이서 그레이는 1835년 오하이오 주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1865년부터 전문적인 발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전화를 발명하게 되는 1870년대에는 이미 전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발명가로 성장해 있었다. 1
874년 경 그는 욕조를 이용한 실험으로 통해서 처음으로 소리를 전류로 바꾸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런 착상을 더욱 발전시켜서 바이올린의 음을 전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바이올린 수신기'를 창안해 내었다.
더나아가 그는 그해 5월 금속 진동판으로 이루어진 전자기 수신기를 제작했고, 이것에 대한 특허까지 출원했다.
당시 그레이는 바이올린 수신기를 착안하는 과정에서 만든 이 금속 진동판 전자기 수신기가 음악 전신기, 다중 전신, 음성 전신 등에 모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1874년 그레이가 전신 관계자들 앞에서 자신의 발명품에 대해서 시범을 보였을 때, 그들은 그레이의 발명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즉 전신 전문가와 전신 관련 잡지사 편집인 들을 비롯한 당시의 전신 전문가들은 그레이가 발명한 '전화'가 음악과 음성을 전달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단지 아주 흥미로운 과학적 창안품일 뿐이지 직접적인 실용적인 응용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를 단지 재미있는 장난감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웨스턴 유니언 회사를 비롯한 주요 전신 회사에서는 발명가들에게 하나의 선으로 여러 모스 신호를 보낼 수 있는 다중 전신을 개발해줄 것을 간절히 원했는데, 이런 전신 관련 분야의 요구 때문에 전문적인 발명가였던 그레이는 자신의 발명품을 전화보다는 다중 전신에 활용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한편 그레이가 전화에 관한 기본적인 창안을 해놓고도 이것을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 쪽으로 발전시키지 않고 다중 전신쪽
으로 이용하려고 더 노력하고 있는 동안, 그레이와는 아주 독립적으로 이와 비슷한 장치를 개발해 나가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그레이험 벨이었다.
벨이 전화를 발명하게 된 배경
벨은 소리를 내는 음성 기관의 위치와 작용을 나타내는 음성학적 기호를 체계화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에딘버러 출신의 발성법 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발성법 집안에서 자란 벨은 장성한 뒤 자신의 아버지가 개발한 이 '시화법'(visible speech) 체계를 농아에게 발성법을
가르치는 데 에 활용하게 된다. 이리하여 1872년 그는 농아에게 발성법을 가르치는 학교를 보스턴에 개설했고, 자신도 그곳에서 강사로 있다가 1873년에는 보스턴 대학의 음성 생리학 교수가 되었다.
발성법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벨은 헤르만 헬름홀츠의 음성과 감각에 관한 실험에 대해 공부한 뒤 조화 단진동을 합성해서 복합 모음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조화 전신기를 고안해 내었고, 1875년 4월 6일 벨은 다중 전신 에 관한 특허까지 신청했다.
이 조화 전신기와 다중 전신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벨은 전화를 발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벨은 기계 제작에는 아주 문외한이었지만, 기계 수리공이며 모형 제작자였던 토머스 왓슨 의 도움으로 음성을 전기적으로 전달할 때 필요한 기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벨이 도움을 주던 농아 메이블 허버드(Mable Hubbard)의 아버지로부터 이런 기구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전화 발명을 마친 뒤인 1877년 벨은 10년 연하인 이 메이블 허버드와 결혼했다.)
벨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던 허버드도 처음에는 그레이와 웨스턴 유니언의 관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화의 실용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었고, 오히려 벨이 다중 전신에 더 많은 비중을 두기를 원했다 .
하지만 농아에게 말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많았으며 전신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전문가였던 벨은 다중 전신보다는 음성을 전달하는 전화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5년 6월 음성을 전기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판단한 벨은 그해 9월부터 전화에 대한 기본적인 착상을 하기 시작 했다.
마침내 그는 1876년 1월 20일 전화에 대한 공증을 마치고 2월 14일에 특허를 신청해서 1876년 3월 7일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전화 특허 를 받게 된다.
벨과 그레이 사이에 특허 소송이 생기게 된 배경
벨이 전화로 특허 를 신청한 날인 1876년 2월 14일, 그레이 역시 아주 독립적으로 전화에 대한 ' 특허권 보호 신청 '(caveat)을 특허국에 냈다.
하지만 그레이는 전화의 실용적 가능성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발명 특허권 보호 신청을 낸 뒤 한가하게도 자신의 재정적인 후원자와 곧 있을 박람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그레이는 벨이 사용한 가죽막보다 더욱 효율적이었던 금속 진동막을 이용해서 음성을 전달했기 때문에 기능면에서는
그레이의 특허품이 벨의 특허품에 비해서 우수했다.
더 나아가 그는 전화에 대한 특허를 내기 이전에 이미 가변저항을 이용해서 음성을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는데, 벨이
자신의 두 번째 특허를 낼 때 이 가변저항을 이용한 방법을 끼워 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
3월 10일 그레이는 가변저항을 이용해서 음성을 실제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고, 그해 6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에서 벨과 함께 전화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전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단지 장난감 수준 정도의 흥미있는 물건 취급을 받았다.
그레이 역시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벨은 반대로 계속 자신의 전화를 개량·발전 시켜 나갔다.
두번째 특허1877년 벨은 웨스턴 유니언 회사에 자신의 특허를 10만 달러에 팔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웨스턴 유니언 회사는 벨의 발명품보다는 그레이, 에디슨 등의 특허를 구입했다.
웨스턴 유니언 회사는 전화보다는 다중 전신에 더 많은 실용화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1877년부터 토머스 에디슨이 탄소 저항을 이용한 송화기 (cf. 1 , 2 , 3 ) 특허를 얻는 등 전화를 실용화 하는 데 필수적인 몇몇 발명들이 이어졌다.
결국 사람들은 전화가 단지 장난감이 아니라, 전신을 대체할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벨 회사와 웨스턴 유니언 회사 사이에는 그 뒤로 오랫동안 진행될 역사적인 특허 소송이 벌어지게 된다.
오랜 소송 끝에 웨스턴 유니언 회사는 전화 대여로 벨 회사가 얻는 이익의 20%를 챙기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전화에 대한
권한을 포기했고, 결국 전화 사업은 벨 회사에 의해 주도되게 된다.
전문가보다 비전문가에게 유리했던 발명
실용적인 전화 체계 를 개발한 뒤 벨은 판매와 기술 개발은 다른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 자신은 다시 자신의 본업이었던
음성학과 농아 교육 분야로 돌아가게 된다.
즉 그는 미국 농아 발성 교육 진흥 협회 창설·육성했으며, 농아의 유전적 유형에 관한 연구하는 등 전신·전화에 관한 발명
보다는 자신의 전문 분야였던 음성학 분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반면에 그레이는 1880년 오하이오 주 오버린 칼리지 의 동전기학 교수 가 되었고, 평생을 전신 분야에서 전문적 발명가로
활동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레이는 전신 분야의 전문가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전신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아마추어 발명가였던 벨에게 전화 발명의 주도권을 놓친 셈이 되고 말았다. 전신 분야의 전문적 발명가로서 그는 웨스턴 유니언 회사를 비롯한 전신 분야 종사자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으며, 또한 벨에 비해 자신의 재정적 후원자들의 요구에 더 얽매일 수밖에 없었다. 전화의 발명에 얽힌 이 극적인 일화는 독창적인 발명품을 창안·개발하는 데에는 전문가들보다 오히려 비전문가가 유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무선 방송의 시작: AM과 FM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전성 시대를 맞이하여 무선 전화에는 디지털 방식인 펄스-코드 변조(Pulse-Code Modulation)를
채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시분할 다중 접속 방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새로운 코드 분할 다중 접속 방식까지 등장해서 바야흐로 휴대용 무선 전화 시대가 바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디지털 무선 전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우리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성을 무선으로 전달했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진폭 변조(Amplitude Modulation)와 주파수 변조(Frequency Modulation)라는 기술이었다.
페슨던(Reginald Fessenden, 1866-1932)
모스의 전신이 벨과 그레이의 전화 발명으로 이어졌듯이, 마르코니와 브라운 이 발명한 무선 전신은 곧바로 라디오와 무전기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무선 전신이 발명된 이후 처음으로 음성을 전파에 실어 보내는 데에 성공한 사람은 미국의 무선공학자였던 페슨던 ( Reginald Fessenden , 1866-1932)이었다.
1892년부터 퍼듀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웨스턴 대학(현재의 피츠버그 대학)에서 전기공학 교수로 재직하던 페슨던은 1900년 에서 1902년까지 미국 기상청의 특수 요원으로 일하면서 일기예보와 폭풍 경보에 적합한 무선 전신 체계를 개발했다.
이때 그는 전기분해를 이용해서 매우 감도가 좋은 탐지기를 발명했는데, 이 고감도 탐지기가 곧이어 그가 개발한 50,000
헤르츠의 고주파 발진기와 헤테로다인 수신기 등과 결합되어서 전파로 음성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2년 페슨던은 피츠버그 금융업자들의 후원으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개발시킬 회사를 설립했다.
그 뒤 8년동안 이 회사에서는 수많은 발명품을 개발하게 되는데, 1906년 크리스마스 전날 페슨던은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가 제작한 1kW의 발전기(cf. 1 , 2 , 3 )를 이용해서 처음으로 음성과 음악을 전파에 실어 공중으로 날려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매사추세츠 주의 브랜트 록에 위치한 그의 송신소에서 보낸 신호는 많은 지역에서 분명하게 수신되었고, 심지어는 바다에 떠 있던 배에서도 수신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때 이용했던 음성 전달 방식이 바로 진폭 변조(AM) 방식이었던 것이다.
페슨던이 관계했던 회사는 이 발명품으로 미국 마르코니 회사를 능가하는 국제 통신망을 구축해 나가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페슨던과 재정적 후원자들 사이의 불화가 생기면서 끝내는 회사가 파산해서 수포로 돌아갔다.
디 포리스트(Lee de Forest, 1873-1961)와 에드윈 암스트롱(Edwin H. Amstrong, 1890-1954)
페슨던이 고안한 무선 음성 전달 기술은 곧이어 나타나는 진공관의 발명과 연결되면서 놀라운 기술 진보를 이룩하게 된다.
1906년 미국의 디 포리스트 ( Lee de Forest , 1873-1961, cf. 1 )는 3극진공관( Audion )을 발명했다.
디 포리스트는 당시 3극 진공관을 증폭관으로 이용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곧 이 3극 진공관의 특허는 AT&T에 의해서 구입되어 장거리 전화를 가능케 하는 증폭관으로 개발되게 된다.
진공관의 발명과 함께 이 당시에 급속도로 발전하던 전기 회로 기술도 무선 방송 및 무전기의 출현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13년 미국의 발명가 에드윈 암스트롱 ( Edwin H. Amstrong , 1890-1954, cf. 1 ) 은 출력 신호의 일부를 다시 입력 부분으로 되돌려서 다시 증폭함으로써 수신기의 감도를 놀랍게 향상시키는 되먹임 회로 (feedback circuit)로 특허를 출원했다.
진공관 기술과 전기 회로 기술을 비롯한 전자 공학의 발전에 힘입어서 페슨던이 고안했던 진폭 변조 기술은 마침내 무선
방송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지게 된다.
1920년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 회사는 15kW의 출력으로 일일 음악 방송을 송출했으며, 1922년에는 영국의 BBC 사가 최초의 정규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라디오 방송 기술과 관련된 수많은 기술은 특허권을 둘러싼 끊임없는 법정 소송과 함께 발전했다.
우선 에드윈 암스트롱이 출원한 되먹임 회로 기술은 삼극 진공관을 발명한 디 포리스트가 고안했던 기술과 비슷해서
논란의 여지 가 있었다.
1922년 뉴욕의 순회 재판소는 당시에 AT&T의 후원을 받고 있던 디 포리스트가 웨스팅하우스 회사의 지원 을 받고 있던
암스트롱의 되먹임 회로를 침해한 것을 발견했다.
이때 암스트롱은 거의 파산 직전에 있었던 디 포리스트를 상대로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는 소송을 제기했다.
암스트롱에게는 돈보다도 발명의 우선권과 관련된 자존심이 걸린 소송이었다.
하지만 곧 디 포리스트 측은 암스트롱의 소송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암스트롱이 특허를 출원하기 이전인 1912년 8월에
디 포리스트가 작성한 되먹임 회로에 대한 착상이 담긴 공책을 제시하면서 사태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34년 미국의 대법원은 암스트롱이 1913년에 출원한 되먹임 회로의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유사한 생각이
디 포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개발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소득 없는 소송으로 자존심만 더욱 상하게 된 암스트롱은 되먹임 회로를 발명한 공로로 미국 무선공학자 협회 ( Institute
of Radio Engineers , cf. 1 )로부터 수여받은 메달까지 반납해 버렸다.
암스트롱의 FM 발명
되먹임 회로 이외에도 암스트롱은 1933년 라디오 방송 기술의 역사에 길이 남을 또다른 획기적인 발명을 해내었다.
그때까지 방송에서 사용하던 진폭 변조 방식은 여러 곳에서 도달하는 전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서 서로 혼신이 되거나
잡음이 생기고, 시간에 따라 세기가 달라지는 등 불안정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진폭 변조 방식의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잡음이 거의 없는 고감도의 새로운 변조 방식을 창안 해
내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스트레오 라디오 방송에서 주로 이용하는 주파수 변조(FM) 방식이었던 것이다.
1935년 11월 암스트롱은 미국 무선공학자 협회에서 FM 방식 을 극적으로 대중앞에서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발명품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고감도 방송으로 FM의 효율성이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굴지의 무선장치 제조 회사였던 RCA (Radio Corporation
of America)와 그 회사 소유로 미국의 대표적인 방송사였던 NBC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에서는 암스트롱의 발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AM 방식으로 많은 투자를 해 놓은 RCA로서는 새로운 체계가 비록 몇몇 부분에서 우수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채택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RCA의 미온적인 반응에 참다 못한 암스트롱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암스트롱이 혼신의 노력 을 경주한 결과 기존의 거대한 AM 방송사와는 독립된 군소 방송 업체에 의해 FM 방송이 하나둘
씩 시작되었고 , 이에 따라 FM 수신 장치의 수요도 급증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 RCA는 FM 방송 체계보다는 새로운 방송 매체인 텔레비전 방송에 더 많은 열을 올렸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보다 많은 FM 주파수대를 얻어내려는 암스트롱과 AM 방송과 텔레비전을 지지하던 RCA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정면 대결이 벌어졌다.
RCA 측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던 연방 통신 위원회에서 그 때까지 FM 방송에서 사용하던 50 메가헤르츠 주파수대를
현재 우리의 FM 방송도 사용하고 있는 88-108 메가헤르츠의 새로운 주파수대로 옮기고, 이 비게 된 주파수대에 RCA가
선점한 텔레비전 방송 주파수가 들어설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전쟁 이전에 만들어진 수많은 방송 시설과 수신 장치들은 무용지물이 되게 되었다.
연방 정부의 결정에 의해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암스트롱은 곧 새로운 주파수대를 차지하려고 노력했지만, 대기업과의
싸움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주파수대를 쟁취하기 위한 RCA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암스트롱은 1948년 RCA와 NBC이 자신의 FM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954년까지 계속된 지리한 소송으로 그는 육체적으로 지치고 재정적으로 파산하여, 마침내 뉴욕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10층 아래로 투신해 자살 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미망인은 암스트롱 생전에 암스트롱에게 대기업과의 법정 소송이 무모하다는 것을 충고했던 암스트롱의 친구의 권유에 따라 RCA와 백만불에 합의함으로써, FM을 둘러싼 암스토롱과 RCA와의 법정 소송은 막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