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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동’. 2004년 2월 3일.
대전시 ○○동의 한 가정집에 초인종이 울렸다.
집주인인 최경자 씨(가명)가 무심코 문을 열었을 때 대문 앞에는 한 어린 여자아이가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허름한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삭발까지 한 아이는 어찌나 행색이 초라한지 거리의 거지를 방불케 했다.
누가 봐도 ‘어린 애가 길을 잃었나?
집을 잘못 찾았나보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최 씨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소녀의 입에서 불쑥 “엄마…”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2년 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잃어버리고 그때까지도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던 최 씨에게는 놀라 소스라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 씨가 자신을 못 알아보는 듯하자 소녀는 엄마, 나야… 나래야”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서야 소녀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던 최 씨는 잠시 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삭발을 한 채 거지꼴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는 바로 2년 전 실종된 자신의 딸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2년 만에 불쑥 나타난 소녀.
대체 소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번에 대전둔산경찰서 폭력1팀 김용욱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한 어린 소녀를 납치해 노예처럼 부리며 앵벌이를 시킨 가짜 승려에 대한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김 팀장은 세상에서 가장 파렴치한 범죄가 바로 심약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라며 아무쪼록 이번 사건에 대한 회고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실종 아동들을 다시 돌아보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우선 소녀가 돌아온 당시 상황에 대한 김 팀장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적이 따로 없었다.
생계조차 내팽개치고 2년간이나 딸을 찾아다니던 소녀의 부모는 당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죽은 줄로 알았던 딸이 2년이란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왔으니 부모 심정이 어땠겠는가.
직접 보고서도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게다.
실제로 박 양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딸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가 몰라보게 훌쩍 자라있었을 뿐 아니라 외모도 실종 당시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또 행색이 초라한 데다가 삭발까지 한 터라 언뜻 봐서는 그렇게 찾아다니던 딸이라고 도저히 여길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사건은 지난 2002년 1월 23일 오전 9시 반경. 대전시 ○○동에 살던 초등학생 박나래 양(가명·당시 9세)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사건 당일 박 양은 미술학원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학원이 끝날 시간이 지나도 박 양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저녁이 돼도 박 양이 귀가하지 않자 불길한 예감을 느낀 박 양의 부모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다음은 김 팀장의 얘기.
아이 부모의 얘기로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박 양이 스스로 가출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에 불과하던 박 양이 가출까지 할 이유가 뭐가 있었겠는가.
어린 나이지만 반듯한 품성을 지니고 있었던 박 양은 그동안 부모 속 한 번 썩인 일이 없던 착한 아이였다.
박 양이 누군가의 유혹에 빠져 부모를 속이고 다른 곳에 갔을 리도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도록 박 양은 나타나지 않았다.
실종 당일 이후 소녀를 봤다는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어지는 김 팀장의 얘기.
수사팀은 납치나 유괴 등 범죄연루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
유괴나 납치의 경우 시간을 끌수록 아이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박 양이 이동했을 현장 주변에 대한 수색을 하는 한편 박 양을 알고 있는 이웃들은 물론 박 양의 부모와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였다.
또 금전이나 치정, 단순 원한에 의한 보복범죄 등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 다각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인물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오전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박 양은 단 한 명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증발’해버린 것이었다.
특히 보통 납치·유괴범의 경우 가족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를 하게 마련인데 박 양의 집으로는 단 한 건의 협박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했다.
이는 박 양이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 양을 납치한 누군가 범행 당일 우발적으로 박 양의 목숨을 해쳤을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박 양이 여자아이라는 점에서 여아의 성을 노린 변태성욕자나 정신병자, 악질 성범죄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었다.
수사가 길어질수록 가족들의 피는 말라갔다.
사건의 조기 해결에 자신감을 보였던 수사팀 역시 막막하긴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수사팀은 5000장이 넘는 전단지를 시내 전역에 배포하는 동시에 어린이를 상대로 한 범행전력이 있는 동일수법 전과자 및 최근 출소자 등을 상대로 탐문 수사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양의 행적은 어디서도 드러나지 않았다.
박양의 생사조차 알 수 없는 답답하고 불안한 날들이 계속됐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도 ‘박나래 양 실종사건’은 지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런 박 양이 실종된 지 2년 만에 자기 발로 자신의 집에 찾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왔을 당시 박 양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 양은 무언가 심한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부들부들 떨거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깜짝깜짝 놀라는 등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도대체 2년 동안 박 양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얼마 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박 양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다음은 김 팀장의 얘기.
박 양의 말에 따르면 사건 당일 오전 미술학원을 가는 길에 스님 행색을 한 중년남성이 갑자기 뒤에서 칼을 들이밀더라는 거다.
옴짝달싹 못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에게 납치된 박 양은 그가 사는 빌라로 끌려가 쇠사슬로 묶인 채 사흘간이나 감금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범인은 박 양의 머리를 깎은 후 승복을 입히고 뜬금없이 ‘동자승 교육’을 시켰다는 것이다.
반항할 경우 심한 욕설과 구타가 이어졌기에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범인이 박 양을 동자승으로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범인은 박 양을 데리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강제로 앵벌이를 강요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김 팀장의 설명.
범인은 박 양으로 하여금 길거리에서는 물론 가정집을 방문해서 자신이 직접 그린 달마도와 부적 등을 팔게끔 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 두 사람은 부녀지간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할 만큼 상당한 나이 차이가 났지만 영락없는 스님과 동자승 행색을 한 탓에 아무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 동자승에게 사람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고 동정심에 선뜻 그림을 사줬다고 한다.
달마도와 부적 등은 보통 1만~2만 원에 팔렸는데 어떤 사람은 10만 원도 주고 그랬나보더라.
박 양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팀은 즉시 범인에 대한 추적에 나섰다.
하지만 전국을 돌아다닌 탓에 박 양은 범인과 거주했던 동네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사실은 박 양이 “버스를 탔던 곳이 김해였던 것 같다.
흰색 대문이 있는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고 기억을 떠올린 점이었다.
다음은 김 팀장의 얘기.
막상 김해로 내려갔지만 범인의 행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박 양이 기억하고 있는 골목길의 풍경과 ‘흰색 대문집’이라는 단서만으로 범인이 거주한 집을 찾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범인의 특성으로 보아 범인이 김해에 머무르고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범인이 자기소개를 곁들인 유인물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며 달마도와 부적 등을 팔아온 정황을 알아냈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범인이 분명 유인물을 다량 복사하기 위해 인쇄소를 방문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김해 시내 인쇄소를 샅샅이 뒤진 우리는 범인이 유인물을 맡긴 인쇄소를 찾아냈고 유인물에 나와 있는 승려의 사진을 토대로 박 양에게 확인한 결과 범인이 맞다는 얘기를 들었다.”
조사 결과 범인은 ‘혜철스님’이라 불리던 김필교 씨(가명·52)로 드러났다.
김 씨는 마치 언론사 기자가 ‘고승’인 자신을 직접 인터뷰한 것처럼 유인물을 만들어 신분을 포장하는 데 써왔던 것이다.
그는 유인물에 자신의 사진은 물론 전화번호까지 적어놓고 화려한 거짓 프로필로 사람들을 현혹해 달마도와 부적 등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다른 스님의 승려증을 도용해 승려 행세를 해온 가짜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가 이전에도 초등학교 여학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8년간 복역하다 2001년 9월에 출소한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어지는 김 팀장의 얘기.
수일간의 추적 끝에 수사팀이 김필교가 사는 김해시 △△읍의 집에 찾아갔을 때 집 안에선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더구나 집주인인 노파는 ‘이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은 얼마 전에 이사 가서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
아,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눈치 채고 벌써 다른 곳으로 도망갔구나.
이대로 놓치는건가’라는 생각에 더없이 허탈했다.
그래도 우리는 집 주변에서 당분간 잠복하며 정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복한 지 며칠 만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던 집 안에 김필교의 동거녀로 보이는 여성이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수사팀은 때를 놓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김필교를 찾았다.
하지만 집 안에서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밖에서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
황급히 쫓아 나가보니 지붕 위에 숨어 있던 김필교가 뛰어내려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김필교는 얼마 못 가 수사팀에 검거됐고 조사과정에서 자포자기한 듯 그간의 범행을 털어놓았다.”
김 씨는 박 양을 풀어준 뒤 동거녀와 함께 부부승려 행세를 하고 있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김 씨는 박 양을 납치한 이유에 대해 “혼자 살다보니 외로워서 그랬다” “자식같이 여겨져서…”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출소 후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어린아이를 이용한 범행을 계획하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드러난 김 씨의 범행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을 만큼 잔악했다는 것이 김 팀장의 얘기다.
단지 생계수단으로 미성년자를 납치했다고만은 볼 수 없었다.
미처 성숙하지도 않은 초등학생을 성폭행했던 그의 전력만 봐도 그는 성도착증 기질이 다분한 인물로 판단됐다.
수사팀을 경악케 한 것은 마치 노예처럼 사육당하다시피한 박 양의 생활이었다.
박 양은 낮에는 그림 장사 및 앵벌이를 하는 데 이용됐으며 밤에는 성적으로 괴롭힘까지 당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아홉 살짜리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니었겠나.
그것도 모자라 김필교는 수시로 박 양을 구타하는가 하면 ‘죽여버리겠다’며 무시무시한 협박을 일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 탓에 박 양은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
한때 탈출하려다 잡힌 적이 있었는데 당시 김필교는 박 양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했으며 직접 산으로 끌고 가 ‘묻어버리겠다’며 협박까지 했다고 한다.
특히 김필교는 온몸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주며 박 양을 수시로 위협했다고 한다.
그런 자의 입에서 뻔뻔하게 ‘자식같이 생각돼서…’라는 말이 나오니 어찌나 화가 나던지….”
지옥 같은 생활이 2년이나 계속됐지만 박 양은 김 씨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게끔 현명하게 행동해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서도 박 양은 언젠가 돌아갈 날을 위해 자신의 집과 동네 위치를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에게 동거녀가 생기게 됐다.
김 씨는 박 양의 존재로 인해 애인과의 동거생활이 불편해지자 수개월간 고심한 끝에 박 양을 돌려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박 양을 풀어줄 경우 자신의 범행이 드러날 것을 우려했던 김 씨가 박 양을 순순히 돌려보낼 리 없었다.
다음은 김 팀장의 설명.
김필교는 박 양을 대전행 시외버스에 태우기 전 수차례에 걸쳐 철저히 교육을 시켰다.
나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서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어디서 버스를 탔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마라.
누가 물어보면 경기도 일대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30대 남성과 같이 지냈다고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물론이고 네 가족들까지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경찰에 신고할 경우 반드시 보복하겠다는 그의 말은 김필교의 잔악함을 알고 있는 박 양에게 더없는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박 양은 길고 험한 길을 거쳐 마침내 그리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녀의 마음에 드리워진 악몽의 그림자는 아마도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미성년자 약취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 씨는 법정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