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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인사 나누겠습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날씨가 확 꺾인 게 느껴지시죠? 근데 오늘 일기 예보를 들어보니까 11월달에 한파가 올 수 있다는 그런 예보가 있더라고요. 이제 우리의 인생에 이제 봄여름, 가을 겨울은 사라진 것 같은데 어떻게든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될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자연이 깨어지고 부서진 것을 우리는 느끼면서 어쩔 수 없지 이러고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자연을 살리는 일에 더욱더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한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단락의 내용을 이 시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려고 하는데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께 요한의 앞날을 궁금해하는 베드로에게 답변하신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렸죠. 설령 자신이 재림할 때까지 요한을 이 땅에 살려둔다 한들 내가 상관할 바 아니니 너는 나를 따라라 이런 말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근데 이 말을 잘못 오해를 하면 종말이 올 때까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요한이 살게 하겠다라는 말씀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 문장을 우리가 전체적으로 이해를 하면 이거는 정말 때까지 요한을 살려두겠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고 만약 그를 살려둔다 할지라도라고 하는 가정법으로 이거는 말한 거예요.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3절 상반절에 보면 기가 막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님이 지금 예수님과의 대답을 마친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고 지금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 사이에 헛소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내용은 요한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죽지 않는다. 이거는 예수님이 사실로 말한 진실도 아니고 이것은 자신들이 잘못 이해한 거짓입니다.
근데 그 거짓이 마치 진짜인 줄 알고 퍼뜨렸어요. 근데 이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이 철부지 아이들도 아니고 막 신앙에 들어온 그런 초신자도 아닙니다. 베드로를 위시해서 지금 예수님과 3년이나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들, 심지어 부활을 경험한 이들입니다. 요한복음 21장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내가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로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다시 설명을 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예수님이 제자들 사이에 퍼진 잘못된 거짓 이 소문 그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러면서 이제 사복음서 마지막 요한복음 21장 24~25절에서는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이 짤막한 두 구절이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적 에 대한 기록으로 이 성경이 다 기록한 것이 아니고 사복음서를 마무리하는 총괄적인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사건과 관련된 이 사복음서의 실질적인 마지막 구절은 21장 23절이에요. 그 23절이 무슨 내용이라고요?
제자들이 지금 너희들이 잘못 퍼뜨리고 있는 그 거짓 그런 증언들 그거는 헛소문이야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어
라고 하는 내용으로 요한복음이 마무리된 거예요.
요한복음에서 이어지는 게 바로 사도행전이라고 말씀했잖아요.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그런 행적을 밝혀주는 게 바로 사도행전인데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은 똑같은 사람이 기록한 거니까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이 왜 이렇게 연결됐는가도 조금 우리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을 잘못 이해해서 잘못된 것들을 퍼뜨리고 다녔고 그것들을 정정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했고, 사도행전에서 또 말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겁니다. 교회가 자칫 잘못하면 거짓된 헛소문과 거짓 소문의 진원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경각심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교회는요 건물이 아닙니다. 그렇죠 교회는 우리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모임들이 있는데 그런 모임들 가운데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장소가 저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엄청나게 큰 어떤 기업체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도 자기 파트에 있는 사람들만 주로 알지 다른 파트에 있는 사람들은 잘 모르잖아요.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가정 공동체다. 한문 공동체라고 우리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좀 돌아보고 알아가려고 서로 애쓰고 나아가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몇 명만 아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요. 우리 작은 공동체 같은 경우는 서로서로가 다 알아야 돼요. 우리 하늘 소망 공동체가 서로서로 더 깊이 알아가는 그런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람을 품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어쩌면 세상에 있는 어떤 모임보다도 사랑과 사랑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더 깊이 나누고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근데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이해와 헛소문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많은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있는 분들 가운데 여러분들이 여러분들과 관련된 헛소문, 잘못된 오해 이런 것들을 받아본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한 번도 없다면 정말 대단한 분들인 것 같아요.
저도 사역을 하면서 여러 번 경험들이 있었는데요. 정말 황당했던 경험 한 가지를 예로 들어보면 제가 안성에서 사역을 할 텐데요. 새 신자부를 맡고 있었어요. 새신자부를 맡으면 이제 세 가족이 들어오면 그 세 가족을 가장 먼저 신방하는 역할이 제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제 저는 제 역할대로 새 가족을 심방했고 그리고 이제 그 신방하고 나서 이제 그 사람의 인적 사항을 기록해서 담임 목사님에게 연결해 주는 게 이제 제 역할이에요. 그리고 이제 그 사람을 새 가족 교육을 받도록 안내해 주는 게 제 역할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이 새 가족이 갑자기 담임 목사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팍 이렇게 얼굴이 울글럭불불럭 해가지고 온 거예요. 그래가지고 들어왔다가 나오더니 목사님이 저를 부르세요. 그래서 목사님이 저한테
노 목사 저기 성도님 예전 교회에다가 연락한 적 있어
그러는 거예요.
예 제가요 왜요? 아니요. 저 그 교회가 어딘지도 모르고 저는 지금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랬더니 그 성도가 자기네 자기가 예전에 다녔던 교회에 전화해가지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부목사가 전화해서 막 다 파악을 한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나는 도대체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근데 어디서 이 이 이야기가 시작됐는지 아십니까? 상상력을 발휘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이분의 예정 교회를 이분은 알고 전화했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상상이 안 되시지 않으면 그냥 저는 이제 물론 이제 파악을 했겠죠.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분이 근데 그 동네에서 오신 분이 아니라 멀리 있다가 오신 분이라 그 교회를 제가 일부러 파악하고 어떤 교회인지 파악할 이유가 별로 없었거든요.
근데 이분이 막 그런 식으로 저를 몰아가세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요. 그날 예배를 드릴 때 배상을 예전 교회 예배상을 이분이 이제 꺼내놓고 예배를 드렸는데 제가 그 예배상 위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자기가 예전에 다녔던 교회를 파악했을 것이고 그걸 뭐 이렇게 이렇게 했다는 거예요.
근데 예전 교회 어떤 사람이 그냥 자기한테 어떤 말을 던졌는데 그거를 약간 그러니까 피해 강박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거를 파악해서 자기를 파악해서 이렇게 자기에 대해서 뭔가를 이렇게 지금 이런 말을 퍼뜨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이렇게 전제하고 저한테 화가 나가지고 가서 목사님한테 말을 한 거예요.
어떻게 했을까요?
결국에는 가서 사과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사과했습니다. 제가 안 했는데요. 성도님 오해가 생겼는데 죄송하다 제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켰냐고
근데 제가 그때 이 담임 목사님이 저한테 사과하라는 말이 이해가 안 돼가지고 막 속에서 저도 화가 났어요. 이게 뭐지
근데 나중에 이제 알겠더라고요. 제가 굳이 여기에서 제가 그분하고 따져가지고 제가 이기면 뭐 해요 결국에는 그분이 교회를 떠나든지 아니면 뭔가 또 나중에 공격 또 포인트를 찾을 거 아니에요. 제가 그냥 죄송하다고 그냥 표현하고 끝나는 게 그냥 그 교회 안에서는 제일 그리고 나중에 이제 이분이 오해라는 걸 알고 났을 때 오히려 더 이렇게 선하게 해결된다고 하는 걸 목사님이 나중에 불러가지고
억울하지 앞으로 목회할 때 이런 일이 많을 거야.
근데 제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가 이제 점점 이제 목회를 하면서도 느껴질 때가 있어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교회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도 그런 오해를 받을 일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관계를 하다 보면 생각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요. 나는 이렇게 말했는데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근데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예수님의 말을 들었는데 똑같이 들었는데 그게 자기들이 이해할 때는 그 말인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대상자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마저 이 정도 수준이면 우리들도 간혹 이런 실수를 할 수도 있다라고 하는 정도 수준을 인지하고 있으면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조금 더 방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중요한 건 그리스도인이라면 정직하고 참된 언행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의 기본입니다. 근데 왜 제자들이 이 헛소문을 퍼뜨렸을까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왜 교회에 이런 오해가 많고 왜 교회 안에 또 서로 잘못된 말들이 오고 갈까 이 답을 알기 위해서 제자들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 직전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명령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고자 할지라도 내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너는 나를 따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그 주님 그 주님의 그 정신을 따르라 그게 바로 예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왜 제자들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말도 안 되는 그런 헛소문을 퍼뜨렸을까요?
그건 그들의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으니까 그 말이 자기들의 해석으로 들린 거예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그 자세가 아니라 자기 생각 하에서 그 말씀을 듣다 보니까 그렇게 들린 겁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고 어느 곳을 막론하고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중심이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늘 거짓 소문은 만들어질 수 있고 또 잘못된 그런 오해와 깨어짐이 가득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걸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또 기억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다룬 것처럼 제자들의 지금 관심은요. 예수님이 예수님이 자기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구원자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건 믿었는데 자기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는 지금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그런 메시아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러니까 언제 우리는 정치적으로 독립할 것인가 언제 다윗과 같은 나라로 회복할 것인가 거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을 주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라
그러면서 오
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여러분 여기에서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는 이 되리라고 하는 말도요. 헬라어로 에스데라고 하는 단어를 썼는데 미래형 그리고 명령형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는 이 짤막한 말에도 너는 앞으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담겨져 있는 말인가 하면 또 반드시 증인이 된 삶을 살라고 하는 명령이 담겨 있다는 거예요.
내 증인이 되리라에 무슨 말이 담겨 있다고요?
앞으로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담겨 있고 증인이 되어라고 하는 명령이 담겨 있다고
여러분 이 명령은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우리 모두에게 속한 명령입니다. 다시 한 번 이 내 증인이 되리라에는 뭐가 들어 있다고요?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과 내 증인이 되어라고 하는 명령이 담겨져 있다.
요한의 미래를 궁금해서 안다고 있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 이후에 현실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어라고 분부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요. 추상적인 개념에만 머물러 있어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그냥 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천국 갈 것을 믿습니다고 하는 그냥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명령을 쫓아서 구체적으로 주님의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근데 이 증인은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정치적으로 계속 법정 이야기들이 오고 가니까 여러분들이 아마 많이 들어본 일들이 있을 겁니다. 증인들은 세 가지의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반드시 보고 들은 것이 있는 사람이 증인을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로는 반드시 출두 요청을 받으면 출두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반드시 진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만약 이 세 가지가 갖춰져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증인이 될 수도 없고 증인석에서 증언을 해도 나중에는 거짓 증언을 한 것 때문에 처벌을 받는 거예요.
그렇죠 주님께서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한 말씀 안에는 이런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겁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로 재물로 돌아가신,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주님을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라고 하는 겁니다. 2천년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지금 현재의 나에게 일어난 사건임을 보고 듣고 느끼는 그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신앙생활을 하자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증인으로 부르실 때 여러분들 여러분들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 여러분들을 증인으로 부르실 때 언제든지 출두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출두하셨다면 그 사람의 반응과 상관없이 내가 반드시 진실되게 그 증언을 해야 되는 사람임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세상 법정의 증인과 복음의 증인의 차이는 뭘까요?
세상의 증인은 말로만 증언하면 됩니다. 내가 가지고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한 것을 내 말로 표현하는 것만 하면 돼요.
근데 하나님 나라의 증인은 복음의 증인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큰 차이죠.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땅끝 제가 요 근래 이 사도행전을 말씀드리면서 몇 번 땅끝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세계의 먼 곳에 지금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그곳이 땅 끝일 수 있습니다. 또 가까이에 있는 내 가족이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땅 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구성하고 함께 나아가고 있는 우리 공동체 안에 믿음의 연약함으로 여전히 땅끝인 지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가 서로 증인이 된 삶을 살아가야 함을 믿습니다. 여러분 소그룹 모임을 할 때도요. 여러분들 소그룹 모임 중에 가정 예배를 드릴 때 여러분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증인이 되려면 아까 뭐를 해야 된다고요?
반드시 보고 듣고 느낀 게 있어야 된다. 그다음에 출두해야 되고 그리고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말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먼저 온전히 주님을 경험하는 신앙인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증인이라는 말도요. 헬라어로 마르티스라고 하는 말을 쓰고 있는데 이 말에서 순교자라고 하는 마틴이라는 마터라고 하는 말이 파생됐습니다. 한마디로 증인은 순교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증인으로서 그들의 인생을 다 걸고 살아서 거의 대부분 순교를 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 십자가에 잡혀갈 당시 그렇게 겁쟁이였고 비겁자들이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렇게 다 순교를 당할 정도의 그런 대단한 사람들이 되었을까요?
그건 그들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어떻게든지 자기들이 본 것을 거짓으로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들이 경험한 예수님을 온전히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순교자가 될지언정 증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마지막 단락에 거짓 소문이나 잘못 이해해가지고 거짓 소문이나 만들어낼 정도의 연약한 제자들이었던 사람들이 사도행전에 이르러서는 참된 교회를 이루는 분기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그들은 주님의 증언으로서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주님의 증인으로서 만날 때마다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 증언이 생생하게 전달되니까 새로운 사람들이 또 증인으로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말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변화되니까 그들의 삶을 보면서 사람들이 증인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는 이 역사가 오늘 우리 하늘 소망공동체 가운데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이 수요일 저녁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증인인 줄 믿습니다. 먼저 증인으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는 뜨거운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않는 가족들이 믿지 않는 우리 주변에 우리가 품고 있는 119의 대상들이 주님 앞에 우리와 동일한 증인이 되는 그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며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증인이 되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될 때 서로서로 우리가 도와가며 서로서로 증인으로서 세워갈 때 우리 공동체는 정말 힘 있고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 오해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연약한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정말 시대를 밝히는 진리의 등대와 같이 온전히 주님의 복음의 빛을 비추는 공동체가 되길 원하십니까?
당연히 후자죠. 그렇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더욱더 되길 원합니다. 서로 만날 때마다 서로 증인 되어 주셔서 우리가 더욱더 많은 이들을 증인으로 세우게 되는 그러한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땅 끝 사람으로 사랑하면서 우리 공동체가 더욱더 증인을 불러일으키는 귀한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