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하 4장 (구약 469P)
2016. 4.1(금) / 제목 : 이스보셋의 암살이 주는 교훈
어제는 우리가 아브넬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사울 왕가의 마지막 왕인 이스보셋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요압에 의해 죽었다는 소식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습니다.
성경은 손의 맥이 풀렸고 놀랐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맥이 풀렸다는 말을 NIV영어성경에서는 '용기를 잃어버리다' 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랐다는 말은 '두려워하다, 겁에 질리다' 라는 뜻과 같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를 해드리면 아브넬의 죽음은 북쪽 이스라엘 연합지파들이 더 이상 다윗과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럴만한 것이 몰락한 사울 왕가를 그나마 7년 6개월 동안 유지시켜 온 사람이 아브넬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니까 사람들 속에 다양한 마음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기회를 엿보아서 다윗에게 백기 투항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끝까지 다윗 왕가에 맞서서 저항하자고 하는 무리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기회를 틈타서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사악한 사람들도 생겨났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바아나와 레갑입니다. 이후에 성경은 레갑을 먼저 내세움으로서 이스보셋 암살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레갑이 주동자요 바아나는 레갑을 따라서 반란에 동참한 공모자입니다.
이들이 이스보셋을 살해한 동기와 정황은 이렇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가 길을 떠나 볕이 쬘 때 즈음에 이스보셋의 집에 이르니 마침 그가 침상에서 낮잠을 자는지라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가 밀을 가지러 들어온 체하고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의 배를 찌르고 도망하였더라'
우리는 여기서 먼저 이스보셋의 어리석음과 게으름, 그리고 그의 모자란 왕됨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주던 장수 아브넬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보셋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 배치하고, 혹시라도 모를 암살자들에 대비를 하고, 그리고 북쪽 지파들을 안심시켜서 아브넬의 죽음에 동요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지금 대낮에 낮잠을 자고 있을 때가 아니죠.
이스보셋의 이런 게으름과 어리석음이 암살을 불러 온 것입니다. 사건이 일어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건을 저지른 사람만 추궁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사건 자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아울러서 다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를 하는 작업입니다.
아브넬 죽음 이후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이스보셋은 자신이 스스로 파 놓은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세월호사건이 일어났던 2014년 그 해에 제가 부목사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청년부 수련회를 거제도 통영으로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이 사건이 일어나도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이들도 있지만 배를 타는 절차가 까다로워졌습니다. 반드시 신분증을 지참해서 신원을 확인해야 했고, 신원확인이 안되면 배를 못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선내에 있더라도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배에서 틀어 주는 안전수칙을 반드시 시청하도록 했습니다. 그전에는 이런 절차도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고를 통해서 배워나갈 것은 배워야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계속되고 있는 세월호청문회를 통해서 사건에 대한 진실과 엄중한 책임자 처벌이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스보셋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크나큰 대가를 치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의 머리를 들고 당당하게 다윗 왕 앞으로 나아갑니다.
일반적인 왕들이라면 이들을 당연히 환영하고 상을 내렸겠지요. 그러나 이들의 상대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도 기뻐하지 않은 것처럼, 무고한 이스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를 단칼에 죽여버립니다. 헤브론 못 가에 매달린 이들의 시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어서 울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뻐하는 분입니다(잠언 24:17-18).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옳기실까 두려우니라'
우리 모두는 정의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속히 임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기도만 합니다. 행하지 않습니다. 기도환원주의자들로 가득 찬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악을 행한 이들을 버젓이 활보하도록 놓아둔 종교지도자들은 현대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입니다.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죽이는 그 일이 비단 2천년 전의 일 만은 아닙니다.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공적 재물인 헌금을 사적인 용도로 횡령한 이들을 원로목사로 추대하는 교회,
자신의 양을 성추행하고도 버젓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운 목사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 그리고 이들을 버젓이 교회라고 인정해준 종교지도자들이 현대판 회칠한 무덤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교회를 원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사랑하시고 택하셨다고 보십니까? 바로 이런 점들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왕들이나 지도자들과 다른 그의 행보,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고 그 속에서 생겨난 악을 과감하게 청산하는 신속한 판단력과 지도력.
이런 사람이 왕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이고, 리더란 모름지기 이래야 됩니다.
이제 십자가를 주목해 봅시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사망을 선고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갚을 수 없는 용서를 베풀어 주신 무한한 선물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결코 십자가가 가진 이 양면성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악에 대한 그 어떤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어야 십자가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악인이 돌아서게 되면 그 어떤 죄도 묻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십자가 백성다움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