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화하면서 난 갈수록 무식해져간다. 새로운 현상,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신조어가 쏟아지고 내가 믿었던 진리나 정의조차 확신을 가지기 힘들다.
내가 국민학교, 아니 초등학교에 다닐 땐 여학생은 반장 후보조차 될 자격을 주지 않았는데 요즘은 대부분 여학생이 반장이고,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한 여학생은 남자 친구가 줄담배를 피면서 이별을 통고한 것을 ‘성폭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식과 제도만이 아니라 손안에 든 휴대폰으로 모든 정보를 검색하고, 지구 반대편의 친구와 화상통화도 하고, 회사에서 해고 통고를 문자 메세지로 받는 세상이다.
하지만, 50여년의 삶과 30년 가까운 기자 생활을 통해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동량의 고통 주머니를 갖고 태어난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도 굳게 믿는다.
고통주머니에는 고생, 역경, 분노, 좌절, 배신, 불안, 공포 등등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은 초년에 왕짱 고통을 받아 조실부모하거나, 어릴 때 큰 병에 시달린다.
또 다른 사람은 중년에 갑자기 부도가 나거나 성인병에 걸리거나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잘 나가다가 말년에 망신을 당하고 한방에 훅 가기도 한다.(대통령의 형인 이상득씨의 경 우...)
또 어떤 사람은 일수나 월부처럼 조금씩 조끔씩 곤곤하게 고통을 겪으며 산다.
대통령도, 재벌 회장도, 종교지도자도 이 고통질량의 법칙에서 벗어난 이를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개인이나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엄중한 책임과 무한한 역경을 짊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임기 말년에는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가까운 이들은 대부분 측근 비리로 구속되었고, 친자식조차 검찰에 출두하고, 본인의 안녕인들 누가 알 수 있을까.
재벌들도 호화저택에 고급 자동차를 탄다고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개인 가족사의 행불행을 떠나 요즘 재벌들에게 쏟아지는 비판과 비난, 그리고 그 재산을 지키려는 온갖 음모술수를 다 이겨내는 것 역시 엄청난 고통이 아닐까.
질문에 답하는 이시형 (출처: 경향DB)
얼마전 난 두 명의 지인을 만났다.
학창 시절에 항상 반장을 도맡고, 외모도 예뻐 늘 주목의 대상이 되던 친구가 있다.
전문직 남편과 결혼하고, 아들도 착하고, 자신의 분야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전생에 나라를 몇개가 구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남편이 부정을 저질러 직장을 그만 두고, 아들은 중학교 때까진 공부를 곧잘하더니 고등학교 때부터 학업에 의욕을 잃어 3수 끝에 지방대학에 들어갔지만 잘 적응을 못한다. 그녀 역시 직장에서 승승장구했으나 지금은 암에 걸려 투병중이다.
과거가 너무 화려하고 아름다웠기에 현재의 고통을 잘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다. 암만이 아니라 우울증 증세도 보여 보는 내내 안쓰러웠다.
다른 이는 운동권 남편을 만나 지지리도 고생했고, 아들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 안하고 빈둥거려 속을 끓였단다.
그녀 역시 직장생활에서 열심히 일해도 별로 인정을 못받고, 동료에게 배신을 당한 적도 있다. 자기 팔자가 사나운 것 같다며 접집을 전전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친구들과 차린 벤쳐회사가 이른바 대박이 났고, 아들은 뒤늦게 정신을 차려 공부에 매진하더니 장학금을 받고 외국에 유학갔단다. 자신의 직장에서도 그녀의 실력이 뒤늦게 인정받아 최근에 본부장이란 직함을 얻었다.
나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모두가 갖고 있는 고통주머니라면, 어떤 고난이 닥칠 때 팔자를 탓하고 억울해할 것이 아니라 마치 월급에서 가불하듯 어차피 받을 고통을 빨리 사용해 없애 버린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 오늘은 벌써 1년치 고통을 받아버렸네. 당분간은 좀 편하겠는걸?”
“빨리 고통을 써버리고 말년에 편히 살아보세!”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내가 <고통 총량의 법칙>을 말하자 어떤 교수가 <지랄 총량의 법칙>도 있다고 주장했다.
“고통만이 아니라 인간이 평생 지랄을 떠는 총량도 정해진 것 같아요. 어떤 친구는 학교 때 사고뭉치였지만 개과천선해서 나중에 학자나 심지어 목사가 된 친구도 있어요. 반면 학창 시절엔 정말 얌전하고 성실한 친구가 뒤늦게 늦바람이 나기도 하고요. 린다김이나 신정아랑 스캔들 난 남자들 보세요. 젊을 때 한 번도 못 놀아온 이들이라니까...”
그러고보니 내 주변에서 연애박사라고 불리던 자유주의자 친구는 늦게 결혼한 후에 거의 수녀처럼 지낸다. 파격적인 화장과 옷차림으로 늘 쇼킹 아무개로 불렸는데 요즘은 단아한 무채색 정장 옷차림에 저녁 약속도 거의 하지 않고 로션만 바른 생얼로 지낸다. 원도 한도 없이 놀아본 고수의 여유일까.
반면 학교 다닐 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만큼 얌전했던 친구는 요즘 주부연극단에 들어가 아마츄어 연극 배우의 생활을 즐긴다. 얼마던에 만났을 때는 스키니진을 입고 주렁주렁 액세서리를 걸쳐 내가 더 놀랐다.
인생은 반전이 있어 더욱 흥미진진하고 더 살 맛이 나기도 한다.
난 고통은 이미 충분히 받은 것 같고(물론 내 생각이지만)
어리고 젊을 때 ‘지랄’은 별로 부리지 않아 지랄을 소모할 때가 다가온다...고 믿는다.
그렇다고, 50년간 해보지 않은 술 마시기, 카바레에서 춤 춰보기, 뒤늦게 담배를 피우거나 우유주사 맞아보기 등등은 아닐게다.
지성적이고 발랄하게...도 지랄의 약자이기도 하니 그런 지랄로 만년을 추하지 않고 멋스럽게 살아보는게 바람직할 것 같다...는 것은 너무 교과서적이다.
패러글라이딩에 도전하거나, 뻣뻣한 몸을 유연하게 하기 위한 발레를 배워보는 것, 학창 시절에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촛불시위 등에 참여하는 것 등도 일종의 아름다운 지랄이 아닐까...
고통이건, 지랄이건 내 몫이라면 달게. 맛있게 받아들이자.
출처 : http://soodapower.khan.kr/183
첫댓글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문득 '고통 총량의 법칙'이란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넋두리 끝에 나온 말이죠.
경향신문의 유인경 기자가 2012년에 쓴, 조금 오래된 글인데 다시 읽어 보니 재밌었습니다.
아마도 고된 시절을 보낸 우리의 미래는 지금 보다 밝지 않을까..하고 희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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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에, 소피아님 감사합니다.
위안이 됩니다 ^^
위안이 되셨다니 기쁘네요 고키아님.
필리이님 *** 고통총량의 법칙 과 지랄총량의 법칙
둘다 이해가 충분히 되고 , 재미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위로도 됩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커피향님.
재미있게 봐주시고 위로도 되셨다니 정말 기쁘네요..
필리아님 *** 저는 그동안 살면서 병으로 인해서
고통총량은 넘치도록 가득찬것 같고요
아파서 , 지랄맞은 분노를 터뜨리며 , 지랄맞게도 살아봤으니,
그러므로 지랄총량도 가득차 , 이미 한계선을 넘은것 같고요
그러구보니 이제 저에게 남은건 * 편안함과 행복이 가득한 삶 * 이네요
앞으로의 나의 삶이 , 그럴수만 있다면 , 알마나 좋을까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에~ 감사합니다.
재미있고 위로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봄빛처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