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생에게 아버지의 나이를 물었더니 학생이 말하기를 “향년 54세입니다” 하였다. 내가 순간 당황하여 “그럼 돌아가신 지는 얼마나 되었는가?” 하였더니 학생은 더욱 당황하여 “지금 집에 계시는데요.” 하였다. 아마 학생이 ‘향년(享年)’을 나이의 높임말인 연세(年歲)나 춘추(春秋) 등과 같은 의미로 혼동하였던 모양이다. 향년은 살아 생전의 나이 곧 죽은 이가 이 땅에서 향유(享有)하였던 수명을 말하는데 우리말 가운데 죽음에 대한 별칭은 매우 다양하다.
사망(死亡), 임종(臨終), 별세(別世), 타계(他界), 하직(下直), 서거(逝去), 작고(作故), 선서(仙逝), 기세(棄世), 하세(下世), 귀천(歸天), 영면(永眠), 영서(永逝), 영결(永訣), 운명(殞命), 절명(絶命) ….. 이 외에도 엄청나게 많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오래도록 죽음을 고민하고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혹 신문 기사에서 ‘운명(運命)을 달리했다.’라는 표현을 보게 된다. 이 또한 매우 잘못된 문장으로 ‘유명(幽明)을 달리했다’라고 해야 옳다. “‘유(幽)’와 ‘명(明)’을 달리했다.”라는 말은 생과 사를 달리했다는 말로서 ‘유幽’는 어둠· 밤· 죽음· 저승· 악· 무형· 어리석음 등을 의미하고, ‘명明’은 밝음· 낮· 삶· 이승· 선· 유형· 지혜로움 등을 뜻한다. 굳이 ‘운명했다’라는 표현을 하고자 한다면 운명運命이 아니라 "암 투병 끝에 ‘운명(殞命)했다’”라고 써야 옳다.
죽음의 종교적 별칭으로는 불가에서는 열반(涅槃), 입적(入寂), 입멸(入滅), 멸도(滅度) 등이 있으며, 유가에서는 역책(易簀), 결영(結纓), 불록(不祿) 등으로 표현하는데 ‘역책(易簀)’이란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말로서,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이르는 말이다.
공자의 말년 제자인 증자(曾子)가 운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댓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어서 이 자리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결영(結纓)’이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나오는 말로서 갓끈을 고쳐 맨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역시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전투 현장에서 적의 창에 맞아 갓끈이 끊어졌는데, “군자는 죽을 때에도 갓을 벗지 않는다.”하고 갓끈을 고쳐 매고서 죽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불록(不祿)’이란 신분에 따른 죽음의 다섯 가지 등급 가운데 하나이다. 즉 천자(天子)는 붕(崩), 제후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선비는 불록(不祿), 서인(庶人)은 사(死)라고 한다. 또한《예기》<곡례(曲禮)>에는 장수하다가 죽은 것을 ‘졸(卒)’이라 하고, 젊어서 죽은 것을 ‘불록(不祿)이라 한다.’고 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종(善終)’이라 하는데, 이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로서 ‘착하게 살다 복되게 생을 마쳤다’라는 의미이다. ‘믿음대로 살다 천국에 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개신교에서는 많은 사람이 ‘소천(召天)하였다’라고 말들 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표현이다. ‘아무개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라는 표현은 명백한 문법상의 오류이다. ‘소천(召天)’이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문법적으로 본다면 ‘하늘을 부른다.’라는 뜻이 된다.
대개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가 능동형으로 쓰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자면 신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신학생은 ‘소명을 받았다.’라고 하지 스스로 ‘소명했다’라고 하지 않는다. 훈련장에 가는 예비군은 ‘소집을 당했다’라고 하지 자기가 ‘소집을 했다’라고 하지 않으니 굳이 ‘소천’이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면 “소천하셨다”가 아니라 “소천을 받았다”라고 해야 백 번 옳다. ‘소천(召天)을 하였다’라는 말은 내가 ‘하늘을 불렀다’라는 뜻이므로 이제 때가 되었으니 ‘내가 죽고자 한다’라거나 ‘나를 죽여달라’라는 뜻이 되니 인간이 자신의 수명 종결을 위해 신을 불러낸다는 망령된 표현은 결국 죽을 권리가 내게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망자나 그 가족에게 흔히 하는 상례의 인사말로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들을 한다. ‘명복(冥福)’이란 죽은 뒤에 저승에서 받는 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명복을 빈다.’라는 말은 죽은 사람의 사후 행복을 비는 말로서, 서방 정토에 가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불사(佛事)를 행하는 것이기때문에 ‘고인의 영면을 기원합니다.’라거나, ‘고인의 별세를 애도합니다.’ 또는 ‘고인의 영면을 추모합니다.’,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등등 고인의 생전의 종교나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추모할 수 있는 표현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한결같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말은 진정성도 의미도 반감되는 매우 무성의한 예법이다.
더욱이 기독교인이나 천주교인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의 표현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죽은 이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하는 것은 무간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하는 천도(薦度)의 발원(發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세를 따른다.’ 하였으니 이러한 모순된 말조차도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이 사용하다 보면 표준어로 굳어질 날이 있을 것이다. 신神의 이름조차 인간의 의지대로 개명하는 족속들인데 뭔들 못하겠는가 만은 그래도 알고는 써야 하지 않을까? 그나저나 죽을 권리가 정말 내게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글/ 박황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