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은 노론 사대부 이항로의 제자다 3부
최익현의 복심은 ‘서원 복구’에서 또한 잘 드러난다.
“처음에 서원은 좋은 뜻에서 설치되었지만 오래되면서 점점 어지러워졌다. ❮심경❯과 ❮근사록❯을 읽으며 몸을 수양하던 사람도 변방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 자손들이 많은 곡식을 쌓으면서 마음이 교활해지기 시작했다. 단청이 화려한 집에 재물이 즐비했으니, 물질이 극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참다운 이치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만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 때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서원에 소굴을 만들던 유생들은 마치 비상지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루아참에 처소를 잃었다. 미쳐 날뛰고 부르짖으며 잇달아 대궐 문밖에 엎드려서 상소했으니, 양식 있는 이들이 비웃었다.”10)
당시 서원은 당쟁의 본산으로서 부패와 악의 온상이었다. 양반들이 불법으로 서원을 세우고 군역을 피하고 토지세를 면제 받으며 온갖 명목으로 양민들을 수탈하며 중앙의 세도정치 세력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며 국가의 기강을 흔들었다. 대원군은 불법으로 세워진 사원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송시열이 세운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철거하였으며 서원에 부속된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게 하는 등 서원을 대대적으로 혁파하였다. 1870년 전국 650개 서원중에 47개 서원만 남기고 불법한 서원들이 다 철폐되었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통하여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양반사대부들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허물고 초기 조선처럼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론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서
“명나라 역사서인 ❮명사❯를 보면,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보이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삼가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11) 라고 고종에게 서원을 복구하지 않으면 왕실이 뒤집힌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활동 근거지인 서원을 잃은 노론 사대주의자들은 최익현을 앞장 세워 고종을 적극 지지하여 대원군이 혁파한 자신들이 배운 성리학적인 지식과 주자가례 그리고 온갖 기득권과 명분과 사대주의 소중화 의식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들 노론유학자, 양반사대부, 사대주의자들은 서세동점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눈감으며 농민과 천민들을 충효를 기저로 하는 신분사회의 반상구조로 고착화시켜 자기들만이 잘 나가는 세상을 원하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최익현을 비롯한 그들의 상소에는 고종을 향한 충정이나 조선을 이상사회로 만들려는 개혁적인 의지와 애민정신이 없다. 단지 조선을 대원군 개혁 이전의 시대로 돌리려는 보수반동의 의지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의 의지가 대원군을 제거하려는 고종과 민비의 심중과 일치를 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망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조치로 7년째 유통되고 있는 청나라의 돈인 청전을 사용하는 것을 혁파할 것을 요구하였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청전을 못 쓰게 한 것은 갑술년(1874년, 고종 11년) 정원부터다. 그때까지 서울이나 지방에서 교역에 쓰인 것은 청전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명을 내려 청전을 못 쓰게 하니 온 나라에 전황(錢荒)이 생겨 상품이 유통되지 않고 실업자가 많아졌다. 상평전을 쌓아 둔 사람들은 장롱 속에 쟁여 놓고 몇 곱절이나 이문을 남겼다. 몇 달이 지나서야 차츰 유통되기 시작했다.12) 고 쓰고 있다.
고종은 1874년 2월 22일, 조선의 화폐유통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청전을 아무런 대책 없이 사용을 중지시켰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전역의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통화 축소로 말미암은 경기 침체가 심화되었고 백성들은 청전을 은이나 상평통보로 바꾸고자 시장으로 몰려 들었으나 조선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왕조가 보유하고 있는 재정 비축분이 청전이라는 사실이었다. 고종의 청전 철폐선언으로 말미암아 왕조가 보유하고 있는 재정 비축분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청전의 혁파가 조선 경제를 순식간에 마비시키며 백성을 빈곤과 절망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런 주장을 한 최익현과 노론 사대부들 그리고 고종은 결코 백성들의 복지나 보다 나은 나라를 꿈꾸며 열정과 신념에 불탄 이상적인 지도자라고 볼 수 없다. 최익현은 자기 집단의 회복을 위해 고종은 왕권의 완전한 쟁취를 위해 대원군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무리수를 둔 교조적이고 소아병적인 사람들이었다.
고종은 3월 17일 당시 도고 (都賈)라고 불리는 농촌과 한성부를 잇는 중간상인의 활동을 한성부의 물가상승과 재정난의 워인 중의 하나로 들고, 이를 엄금한다는 명을 내렸다.13) 화폐유통이 끊긴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상행우를 억압한 정책은 경기침체 상태에서 물가를 더 내리는 것과 같아서 조선의 경제를 더욱 심하게 마비시켰으며 고종과 민 씨 척족들이 직접 벼슬을 파는 매관매직의 길로 인도하였다. 또한 일본의 상인들, 청의 상인들이 조선에 쉽게 발을 디딜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 외에도 최익현은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받아들인 기부금인 원납전폐지를 상소하였고 고종은 이를 시행하였다.
대원군은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 중건을 결정하여 1865년에 중건하기 시작하였고 몇 년 뒤에 공사를 끝내고 1867년에 고종으로 하여금 이사를 하게 하였다.
조선에서 그처럼 웅장한 건물은 일찍이 볼 수가 없었다. 역사를 시작할 때 재정이 부족하여 팔도 부자들의 명단을 뽑아서 돈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파산자가 잇달았다. 이때 거두어들인 돈을 원납전이라고 했는데 백성들은 입을 비쭉거리면서 원납전(願納錢)이 아니라 원납전(怨納錢)이라고 불렀다.14)
황현은 백성들이 자원해서 내는 돈이 아니라 원성을 납부하는 원납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물론 원납전의 징수는 노론지배층과 토호층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왕조를 세종, 성종치세 때처럼 강력한 국가로 세우고자하는 대원군의 의도가 내포되었지만 대원군이 문세전, 신량전, 수용전, 원납전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주조하여 심각한 민폐를 초래한 나머지 반 대원군 세력을 집결시켜 왕가에 의한 조선의 마지막 개혁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지금까지 위정척사파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최익현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참으로 후하다. 항일투사, 지사, 선비, 민족주의자 등으로 숭앙을 받으며 지조가 있는 애국애족의 선비의 표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대표인 이항로의 제자로서 그가 대원군을 제거하기 위하여 올린 상소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분명 조선을 소중화로 생각하는 사대주의자의 모습이다. 우리는 노론 사대주의자 최익현의 면모를 직시하며 위정척사파로서 개항을 반대하고 쇄국을 제안한 그가 그 시대에 끼친 영향을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노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인 최우형이 잇달아 높은 벼슬에 발탁되어 이조판서와 홍문관제학을 거쳐 군에 봉해져 충훈부를 아울러 관장했다. 그가 한번은 초헌을 타고 북촌에 이른 적이 있었는데 부채를 들어 코를 가리며 말했다.
“노론의 썩는 냄새가 어찌 이다지도 고약하게 나는가?”
도성 큰길에서 종각 북쪽을 북촌이라고 부르는데 노론이 살았으며, 남쪽을 남촌이라고 부르는데 소론 이하 삼색이 섞여 살았다. 15)
우리는 조선 정치를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 이끌고 조선을 쇄국과 멸망의 길로 가도록 행패를 부린 노론 사대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그들은 1910년 한일늑탈로 조선이 망하였을 때 나라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가는 것을 앞장서서 지지하거나 묵인하여 그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조선총독부는 그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하였다. 그 76명의 작위자들의 대부분이 노론의 후손들이었다. 물론 고종을 비롯한 왕실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제의 군사점령, 고종의 부패와 무능, 민비와 민 씨 척족들의 부패, 노론을 비롯한 양반 사대부 기득권층의 부패와 파당과 정치적인 대립으로 망한 조선을 애도한다.
실패로 끝난 대원군의 개혁정치와 대원군의 개혁을 그 이전으로 복구하여 철저하게 해체시킨 고종 그리고 고종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계유상소’를 올린 최익현과 노론의 소아병과 집단이기주의에 대하여 애도하는 바이다.
2022년 10월 9일 새벽
우담초라하니 올리다
미주
1) 만동묘 – 만동은 물이 만 구비를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존명의식을 표현이다. 이 사단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보답으로 당시 황제였던 신종을 기리기 위해 조선 숙종 대에 세운 사당이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의 사상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이 사사되기 전에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도록 부탁하였다. 봄, 가을의 제향에는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대원군 때 철폐되었으나 다시 복귀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폐지되었다.
2) 김진년 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비판하다⌟, 153~161쪽, 책과나무, 2018
왕도정치 – 왕의 덕에 바탕을 둔 어진 정치를 뜻한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주장하였던 왕도정치는 왕이 성군이 되어 요순처럼 나라를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는 정치였다. 그러나 조선 사림파들에 의해 주장된 도학정치는 초기의 왕도정치보다 더 왕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신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조선에서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일은 신하의 몫 중의 하나였다. 왕은 성인이 되어야 했다. 왕이 수양을 게을리 하면 신하는 왕에게 끊임없이 간하였다. 마침내 사대부들은 신하가 임금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신하가 왕에게 수양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조선의 왕도정치는 왕이 아닌 신하들을 위한 통치체제였다.
3)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 62쪽, 와이즈맵, 2020년
4) 기무라 간 저,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103쪽, 제이앤씨, 2017
5)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 64,65쪽, 와이즈맵, 2020년
6)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50, 51쪽, 서해문집, 2018
7) 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의 이름만 가지던 일, 또는 그런 벼슬
8) 기무라 간 저,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103쪽, 제이앤씨, 2017
9)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 71쪽, 와이즈맵, 2020년
10)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23쪽, 서해문집, 2018
11)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 71쪽, 와이즈맵, 2020년
12)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49쪽, 서해문집, 2018
13) 기무라 간 저,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119쪽, 제이앤씨, 2017
14)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21쪽, 서해문집, 2018
15)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34쪽, 서해문집, 2018
참고서적
박종인 저, ⌜매국노 고종⌟, 와이즈맵, 2020년
기무라 간 저, ⌜대한제국의 패망과 그림자⌟, 제이앤씨, 2017
황현 저, 허경진 편역, ⌜매천야록⌟, 서해문집, 2018
김진년 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을 비판하다⌟, 책과나무, 2018
윤효정 저, 박광희편역 ⌜대한제국아 망해라⌟, 다산초당, 2011
정병석 저,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시공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