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성은 이(李), 이름은 황(滉), 그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다시 다섯 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중 막내였다. 퇴계의 부친은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작고하여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만 결혼했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 홀로 겨우겨우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분은 어머니”라 할 만큼 어머니는 엄한 가법으로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집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17세에 숙부가 별세하자 스승 없이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 두 권을 구해 읽고,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에는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공부했는데, 이때 건강을 해치게 되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했다.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퇴계는 43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당시 당쟁과 권력투쟁이 심하여,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45세 때 을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때 파직 당하였으나 곧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나길 바랐으나, 외직을 구하여 단양 군수와 풍기 군수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했다.
그의 사생활에는 불행한 일도 많았다. 27세에 첫 부인 허씨를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 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 군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또 50세 때에는 친형을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이후,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모여든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가 떠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되었다. 퇴계의 소망은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퇴계의 중요한 저술은 주로 노년으로 접어든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당시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1553년)과 천명도설후서(1553년), 고봉 기대승(1527~1572)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1559~1566), 주자서절요(1556), 자성록(1558), 전습록논변(1566), 무진육조소(1568), 성학십도(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들이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