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8.
QT 마가복음 10:1~16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도 되는 이유
1~12절: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장면이다. 이혼이 합당한가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사실 바리새인들이 가정 붕괴를 안타깝게 여기거나 가정을 세우기 위한 염려의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할지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힐난하고 불신하고 시험에 빠뜨리고자 의도적으로 질문을 해 오고 있다.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당황스럽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질문은 사탄의 성격을 가진 질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보면 그 질문 내용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남자가 아내를 버려도 되는가?” 에서는 당시 남성중심의 가정과 사회 질서가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 <더 스토닝-원제:The Stoning of Soraya M.>이 떠오른다. 현재에도 죄없는 아내를 모함하고 돌에 맞아 죽게 하는 여성인권에 대한 문제를 드러낸 실화였고 남성중심의 사회질서를 비판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에는 더 당연시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답을 하신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질서는 남녀가 서로 동등하게 돕는 배필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하신다. 내가 편할 때는 쓰다가 불필요 하면 버려도 된다는 것은 사탄의 마음이요, 우리가 사랑을 받을 존재가 아니지만 품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본다.
13~16절: 당시 문화는 어린 아이들을 온전한 인격자로 여기지 않았던 시대였다. 보살피기 보다는 어른들과 어울릴 수 없는 미숙한 존재로 여겼다. 제자들이 아이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은 것도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예수님은 화를 내셨다. 제자들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말씀하시는 중요한 포인트는 뭘까? 아이들이 순수하다는 것과 다른 관점에서 보고 싶다. 예수님의 행적에 따라 생각해 보자면 아이들은 연약하고, 힘이 없고 아프고 병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누군가를 의지해야 할 존재이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와 같이 이런 연약한 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아닐까? ‘내가 연약할 때 그 때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구나~’ 하는 것도 깨우친다. 예수님은 아이들이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안아 주시고 축복하셨다. ‘안아주심’은 하나님의 포근하고 다정한 모습이다. 나도 그 분 품에 안겨 세상의 평안함을 느끼고 위로와 안식을 얻고 싶다.
“하나님, 우리나라에도 아동(학생)들이 방치되고 학대받는 사회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님과 같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또 연약한 자를 안아주고 품어 주시고 축복하시는 주님을 따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가 연약하고 나약해 질 때 오히려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안아 주심을 경험하며 주님의 품안에 안식하고 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