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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기론의 실체
최근 불교사상은 지구적 차원의 생태파괴와 환경문제의 해결 방식의 하나로써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여러 사상 중에서도 여러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는 부분은 연기론(緣起論)이다. 석가모니불(=석존)은 『아함경(阿含經)』에서 “나를 알고자 하거든 연기법을 알아라. 연기법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다”라고 설한다. 그만큼 석존의 가르침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이것이다. 이 연기의 사상은 이제 생태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기업, 국가, 단체, 존재자, 사유물 등 각각의 세계 내에서 가장 기본적인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멀리 있는 것과 가까이 있는 것 등과의 관계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연기는 석존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석존이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 매우 자연(自然)스럽다. 자연이라는 것은 외부 환경적인 자연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뜻이 확장되어 ‘스스로 그렇다’라는 보편적인 현상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석존의 깨달음의 세계를 ‘여여(如如)하다’라고 한다. 자연 현상인 생로병사에 의문을 품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 이 간격에 석존과 범인의 백지 한 장 차이의 인식이 놓여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자연성이 바로 불교를 철학, 과학적으로 파악하도록 하는 연결고리다. 연기는 자연스러운 교의다.
초기 불교에서 연기는 생로병사가 그렇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석존이 깨달은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 또한 연기로 얽혀져 있다. 즉, 인간은 왜 고통스러운가. 무상(無常)한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 집착을 없애는 것은 무엇인가. 8정도(正道)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원인과 결과를 찾아 가는 것이 연기적인 관계다. 수행의 측면으로 들어가면, 석존이 깨달음의 방식으로 사용한 위빠나사(viśyanā)의 내용이 된다. 오온(五蘊)이 그것이다. 이 오온이 임시로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한 것으로 착각한다.
그 오온은 색온(色蘊, 물질), 수온(受蘊, 감각과 인상), 상온(想蘊, 지각과 표상), 행온(行蘊, 의지나 마음의 작용), 식온(識蘊, 마음)이다. 우리 몸을 이루는 물질과 정신 세계 전부를 아우른다. 이 5가지 요소가 일시적으로 나를 형성한다. 역으로 이를 분해하면 각각의 요소로 환원된다. 과학과 수학적인 방식이다. 석존은 이 오온이 가합(假合, 임시로 합하여 진 것)한 것으로 보고 관찰을 했다. 이를 관찰하는 자는 사띠(sati, mindfullness로 번역)다. 마음챙김을 통해 그것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연기는 결국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석존 교설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12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가 그것이다. 이는 앞의 것에 기대어 뒤의 것이 발생하는 관계를 말한다. 12연기는 인간의 불행이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를 밝힌 것이다. 시간적으로 연속되면서 영향을 받는다. 인간 불행의 최초 원인은 무명이다. 무지를 말한다. 무엇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고 삶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나를 낳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다면 무지인 것이다.
무지의 최종 결과는 늙음과 죽음이다. 이를 전생, 현생, 내생으로 확대하면 윤회가 된다. 석존이 노사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듯이 무명까지 역으로 올라가서 이를 타파하면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을 얻게 된다. 오온이나 12연기의 모든 요소가 번뇌다. 이 번뇌를 제거하여 도달하는 것이 열반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열반이나 해탈이나 같은 뜻이었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 번뇌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이 평화와 자유다. 비로소 생로병사에 의한 윤회의 트랙에 휘말리지 않는 세계에 이르게 된다. 석존과 초기불교에서의 연기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었다. 인간의 문제가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다. 르네 데카르트식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석존식으로 접근, 인간 고(苦)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연기의 사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의 문제는 다양한 측면에서 응용 가능하다. 특히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에도 이 연기는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누군가와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가정하자. 지금이 시간이고, 너와 나, 그리고 찻집이 공간이다. 너와 나는 이 순간 연기적인 관계로 이어져 있다. 내가 없다면 네가 여기에 존재할 이유가 없고, 네가 없다면 내가 여기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둘 중 하나라도 이 자리에 없다면 이 공간과 시간은 의미가 없다. 둘이 이야기 하는 동안 이 찻집의 공간과 더불어 현재라는 시간이 의미가 있다. 이렇게 모든 존재와 시간과 공간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연기론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고도의 철학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무자성공(無自性空)이라는 반야(般若) 공(空, śūnya) 사상의 기반을 이룬다. 모든 존재는 인과에 의해 존재한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자연히 따라서 나온다. 역으로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는 것이다. 이를 깊이 있게 다룬 사람은 용수(龍樹=Nāgārjuna, 150-250경)다. 그는 팔불중도(八不中道), 즉 불생불멸( 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라는 네 가지의 짝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이는 고도화된 메타언어로써 모든 현상과 본질을 총망라하는 연기론이다. 또한 인연으로 생긴 것이 공임을 논하고, 이를 통해 미혹됨이 없는 중도에 서야 됨을 역설한다. 대승경전의 『화엄경』을 기반으로 한 중국의 화엄교학에서는 사법계(四法界), 즉 이법계(理法界), 사법계(事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조사들에 의해 더욱 더 세련된 메타언어의 세계인 십현연기(十玄緣起), 육상원융(六相圓融) 등으로 체계화하였다.
2. 절대은에 대한 이해
이러한 연기의 사상이 보다 도덕적인 차원에서 발전된 사상이 원불교의 사은(四恩) 사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와 덕이야말로 동아시아에서 체득한 연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석존과 비슷한 시기에 노자(老子)가 나와 동양사상의 핵심 텍스트 중의 하나인 『도덕경(道德經)』을 제시했다. 그 내용이 바로 도와 덕에 관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 『주역(周易)』에서 음과 양을 사상체계의 기본으로 삼고 있듯이 만물은 상반된 구조로 되어 있다. 이 두 세계를 어떻게 통합하고 중화하며 공존하게 할 것인가가 일상 철학의 주제였던 것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를 도라고 말한다면, 그 도는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며, 이름지어 부른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고 한다. 이 도가 만물의 근원인 어머니다. 도는 만물을 생성하며, 덕은 만물을 기른다. 즉 하늘의 뜻에 따라 만물을 잘 돌보는 것이 덕이다. 도에 의해 존재하는 만물은 각각의 도를 갖고 있다. 천도(天道), 지도(地道), 인도(人道)가 그것이다. 덕은 이 도를 실천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다. 소태산 대종사는 덕에 대해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恩惠)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이니, 하늘이 도를 행하면 하늘의 은혜가 나타나고, 땅이 도를 행하면 땅의 은혜가 나타나고, 사람이 도를 행하면 사람의 은혜가 나타나서, 천만 가지 도를 따라 천만 가지 덕이 화하나니라”(『대종경』 제4인도품 2장)라고 설한다. 『주역』의 가르침은 자연의 도를 잘 알고, 이를 인간의 차원에서 어떻게 잘 실천할 것인가라는 덕의 실현을 설하고 있다.
원불교의 사은은 이처럼 석존의 가르침과 『도덕경』 및 『주역』을 포함한 동양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 연기 또는 상호의존의 사상이 극대화된 것이다. 초기불교를 계승한 입장에서는 사회적 연기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연기는 중중무진의 연기론이 인간적 차원에서 해석되고,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실천되는 것을 말한다. 연기론적 존재론이 인간적 도덕의 차원에서 재구성된 것이다. 거기에는 은(恩)이라는 관계론이 관여하고 있다. 이 은은 물론 절대적인 도의 세계에서 발원된 절대은을 말한다. 일상에서 말하는 주고 받는 은혜라는 상대성을 넘어서 있다.
물론 은은 여러 종교나 문화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불교는 사은이 여러 경전에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대승경전인 『심지관경(心地觀經)』에서 부모·중생·국왕·삼보의 은혜를 설한다. 이 외에 다른 경전에서는 설법사나 신도 등 약간씩 사은의 대상을 달리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은은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물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은은 타자에 대한 유익한 행위와 이에 대한 되갚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교는 이 은이 가족 관계에서 은애(恩愛)라는 말로 쓰이는 것처럼 출가자에게는 갈애(渴愛)와 같이 끊어야 되는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은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국왕은 불교가 발전하면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왕권을 높이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유교에서 은으로 맺어진 부자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확장한 것과 비슷하다.
원불교의 사은은 이러한 불교와 유교의 은의 사상체계를 잘 계승하고 있다. 부모은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천륜(天倫)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계의 모든 동식물 세계에서도 목격된다. 언어적 표현은 달라도 양자의 관계는 모든 생태계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자연계의 양상이다. 부모은은 도와 덕으로 구성된 인간 생태를 둘러싼 은의 관계를 가장 친근하게 나타낸다. 인간은 천지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영성을 지닌 존재다. 물적 영적 존재로서 천지의 도에 의해 태어났으며, 덕을 구현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지은의 천지8도는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포은과 법률은 또한 하늘의 도와 덕을 구현하는 또 다른 차원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동포은의 이념인 자리이타는 모든 존재가 도의 구현체임을 강조한다. 자리이타는 대승불교의 핵심 이념이다. 너도 이롭고 나도 이롭다는 것은 공존과 평화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각각타(自覺覺他)라는 실존의 절대성을 확립하는 명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물, 만물과 만물이 자신의 절대성을 구현하는 당위성을 내포한다. 법률은 또한 정의(正義) 구현이라는 관계성의 질서를 규정한다. 단순히 올바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평형과 중도, 공존과 상생을 위한 하나의 질서 개념이다. 만물의 자연됨을 말한다. 어떤 것에도 침해받지 않으며, 그 자체로서 의미를 구축하는 존재의 신적 세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 이렇게 본다면 사은은 단순히 인간 사회의 필수 구성 요소인 윤리적 차원을 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은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고 규정하는 것은 연기의 관계가 매 순간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하나 속에 일체,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 一切中一, 一卽一切, 一切卽一)”라는 중중무진의 연기론에 기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 구슬은 모든 구슬을 비추고, 그 구슬은 다른 모든 구슬에 비춰지고, 그 구슬에 비춰진 영상이 다른 모든 구슬 속에 비춰지는 관계가 무한히 이어지는, 욕계의 천신들의 왕인 인드라 궁전에 펼쳐진 그물과도 같다.
이러한 관계가 사회적 차원에서 해석되는 것이 사은이다. 물론 단순히 인간 사회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주체가 인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즉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인간 자신과 주위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 인식의 내용이 은이다. 모든 인간과 자연으로 대표되는 모든 존재는 절대은으로 얽혀 있다. 연기의 핵심은 절대은이라고 하는 관계성의 산물이다. 즉, 이것이 인간의 구성물을 연기로 본 초기불교에서부터 우주적인 세계로까지 나아간 대승불교의 연기론으로, 그리고 다시 존재의 연결고리를 절대적인 은의 관계로까지 확립한 사은철학이다.
3. 생태영성은 무엇인가
현재 무너져가는 지구 환경과 생태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 전환을 통하지 않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다. 앞으로 1세기 안에 지구는 인류가 살 수 있는 거주 환경을 상실한다. 각종 과학적 보고서들은 이를 예측하고 있다. 인간의 자업자득의 결과다. 그러니 인류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 행위의 모순)에서 벗어나는 길은 인연과(因緣果)의 연기론을 내면화 하여 새롭게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기의 세계를 잘 파악하고, 이를 일상적으로 재해석 해야 한다. 그것은 생태영성의 기반을 이룬다. 필자는 이를 깨달음의 영성이라는 말로 달리 표현하고자 한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깨달음의 원리인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교의에서는 진공묘유의 수행문으로 이것을 밝히고 있다.
진공묘유는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사상이다. 철학적인 사유의 일대 전환인 것이다. 반야공(般若空) 사상의 빼대이기도 하다. 반야는 지혜라는 말이다. 앞에서 용수의 팔불중도를 통해 무자성(無自性)하기 때문에 공이라는 실상(實相)을 보는 것이 반야다. 수행적 차원에서 본다면 집착할 것이 없는 세계를 말한다. 그렇다고 이 공이 텅 비어 있어 아무 것도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공에 대한 단어가 없어 도교의 무(無)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진공묘유를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대승불교의 세계가 정착하게 되었다.
생태영성은 바로 이 진공묘유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공묘유는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설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도 같다. 색이 곧 공인 동시에 공이 즉 색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투철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넓게는 우리의 삶, 우리 자신, 모든 존재의 존재 방식이 진공묘유다. 유에도 집착할 수 없고, 무에도 집착할 수 없는 본연의 세계다. 영성은 이러한 무집착의 세계 속에 놓여 있다. 우리 내면에는 이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하는 본각(本覺)의 세계를 갖추고 있다. 마음의 번뇌와 욕심에 의해 그러한 본각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누구나 이미 부처로서의 성품 또는 본성을 갖추고 있다. 빛나는 태양을 구름이 가리고 있을 뿐, 언젠가는 반드시 구름을 걷어내고 세상을 환히 비추는 내 영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공묘유의 진공은 무엇인가. 우선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모든 사물은 영원히 고정불변한 상태가 아니다. 무자성공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시계를 떠올려 보자. 자신이 보았던 시계를 마음 속에 그릴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계는 없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안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체성(identity)은 없다. 흔히 정체성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을 말한다. 누구라고 명명하는 존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찰해보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이미 석존이 설하듯 무아(無我)다. 순간적인 나를 영원히 나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늘 가변적일 뿐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가 아니다. 우리가 어릴 때 가졌던 생각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끊임없는 가변적인 나가 생성되고 소멸될 뿐이다.
존재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것이다. 따라서 집착 대상은 없다. 집착하는 순간 그 대상은 그가 집착했던 대상이 아니다. 석존이 설한 8고(苦) 가운데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의 이면에는 이러한 본질이 숨어 있다. 이미 내가 사랑한 대상은 과거일 뿐이다. 그 집착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영성은 이것을 말한다. 실상을 정견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실상은 영원하지 않다. 이 깨달음은 나의 영성 회복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관계를 맺는 이 지구와 환경 또한 영원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생성했다가 소멸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 특히 나와 관계 맺는 존재와의 사이에는 어떤 우열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무한대로 늘일 경우, 모든 존재는 평등하다. 지구 내에서 볼 때, 인간만이 모든 존재를 지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계의 순환 원리이기도 하지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정체성이 없음으로 내가 어떤 독자적인 주권을 가질 원칙은 없다.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를 독점할 권리, 사용할 권리가 없다. 세계는 존재 자체로서 완전한 평등을 구가하고 있다. 이러한 존재 평등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또 하나의 영성적 속성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그 무엇’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깨어 있는 영성이다.
그리고 그 깨어 있음에서 다시 찰라생 찰라멸 하는 존재로 돌아오는 것이 묘유다. 묘유는 말 그대로 묘하게 존재한다는 말이다. 묘하게 라는 뜻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떤 아름다운 현상에 대해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이 묘한 것이다. 즉 절대적인 어떤 세계를 말한다. 불교에서 무상(無上)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위가 없는 세계는 무한히 확장된 절대성(絶對性)을 말한다.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상 절대의 세계다.
묘유는 모든 존재가 그렇다는 말이다. 우리가 대하며 느끼는 모든 존재는 묘유다. 원불교의 교의 중 하나인 처처불상(處處佛像)이 바로 그것이다. 불상은 부처의 상(像, image)을 말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존재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무지를 타파하고 진리를 체득한 존재로서 공경의 대상이다. 그러한 경외의 대상이 모든 존재로 확장된 것이다.
이것이 현존하는 연기의 실상이다. 앞에서 연기는 공존과 공생의 현상이라고 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각각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존재의 순간은 그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절대성을 뽐낸다.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 길 위의 돌 하나 모두가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존재다. 지구 내에 존재하는 만물은 이 순간 연기적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각자 순간적 절대성을 드러내며 공존한다. 그것이 바로 침범할 수 없는 각자의 권리다. 그것이 신(神)이다.
각자는 신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顯現)한다. 매 순간 신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우리는 각각의 왕국을, 각각의 우주를 거느린 신으로 존재한다. 그 현존이 바로 은이다. 절대은인 것이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두 번째 명제가 바로 우리 자신과 만물의 이 속성인 절대은의 세계다. 한 마디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은혜의 세계다. 생태영성은 이것을 말한다. 존재 자체, 연기적 관계 모두가 은의 화현이다. 생성하는 힘 또한 은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며, 그를 살림이 나를 살림이다. 화엄철학에서는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의 연기론을 설파했지만, 원불교에서는 이러한 가치론적인 은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존재의 당위성이 완성된다. 서양철학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 또한 여기에서 일치한다. 영성은 이 모든 철학적 기반,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즉자적으로 해결하는 힘이 결집된 ‘그 무엇’이다. 그것은 언어를 넘어선, 존재를 감싸는 힘으로 우리 자신과 늘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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