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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장 16-21절. 목회자는 이익을 원치 않고, 교인들이 잘 되기를 원함
16-18절. 바울 사도는 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횡령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6절.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1. 앞에서 바울은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재물을 허비한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재물을 허비하겠다고 말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교묘하게 재물을 탈취했다고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16절에서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바울이 교묘한 자가 되어 속임수로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재물을 취했다”고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비방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처럼 바울이 교묘하게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재물을 탈취했다고 비난했을까요?
네, 그런 비난을 한 사람은 물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legalistic false apostles)이었습니다.
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직접 고린도 교회의 재물을 탈취한 것이 아니라, 디도를 통해서 선교헌금을 바치게 하고선, 바울이 디도에게서 그 선교헌금을 도둑질해 먹었다고 비난했습니다.
2. 그러나 바울은 이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디도 한 사람만 헌금 수납위원으로 보낸 것이 아니라, 고린도후서 8장 22절에 말씀한 대로 디도와 함께 다른 두 사람을 헌금수납 위원으로 파송했던 것입니다.
3. 참 오늘날에는 바울 사도가 얼마나 훌륭한 사도라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바울을 이처럼 헌금을 도적질해 먹은 도둑놈이라고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가끔 하나님의 종들은 이런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당국이 하도 핍박을 하니까, 공공연하게 집회를 갖지 못하고, 새벽에 공동묘지 같은 곳에서 집회를 갖고, 또 성찬식도 거행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은밀하게 모여서 음행을 한다고 모함했고, 또 사람을 잡아먹는다고까지 모함을 했습니다.
3. 이러한 모함과 비방은 바울 사도나 오늘날 목사들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욕하면서 십자가에 사형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구주시기 때문에 구세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반역자라고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시면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리하면 내가 삼 일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 줄 알고, 성전 모독죄로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서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데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4. 이러한 비방과 모독은 예수님이나 바울 사도나 오늘날 목사들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당시 고라당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같은 능력의 선지자도 당시 아합왕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아합왕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스갸랴 선지자는 요아스 왕이 성전 뜰에서 돌로 처 죽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도 깊은 구덩이에 갇혀서 죽을 뻔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헤롯 안디바 왕에게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5. 구약의 선지자들만이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그립바 왕이 칼로 죽였습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뜨거운 가마솥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6. 이처럼 당시에 사람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잘 몰라줍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조상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지 않고 죽이지 않았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31-32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하셨습니다.
7.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핍박하면서도 자신들이 올바로 행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 장로(나*민)는 목사를 감독하고, 억압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요 하나님의 일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자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교회의 직분자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예 자기의 사명은 목사를 감독하고 억압하고, 탈을 잡다가 몇 년 지나면 한 번씩 목사를 바꾸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목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를 감독하고 억압하던 그 중직자가 스스로 교통사고를 내고, 스스로 바다로 차를 몰고 가서 죽을 뻔했다고 목사에게 와서 자백하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변화되면, 그 중직자는 누구보다고 더 충성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8.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줄로 착각하는 것을 이미 예수님이 예언하셨습니다.
즉 요한복음 16장 2절에서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말세가 되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쫓아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면서 이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9. 그러기 때문에, 목회자는 핍박하는 불신자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장로들이 무섭습니다.
그리고 이단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노회의 목사들이나 교회의 장로들이 무섭습니다.
6.25 당시 공산당 시절에도 그랬습니다.
목사들을 공산당에게 잡아가도록 고발한 사람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의 직분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목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목사를 고발했습니다.
10.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예수님이 군중들 사이에 있을 때는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예수님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들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밤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안내하고, 군병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11. 이처럼 바울을 도둑놈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은 불신자들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에 있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6장 41절에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주님이 당부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교활하게 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방하는 그런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 마귀의 시험에 들어서 하나님의 종을 비방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평생 한이 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자손 대대로 복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7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는 재물을 달라고 하지 않았으며, 뒤로 다른 사람을 보내서도 돈을 착취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한 이유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직접적으로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는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뒤로 사람을 보내서 선교비를 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2. 바울 당시에나 오늘날도 이런 후원 방식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대부분은 그렇지 않지만 혹 어떤 선교사는 자기가 직접 선교비를 후원해달라는 말은 안 하면서, 선교지 교인들을 한국에 보내서 각 교회에서 선교비를 걷어오게 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선교지 교인들이 우리 선교사님은 우리 원주민들에게 돈을 다 주어버리기 때문에, 막상 선교사님은 집도 없고, 아이들 학비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필요한 것들이 많이 없다고 우는소리를 합니다.
그러면 선교사가 직접 와서 우는소리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선교비를 후원받을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군선교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목이 교회에 가서 어려운 소리를 하면서 후원해달라고 하는 것 보다, 군대 교회 군종 사병들을 보내서 우는소리를 하면, 후원 교회가 더 많은 군선교비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후원 교회 장로님들과 성도님들이 선교지나 군대에 직접 오시도록 하면, 와서 보시고 잘하면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후원금을 보내주기도 합니다.
3. 뿐만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이 직접 후원금을 달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후원회를 조직해서 후원회 임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돈 있는 사람들에게 당에 가입해서 후원금을 도와달라고 말을 하고 다닙니다.
그러면, 돈 있는 국민들이 싫다는 말을 못 하고, 여기저기 달라는 대로 형편대로 돈을 줍니다.
혹시 밉게 보이면 나중에 누가 당선될지도 모르는데 피해를 줄까봐서 여기저기 도와줍니다.
그리고 국회의원 같은 경우에는 그 지역구 군수나 군의원들이나 지방 유지들이 알아서 챙겨줍니다.
즉 군수나 군의원들이 지방에서 돈 있는 유지들에게 말을 해서 후원금을 거두어다가, 자기들이 가질 것은 적당히 가지고, 많은 돈은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바치는 식입니다.
이렇게 옛날이나 오늘에도 당사자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부하 직원을 보내면, 알아서 챙겨주었습니다.
심지어 깡패도 마찬가지입니다.
깡패 두목이 직접 돈 달라고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똘만이들이 돌아다니면서 자기 두목 이름을 팔아서 상인들에게 돈을 거두어갑니다.
4. 이런 방법으로 돈을 거두어가는 것이 옛날이나 오늘이나 일상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다른 부하들을 시켜서 교묘하게 돈을 거두어갔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비난할 때,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과연 바울이 디도 일행을 통해서 교묘하게 헌금을 도둑질해갔다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여우 같고 사탄같이 엉큼하고 교활한 인간이라고 욕을 한 것입니다.
5. 그런데 겉으로 보면 8장 22절에 말씀한 대로, 바울이 디도와 다른 두 사람을 헌금 수령위원으로 보냈기 때문에, 일부 고린도 교인들은 꼼짝없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비난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같이 교활한 사람들은 믿을 만한 증거를 딱 댑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디도 일행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비난한 것처럼 교활하게 선교헌금을 착복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나 디도 일행이 성령으로 행하고, 진실하고 희생적인 사람들이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처럼 돈을 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6. 바울은 앞 절에서 말한 대로,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듯이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재물을 허비하고 자신까지 허비하는 희생적인 사도였습니다.
이런 희생적이고 사랑이 많은 바울 사도를 몰라보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헌금을 횡령해 먹은 도둑놈이라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희생적인 분들을 칭찬하고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칭찬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주고 더욱 풍성히 주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깨어 기도함으로 성령님 모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늘 진실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매튜폴(Matthew Pool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한 형제란 원문에 ‘그 형제’란 뜻인데, 고린도후서 8장 18절에도 나오며, 그가 복음 전도를 통해서 모든 교회들에서 칭찬을 받는 자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디도의 형제가 누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1.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 앞에서 욕심이 없는 것 같이 행동했지만, 디도를 보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선교헌금을 착복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바울 자신만 물질에 깨끗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헌금을 수납하라고 보낸 디도 목사도 돈에 대해서 깨끗하다고 주장했습니다.
2. 만일 디도가 선교헌금에 대해서 욕심부린 것이 있다면, 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도도 바울처럼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물질에 대해서 깨끗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물질에 대한 깨끗함’을 ‘성령님’과 연관시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입니다.
즉 물질에 죄를 지은 사람은 성령님이 떠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도적질하는 사람은 마귀에게 종노릇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 물질적 도둑질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선명하게 교훈해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네, 그것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즉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땅을 팔아서 헌금을 했는데, 절반은 감추고 절반을 땅값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아나니아에게 땅 판 값이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성령님을 속이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사도행전 5장 3절에서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의 혼이 떠나고 죽어버렸습니다.
그 후에 아내인 삽비라가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삽비라가 성령님을 속이고 거짓말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삽비라도 엎드려져 혼이 떠나고 죽었습니다.
5. 이 사건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돈을 감춘 것은 성령님을 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자신과 디도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했다고 말한 것은 바울과 디도가 동일하게 돈을 도적질하지 않았고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돈 문제에 깨끗해야 성령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돈 문제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영이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즉 물질에 탐욕이 있는 사람은 돈에 깨끗한 사람과 성령님의 교통이 잘되지 않습니다.
6.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관계를 할 때, 영적으로 성령님의 교감이 잘 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성령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거룩한 생활을 잘하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그래서 잠언 27장 9절에 “물에 비추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 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췬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진실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과 친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아모스 3장 3절에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면 어찌 동행하리요”라고 했습니다.
7. 성령님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는 사람은 역시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친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하는 사람과는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서 친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과 상대하려면 마음이 얼마나 갑갑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님 안에서 마음이 늘 서로 교통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8. 이것은 신자가 불신자와 상대할 때 그렇지만, 교회 내에서도 하나님 말씀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경시하는 사람과 친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9. 그런데 오늘 말씀에 디도는 바울 사도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디도 같이 동일한 성령과 동일한 보조로 주의 일을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새벽기도 생활을 잘하고, 함께 하나님 말씀 잘 순종하고,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잘 봉사하는 사람들끼리는 참으로 가깝고, 서로 만나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그래서 시편 133편 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과 디도처럼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고, 서로 아름다운 신앙으로 연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절. 너희는 이때까지 우리가 자기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1. 바울 사도가 디도를 통해서 헌금을 횡령해 먹지 않았다고 대답하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변명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가정하여 생각한 것임)
이처럼 바울은 진실을 이야기하는데도, 고린도 교인들은 계속 바울을 불신하고, 바울이 거짓말로 변명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것도 바울이 가정하면서 말한 것임)
이렇게 한번 사람을 삐뚤어지게 바라보면, 쉽게 바른 시각으로 고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첫인상을 좋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은 이단자들이 목사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목사에 대해 이상한 시각으로 선입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단자들의 공격과 비난에도 변함없이 목회자에게 좋은 생각과 따뜻한 감정을 가지고 계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말로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말을 하고, 하나님 앞에서 참된 말을 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 밖에서 자기중심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바울을 모함하는 말을 했습니다.
2. 바울은 산해드린 공회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으며 (행 23:1),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쓴다”(행 24:16)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우리들은 가끔 하나님이 안 보시는 것처럼, 농담도 하고 장난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갔습니다.
이렇게 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바울 사도에게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이 계속 거짓말을 하고, 또 변명을 한다고 모함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번 시각이 잘못된 사람은 계속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라>
1. 바울 사도는 지금 자기변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덕을 세우기 위하고,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이 올바른 신앙 가운데 서고,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은혜로운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도둑놈이라고 하든 안 하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은 실제로 도둑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도둑놈이라고 믿는다면, 바울 사도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적 손해가 막심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말을 진실로 믿고, 바울이 도둑놈이 아니고, 참된 사도임을 믿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은혜 생활을 하고,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은 자기를 도둑놈으로 비난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바울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자기를 도둑놈으로 비난하는 사람을 향해서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말 바울은 사랑이 충만하고, 원수도 사랑하는 훌륭한 사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즉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죽는 데 팔아넘길 줄 아시면서도, <친구여>라고 부르셨습니다.
참 너그러운 모습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친구여>라고 부르고, 자기를 도둑놈으로 모함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어떻게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말 대단히 넓은 마음의 소유자들입니다.
4.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했고(롬 15:5), 또 자기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너그러운 예수님과 바울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 행복한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절.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1.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대적함으로 바울이 원치 않는 모습대로 화를 낼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즉 평소에 바울은 성령 충만하고, 인자한 모습이었지만, 막상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너무나 불량한 모습을 보이면, 바울이 신앙적인 이성을 잃고, 화가 나서 책벌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 고린도후서를 써 보내고 그 후에 고린도에 갈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의 평상시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잃고 화가 나서, 사랑해야 할 고린도 교인들에게 화를 낼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의분이 나서 화를 내면, 물론 의로운 분노이기 때문에 올바른 일을 위해서 화를 내야 하겠지만, 화를 낸 사람도 힘들고, 화를 당한 사람도 심기가 불편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서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서 벗어나서, 바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3. 저도 가끔 일을 위해서 화를 내기도 합니다.
특히 함께 일하는 교역자들에게는 일 때문에 화를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교역자들이 새벽기도회에 안 나오든지, 설교를 잘못하든지, 교인들을 챙기지 않으면 책망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 때문에 화를 내기는 해도, 화를 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상대방도 큰 상처를 입고, 내 건강에도 안 좋고, 상대방과 관계 회복을 하려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도착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어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결별해서 바울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4. 이처럼 사람은 다 본질상 죄성이 있어서, 올바르지 못한 모습을 보면, 성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의분’이라거나, ‘정의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 1: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 앞에서 내 성질을 죽이고, 성령님의 아름다운 인내와 온유한 성품만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성령님이 내 마음을 주관하셔서, 오래 참고 성령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계시면서”, 갈라디아서 5장 22절 말씀대로, 성령님의 아름다운 열매인 인내와 온유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바울 사도가 염려하는 고린도 교인들이 고쳐야 할 9가지를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이 9가지는 모두 <분쟁>과 관련된 것으로서 3가지로 묶어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①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② 비방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③ 거만함과 혼란
1. 먼저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첫 번째 치명적인 죄성은 <다투고 시기하고 분내고 당 짓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의 3대 죄성이 <분노와 음란과 명예심>입니다.
그래서 하와도 이 세 가지로 시험을 당했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세 가지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먹는 것과 뛰어내리는 것과 영광의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모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툼은 음란과 권세욕과 더불어 중요한 죄성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마음에 분노를 가지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사람에게 퍼붓는 일을 잘했습니다.
물론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말씀한 대로 고린도 교인들은 음란한 일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처럼 <성질낼 것 다 내고서, 그래도 자기는 뒤 끝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상대방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고, 다음에는 상대하기가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뒤끝도 없고, 앞 끝도 없어도 분 내지 말고, 성질내지 맙시다!
나를 죽이고, 성령님의 사랑과 화평이 넘쳐나는 우리 교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둘째로 <비방과 수군수군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두 번째 잘못된 특징은, 남이 듣지 않는 곳에서 뒤에서 남을 악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에서 싸우는 것도 상처 주는 나쁜 일이지만, 뒤에서 중상모략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것도 첫 번째 못지않게 나쁜 것입니다.
앞에서 싸우고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은 남자들이 주로 하는 잘못이고, 뒤에서 흉보고 나쁜 말을 퍼뜨리는 것은 주로 여성들이 하는 잘못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오랜 지도자 역할을 하신 권사님들이나, 중직들은 수군수군하는 말이 돌아다니면, 그런 말을 전해주는 사람을 혼쭐나게 나무라십니다.
사람들의 본성상 특히 스캔들이 될 만한 일들은 소문이 빨리 퍼지고, 시작보다 끝에 가서는 크게 부풀려서 악소문으로 번집니다.
예컨대, 교회에서 중직자 자녀들은 교회에서 봉사와 활동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행사 준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어울리다 보면, 연애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방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에서 일하다 보면, 남녀가 함께 일해야 할 때가 많은데, 이런 비방과 수군거림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 권사님들 중에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일을 오래 해보신 어르신들이 계시기 때문에, 권사님들이 이런 소문은 잠재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어떤 분이, 성도님에게 다른 사람이 무슨 흉을 보고 고자질하면, 전해준 사람이 나쁜 줄 아시고, 나무라면서 시험에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여, 마음을 잘 지키시고, 언제나 성령님 모시고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3. 셋째로 <거만함과 혼란>입니다.
<거만한 것>은 오만불손한 태도를 가리키고, <혼란>은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분위기가 발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거만하다>는 것은, 교회의 장로님이나 권사님들이 나무라고 지도해도 듣지 않고, 오히려 대항하는 잘못된 행동을 가리킵니다.
또한, <혼란>은 교회에서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 안정되고 질서 있게 충성하지 않고, 어수선하고 어지럽고 무질서한 분위기를 가리킵니다.
이것도 역시 지도자의 지도를 받지 않고,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어느 사회고, 위아래가 없이 무질서한 상태가 되면, 마치 무정부 상태와 같이 조직 자체가 허물어지고 맙니다.
이런 무정부 상태는 이단자가 들어와서 목사를 비난하고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비상 계엄령과 같이, 교회에서는 권징을 행사하게 됩니다.
즉, 일벌백계로 핵심적인 사람을 치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고린도후서 13장 1-2절에서 “이제 가면 용서하지 아니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손으로 뽑아놓으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과 권사님들의 지도를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1절.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 하고>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방문 했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추종하는 것을 회개하지 않고, 계속 바울 사도를 대항함으로써, 바울이 낙심과 허탈감에 빠질까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온갖 고생을 해서 자식을 길러놓았는데, 막상 자식이 깡패나 창녀를 따라가서 자식 농사를 망쳐버린 허탈감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울 사도는 1년 반 동안 죽을 고생을 하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해놓았는데, 이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유혹해서 바울을 떠나가려고 하니까, 바울이 낙심되고 허탈감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지금껏 세상 출세를 다 버리고 복음 전도와 교회 설립만을 위해서 모든 정성을 다 쏟았는데, 커다란 고린도 교회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넘어가 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하고 기가 막힐 것입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평생소원이 자식들 잘되기를 바라고, 온갖 고생을 참고 살아왔는데,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죄악 된 길로 가버리고, 또 평생 땀 흘려서 키워온 사업체가 파산이 나서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하고 기가 막힐 것입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교회가 30여 년간 성도님들의 온갖 정성과 기도와 물질과 헌신으로 지금까지 부흥성장 해왔는데, 이제 와서 이단자들이 교회를 통째로 손아귀에 넣어버린다면, 얼마나 애통하고 기가 찰 노릇이겠습니까?
지금 바울 사도의 심정이 그런 것입니다.
3. 그러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따르던 성도들이 회개하고 바울 사도에게로 돌아온다면 얼마나 새 힘이 솟고 기쁠 일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런 희망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집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아버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고린도 교인들은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바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관건입니다.
만일 거듭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커다란 시험을 만나게 되면, 믿음을 버리고 불신자의 길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는 환난과 풍파를 당해서 일시적으로 흔들거려도 반드시 다시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28절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서 성도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고, 로마서 8장 39절에는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 하노라>
제미슨과 파우젯과 브라운(Jamieson-Fausset-Brown)은 ‘더러움’이란 결혼한 사람들이 범한 성적인 죄를 가리키고(딤전 4:7), ‘음란함’이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범한 성적인 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반스(barn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러움과 음란과 호색’은 당시 고린도 도성에 특별히 유행했던 죄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의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음란한 죄에 빠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이방인들의 부패하고 음란한 죄로부터 회심한 성도들이 아직도 그 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일 것입니다.
길(Gil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 도성은 음행으로 유명한 도성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창녀들’이란 말은 당시 일반적인 통용어로 사용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고린도에는 많은 음행의 유혹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의 비너스(아프로디테) 여신의 신전에는 천명 이상의 신성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이 신성 창녀들로 인해서 고린도에는 아주 많은 음행들이 있었는데, 고린도 교회의 많은 성도들도 이 음행의 죄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회개했으나 일부는 회개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음행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큰 죄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진실한 회개를 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복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교제가 단절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죄악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갖게 되기까지는 교제가 단절된 채로 있어야 합니다.
1. 고린도 교회의 2대 문제는 <분쟁과 부도덕>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죄성입니다.
즉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근본적인 욕망 두 가지가 <생존경쟁을 위해서 싸우는 것>과, <종족 번식을 위해서 성적 욕망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2. 그런데 오늘 21절은 바로 <성적 욕망에 대한 음행의 죄>에 관한 지적입니다.
3. <더러움>이란 성적인 부도덕에 대한 마음의 죄성을 일반적으로 표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음란함>이란 은밀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성적 죄악을 행하는 범죄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호색함>이란, 은밀하게 행하던 성적 죄악이 오래 묵어서,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부도덕한 죄악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4.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원래 고린도 도성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음란한 도시였기 때문에, 교인들조차도 이런 음란에 대해서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고린도 교회에서는 고린도전서 5장 1절에 지적한 대로, 계모를 데리고 살면서, 드러내놓고 자랑하면서 불륜관계를 행한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음란한 교인들을 고린도전서에서도 통렬하게 지적했는데, 바울이 다시 갈 때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바울이 낙심하고 슬퍼할까 두렵다는 것입니다.
5. 그러나 우리는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고 몸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우리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한 그릇으로 쓰십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2장 21절에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서, 마음이 청결한 사람에게 임재하셔서 역사하십니다.
6.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손발이나 눈이 범죄하게 하거든 짤라버리고나 빼버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8:8-9).
이 말씀은 이런 단호한 결단과 회개로 범죄를 단절하라는 말씀입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성직자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후에는 밤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선 그 후에는 성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님 믿을 때 이런 처절한 회개와 회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부도덕한 죄를 끊으려면, 처절한 회개와 반성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은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기도하여 성령님의 도움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딛 3:5)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더러움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9절에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3절에는 ‘주의 말씀으로 깨끗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늘 기도하여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 은혜를 받아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님들과 직분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