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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8)
그럼 도대체 이곳 국망봉 도마치봉 백운산 삼각봉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전투는 어떤 성격일까?
아니 그 '51.4월공세에 사창리에서 패한 6사단이 다 전사한 곳일까, 아니면 중공군이 후퇴하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숨져간 곳일까?
광덕산의 이야기는실체가 없다.
복주산이 그렇고 독바위가 그렇다.
하오고개도 그렇고 뼈밭골의 실체도 사실 없다.
죽은자의 영혼은 추운 오늘도 산맥을 오가며 적을 찾고 있을게다.
전후 70년이 되어가는데 제대로된 전쟁사가 없다. 제발 북하니 빨리 문호를 개방하여 전쟁관련 사실을 많이 토해냈으면 한다.
우리가 몇천년 몇만년의 구유적지를 발굴하고 그 관련된 이야기를 증명해가듯 더 늦기전에 지구상에 단일 민족끼리 피를 나눈 전쟁의 역사를 옳바르게 구술하고 읽혀져야만 한다.
왜 지고 왜 이겼는가의 작전술적인 분석이 아닌 어디서 싸웠고 그 젊은이들이 어덯게 산화되어 갔는지 역사가 증명해 보여야 한다.
아직 많은 참전용사님이 생존하고 전쟁의 신이라는 백선엽 장군도 살아있다.
영웅담을 듣고 싶은게 아니다. 슬픈 이야기를 듣고 싶다.
잘싸워서 용사를 많이 전사케한 그 괴기한 이야기는 이제 거둬야 한다.
좀더 냉정한 양심으로 신앞에 맹세하고 왜 전쟁이 났는지, 그리고 어디서 죽어갔는지 밝혀야한다.
거짓부렁으로 기술된 전사라도 사실 값어치는 있다.
진실이란 살아서는 모른다. 죽어야만이 밝혀지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전사는 산자들이 입으로 구술하고 똑똑한 후배들이 포장하여 그럴듯하게 되었다. 아니 전쟁통에 무슨 전투상보를 기술했으며 포위되어 죽다못해 사단장도 잠뱅이 걸치고 방태산을 넘는 마당에 뭘 지휘했다는 말인지.
아니 한강물이 굽이쳐 흐르는데 살아서 만나자며 홀딱벗고 강물에 뛰어 들었는데 무슨 한강선 방어를 조직적으로 했다고 하는가.
행주나루터에 가봐라, 수없이 죽어간 그 자리에는 물버들나무마저 없다.
비는 퍼붓고 낙동강가의 모기는 철모마저 뚫고 용사의 눈알을 향해 독침을 꽂는데 각하는 모기장안에 펜치만 입고 앉아서 밥상을 받았다는 것이 영웅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11월의 북풍한설도 무척이나 차가운데 중공군 피리소리 들리고 꽹과리 쳐대며 깃발들고 나타난 적군 앞에 살기 위해 얼마를 산속으로 헤매며 돌았는데 무슨 압록강 물을 대통령에게 들였단 말인가...
용사들은 말했다.
얼마를 진격하는데 사실 북으로 올라가는 것은 선착순이었다.
갑작스레 강이 나타나고 압록강이라 했다. 어슴풀한 안개속에 모두가 그런줄 알았다.
하지만 그 강은 대령강이다.
물을 들고 달리다 그만 나뒹굴고 중공군이 바로 서 있다.
북풍이 불어오고 먹을 밥은 고사하고 물도 없었다.
남으로 내려온 북한군 학도의용군이 기계 어래산 골짜기에 야전 솥걸이 설치하는 것을 관찰했다가 그만 배가 고파서 취사장에 와서 손들고 "밥좀 주세요, 저 남한 연세대 학생입니다."했다던 그 진솔한 이야기 잊었는가.
탈렌트 김영옥씨의 오빠도 연새대 학생으로 조국 해방전선에 머리띠 두르고 참가 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는 지금 살아서 북에 있다.
좋은 세상 만나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정은 을 찬양하는 퍼포먼스를 해도 영웅이 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내가 만난 시골 전쟁터에 이야기는 왜 그리 연세대와 이화여대 이야기가 많은지.
가장 센티하고 예쁜 대상들이 가정도 부유한데 왜 그들의 앞잡이 되어 총을 들고 전선의 동지들을 위해 몸바치는 여성전사가 되었는지 역사여 밝혀주라.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왜 사건이 되고 제주도 4.3사건이 왜 민주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는지 속 시원하게 밝혀주라.
이제 그 진실을 반대편에서 설파하던 반대편에서 말하는 늙은이들은 죽어가고 그 반대편 유가족들은 한속에 똘똘 뭉쳐서 큰목소리내니 그게 진실이 되어간다.
"역사는 목소리 큰 사람의 소품이다."라고 차라리 외쳐라.
싸우지도 않은 사람이 영웅이 되어 태극무공훈장의 사나이 되고 베티고지 전쟁터에서 포탄에 쓸어져 실신하여 후송된 사람은 여기 있는데 그 후속으로 들어가 교통호속에서 엎드려 있다 나온 사람은 태극무공 훈장에 별별 수식어가 다붙어 난리인 전사책
"충성, 그 명령 이행하지 못해 죄인입니다."
이제 그 진실마저 간직한체 하병열 용사님은 눈을 감았다.
저기 밥풀고지에 묻혀있는 이영옥 상사와 8인의 영웅을 나에게 발굴하라 명령하셨다.
임진강을 바라보며 휄체어에 기대어 울먹이던 그 용사님 잊지 못합니다.
몽락전투가 그렇고 화령장 전투가 그렇다.
쓰디쓴 이야기들이 줄지어 기다리지만 내가 들은 것은 나만의 독백, 절대로 정사라고 하지 않는다.
다만 전쟁이란 불특정 상황에서 목숨을 담보로 하는 행위인데 산자는 무엇이고 죽은 자는 무엇인가?
정말 살아있는 영웅분들이여 진정한 영웅은 저기 엄동설한에도 조국산하를 지키고 있는 전사자라고 큰소리로 외쳐주소서!
이곳 전투는 6사단이 아니라 2사단이며 중공군이고 미군이다.
중국공문서와 자료를 기초로 기술한 '박식의 6.25전쟁과 중공군'이란 책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당시 중공군은 유엔군을 서울, 또는 한강과 소양강 이남으로 몰아 붙이고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달리는 사선형 전선을 구축하는데 있었다고 본다.
그래서 5으ㅓㄹ1일 노동절을 맞아 서울을 점령하여 스탈린에게 선물로 주려했다고 본다.
그들은 미군의 기계화 부대와 기동력을 갖춘 화력을 두려워 하였다.
그래서 서울로 접근하는 평지인 문산이나 의정부 축선을 호피하고 춘천-가평-화천ㅇ로 연결되는 중동부 전선ㅇ의 산악과 협곡으로 우회함으로써 유엔군이 지난 1.4후퇴처럼 한강이남으로 빠져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바로 국군 6사단의 사창리 전투와 영국군 황실대대가 목숨으로 버틴 감악산 설마리 전투였다.
우리 6사단은 3일간의 전투에서 무려 1,600여명의 손실을 입고 무기력하게 가평밑으로 철수해 나간 반면에 영국군 27여단이 가평에서 교두보 확보작전을 잘 수행하여 그나마 홍천강 이남으로 내려가 재편성의 기회를 가졌다고 본다.
하지만 서부전선에서는 영국군이 대대장 '카느 중령'이 포로가 되면서까지 버티고 600여명의 피해를 감수함으로써 중공군의 서울 침투를 저지했다.
6사단 전사에도 2사단 전사에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이곳 광덕산 일원의 전투사는 재조명 되어야 한다.
4월전투의 6사단이 아니라 5월공세를 물리치고 다사 와이오밍선으로 진격하던 때에 우리 2사단이 복주산-대성산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고 그 대표적인 전투가 대성산 밑의 1026고지 전투며 이곳 광덕산-복주산 전투였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 우측은 미7사단과 국군 6사단이 파로호신화를 만들며 적근산 백암산으로 진출한 것이 화천-김화 진격전으로 '51.6.5~6.11어간에 이루어진 전투다.
우리 전사에도 보면 연천-동두천지연전의 미제 1군단 우측 사다닌 미24사단이 국망봉 바로 밑의 1,010고지에서 그들에게 배속된 유격 8중대가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정찰중 중공에게 포위되어 구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바로 그 위가 국망봉-도마치봉-백운산-광덕산으로 종격실로 연결된다.
반면 우리 6사단의 사창리 -가평전투기록을 보면 중공군 20군과 40군에 밀리어 방화동과 백적산에서 그 다음 국망봉-석룡산, 화악산-매봉으로 철수해 내려가는 것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도마치봉-석룡산, 화악산-매봉이 아닐까 한다.
이는 미군이 주로 화력으로 초토화 시키고 중공군은 고지 능선상으로 이동하면서 공격 또는 축차 방어를 하다 죽어가고 중대규모라도 싸울 수 있는 곳이 도마치봉이며 그 위로는 다시 종격실 능선에 사실 큰전투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다 광덕산에 오르면 횡격실 능선으로 저멀리 철원평야가 감제 되기에 중공군은 결사적으로 방어하려 했을 것이다.
내 장인어른 생전('16년도에 88세로 운명하심)에 미군이 이곳 신술리에 저기 광덕산에 올라 왔다는 증언과 지역 주민들이 광덕산에서 미군이 무전을 치고 높은 분들이 왔고 헬기도 왔다는 증언에서 어느정도 가늠해 볼 수 있는 분석이 된다.
물론 일부 병력이 그곳으로 후퇴해 갔다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기록에 가평계곡을 따라 흐러내려 영국군 엄호하에 불기산(601m)일대로 점령했다고 하는데 이내용도 석연찮은데가 많다.
바로 불기산 앞이 대금산(706m)가 있고 바로 밑이 청우산(619m)이 있어 사실 600여 m의 고지군이 트라이앨글로 펼쳐 지는데 하필 불기산인지 의아심이 든다.
그래서 이곳 두밀리 일대와 상색리 상천리 하천리 덕현리 일대를 탐사및 탐문을 해 보았지만 국군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중공군과 동침을 했다는 이야기는 많았고 그 능선에 부역자로 가서 박격포탄도 나르고 고생했으며 먹을 것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개인호도 도마치봉 일대에 조금 있고 사실 기대에는 못미치지만 일부 아군호 모습을 하고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이 전형적인 중공군 호 구축 모습이다.
더 한가지 분석자료로써 의미있는 내용은 좌측에서 기동하는 미군은 전차포로 웬만한 고지는 초토화를 시킨후에 우회하게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국군이 이 높은 고지에 올라서서 후퇴해 가거니 진격했다는 것은어색한 변명이 된다고 본다.
아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걸려들었다고 조직이 와해된 군대가 어떻게 축차진지 운운 하며 잘 싸웠다는 것은 아닌 것같다.
빗고개에서 만난 어느 시골 할아버지는 본인이 직접 아군 소위를 묻었다고 한다.
불기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8부능선쯤에서 당시 17살에 아러비를 따라 갔다가 너무 보기 안좋아 그 자리에 흙으로 두분이서 덮어 주었다고 한다.
어떻게 아군인지는 알았느냐는 질문에 전투복 입고 칼빈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 총은 어떻게 하셨어요?"
"아니 산에 총이 널려 있어서 이 한자루만 갔다 주고 신고 했고 다른 총 한자루는 얼마전까지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파출소에 갔다 주었지."
"그럼 지금 산에 가면 총을 발견할 수도 있겠네요?
"아냐, 없어요. 그 이후에 경찰이 지역주민을 대동하고 다 수거했고 나중에 여기저기 산에 다녀봐도 총도 업소 박격포탄도 안보여요."
"혹시 이 산에 불은 몇번이나 발생했나요?"
"아마 전쟁이 끝난 후에 한 5~6번 발생해서 큰 소나무들은 다 타버리고 지금 참나무들이 들어차서 잘 다니기도 힘들어요."
주로 중공군이 능선을 따라 이동하는 거만 목격했고 국군은 그저 올라 가는가 싶더니 바로 북한강건너로 내려갔단다.
빗고개나 주발봉 호명산으로 이러지는 능선을 따라가면 북한강이고 지금의 청평호가 나오게 된다.
"국군이 무슨 전투, 왔다가 바로 저 밑으로 내려가 도망치고 중공군만 가득했는데 뭘... ."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절대 국군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싸워보지않고 무슨 소리를 지금 한다는 것은 죄악이다.
다만 우리 환상에 젖어 영화나 드라마처럼 전쟁을 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된 기록과 증언이 남겨져야만 언젠가 다시 들이닥칠 그 위험한 시기에 바이블이 되는 것이 목적이다.
나는 신포리에 가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해보았다.
"죽은 군인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곳이 정확한 행정구역상 이름은 오탄리이다.
현재 당시 군인이 죽어서 화장을 하던 것은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의 간담회는 여느동네보다 무시무시한 내용들이 많았다.
우리가 중공군 4월공세로 사창리에서 국군 6사단이 무너지고 이를 지원하던 미군의 화력지원수단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한 4.2"박격포 13문과 무전기 242대 파량 73대의 손실을 입는다.
그러니 얼마나 인명피해가 많았겠는가.
그당시시 미제 해병1사단이 우리 해병연대를 배속 받아 이곳으로 진격해서 우리 해병연대는 동쪽 해산일대에 들어갔고 백적산 우측을 경계로 미해병 7연대가 토보산을 5연대가 화천읍 북방으로 진출해 있었다.
미 해병대는 중공군이 장진호에서의 사투를 벌인 악몽이 있어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우리 6사단을 포위소멸하려 했던 것이다.
매봉에서 흘러 내리는 고지는 1,000m고지ㅣ맥으로 북으로 흘러 내리고 또한 우측으로는 원평리로써 북한강에 이르는 곳으로 방어나 철수하기에 용이한 곳이다.
이곳 오탄리에는 그래서 후사면에 중공군 임시 묘지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 밭으로 변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살아있던 어른들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많은 유해가 묻혀있었다고 한다.
이동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김할아버지(2017년 운명)는 밭에서 겨울 무우를 심으러 따을 ㅍ파다가 유해가 나와 그저 돌들이 많이 있는 곳으로 던져버리고 말았다 하였다.
우린 그 돌무덤에서 파란 이끼가 끼인체로 자연속으로 분해해 들어가는 유해를 찾아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도 없다.
그래서 주변을 샅샅이 정밀 탐사했지만 파편 몇개와 M1탄피 몇개 밖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삭으로 그옛날에는 밭을 불하받아 일구눈 사람들이 그냥 불도져로 밀어버리고 곡식을 재배했다고 하니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다.
그 동네 맞은편 마산과 진잘고개일대도 중공군 무덤이었다 한다.
마을 이장이 여기서 내려가면 바로 버스타는 곳의 가계주인어른이 있으니 만나보라했다.
찾아가 들으니 정말 기막힌 이야기가 이어진다.
'51.4월공세가 진행될때 본인은 11살의 나이로 피난가지않고 이곳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머물러 있었다 한다.
그런데 뭔지는 모르지만 길로 들어가던 포들이 뒤로 돌아 달리고 이어서 중공군이 쫒아오는 전쟁이 크게 벌어졌단다.아랫말 일대와 오탄교일대에서 전투가 있었고 많은 군인이 죽어서 길거리에 그대로 남겨진체 아군은 떠났다.
길거리에 아군이 남긴 차량이며 탱크같은 것도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미군 비행기가 중공군이 못 가져가게 비행기 폭격으로 다 불태워 버렸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일부는 불타고 일부는 사창리로해서 북쪽으로 간다고 갔는데 그건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 왔는지 북한군일부가 편승하고 장비를 시동걸어 움직이는데 그냥 죽은 군인이 있는 길거리에 그대로 굴러가버려 머리가 터지는 소리... ."
우리 용사님 죽어있는 그 위로 운전연습을 시키고 탱크인지 자주포인지 궤도로 시신을 갈아버리는 극악무도한 짓을 직접 목격 했다.
그 빨간 피를 바라보며 좋아라 박수치는 중공군과 북한군 일부 사랍이 아니였다.
그러더니 억수로 비가 내려와 그 고약한 냄새를 다 쓸어가고 몇몇남은 사람들이 보기 흉해서 여기저기 긁어서 묻어버렸다 한다.
'51년 4월전투를 목격한 지역주민이야기는 정말 비참하였다.
얼마나 많은 군인이 죽었는지 길거리에 전수 시체바다였단다.
원래 북한지역으로 이곳사람들은 말타고 다니던 쏘련군도 잘 알고 전쟁중에는 중공군도 잘 알았다.
화천에서 원천리를 거쳐 원평리 신포리가 그당시는 춘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기에 이곳으로 모든 기계화 부대들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많은 국군이 전투하는 모습을 이곳 사람들은 보질 못했다고 한다.
신포리의 교회 목사님도 전쟁후 10년정도 지나서 이곳에 들어와 목회활동을 하고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정말 낙후되어 보잘것 없는 산골마을 그대로 였으며 땔감을 구하러 산에 올라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당시 산에는 아직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 철조망이 처있고 그곳에 군복이 걸리어 아직 썩지않고 그 한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다.
동네 사람들 대다수가 그곳에서 주워온 철모속 화이버로 똥바가지를 다 만들었다니 그 시대이야기다.
"목사님, 그럼 유해는 보지 못했나요?"
"아니지요, 너무 많이 하얗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거기서 수통이나 함구라고 도시락통같은 양은으로 된 것이 있으면 그거나 주어서 사용했지요."
"네, 사실 이곳 신포리에는 저쪽 오탄리나 원천리보다는 오래 사신분이 없어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다만 신포리 밑의 원평리가 그당시 38도선으로 접경지역이니 아마도 이런 저런 이유로 대다수가 북한군을 따라 갔던가 아니면 피해를 많이 받아 흩어져서 그렇다고 보면 될 겁니다."
"한 20년전까지도 산에 자주 올랐는데 그때까지도 뼈가 보였는데 당시 동네 사람들 이야기가 주로 지촌리 뒤산에서 전투가 조금 있었지만 국군은 바로 떠나고 중공군이 진을 치고 있는데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여 다 죽었다고 합니다."
"예, 오탄리쪽에 들어가 이야기 들으니 그쪽에 중공군 임시 묘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차한잔 하고 가라는 목사님을 따라 싱그러운 여름날 오후에 춘천댐을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이곳에 공병훈련장이 있어서 그런지 군인들이 무슨 부교같은 것을 설치하는지 철수하는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대대장시절 들어가 보았던 광명사로 올랐다.
한 10년은 지났는데 그절 그대로 있다.
주지스님이 저확하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비구니스님이 기도하고 있는 곳으로 고려시대부터 있던 절인데 전쟁으로 페허가 되었다고 한다.
안내를 받아 친교실에 앉아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하니 산에 올라서지 않아 그 실체를 본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일반인이 믿기 어려운 기운이라는 것이 있는데 부상군인들이 많이 나타나고 오늘도 사실 중요한 "사람이 온다고 대우를 잘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무일을 보시는 분에게 전화를 하여 혹시나 그옛날 이야기좀 아시면 와서 만나라고 하니 그 분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분도 어릴적에는 여기서 산 것이 아니고 들어온지 30년 된다고 한다.
역시 주변사람들 이야기처럼 처음에는 뼈들이 널려 있었으나 어느날부터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고 하며 10년전후에는 아예 산에 들어가지고 않는다고 한다.
바른골로 들어가 보았다.
이곳은 바로 38도선이 지나는 곳이다.
마침 밭주인이 경운기를 이용하여 밭을 일구고 있어 기다리다 만나 보았다.
그런데 의외로 이분은 7살의 어린 나이에 군량대에 살았다고 하며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쏘련군들이 말을 타고 폼잡고 나타나면 서로 달려가 구경하고 그를 따르는 북한군이 저리가라고 소리치던 생생한 기억이 있단다.
북한지역이니 당연히 학교에서는 김일성찬양 노래를 배웠고 전쟁나기전에 이곳으로 탱크같은 것이 들어왔는데 신기해서 모두가 구경하려 몰려들기도 했단다.
아마도 옥산포지역 전투에 나타났던 자주포가 아닌가 싶다.
그 유명한 심일소위의 무용담이 펼쳐진 옥산포에 나타났다가 아군의 육탄공격에 뒤로 밀리고 3일이나 춘천을 방어하여 서울을 포위소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계획을 무너뜨린 곳이 춘천지구 전투다.
쏘련군이 와 있으면 북한군은 그들에게 아양떨며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었단다.
당연히 그 조건에는 여자도 포함되고 쏘련군이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니 소련군이 온다하면 여자들은 모두가 산속으로 숨어들어 북한군이 잡으러 다니는 촌극이 빗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본인 밭에 이상한 유품이 나온다며 안내했다.
"전투화가 보이고 수류탄이 보인다."
흙을 파낸 돌바위군일대에 뼈조각이 여기저기 있고 파편도 보인다. 피아는 모르지만 분명 군인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전쟁중에 아군의 포로를 숨겨두는 곳이 이 일대라 한다.
우린 보고서를 쓰고 '13년도에 2구의 유해를 발굴 하였다.
'51년도 중공군 5월공세해서 승기를 잡은 아군이 이곳으로 진출하고 중공군 1개사단이 괴멸하는 대 전과를 올리고 6사단이 들어왔다. 미군도 왔다.
오탄리 이 교회땅에 시신처리소를 만들고 어디서 실어오는지 많은 군인들의 시신이 실려왔다.
전 이장이신 어르신이 11살의 나이에 궁금도 하여 그곳에 가 보았다.
김중사,"야 너 꼬맹이 저리가. 보면 안좋다."
"형, 보면 안돼. 보고 싶은데."
"그러면 너 저기 가서 먹는 밥이나 가져와라."
이렇게 해서 당시 이곳 책임자인 김중사의 심부름꾼이 되어 현장에 함께 있에 되었고 밥도 얻어 먹게 되었다.
노무자들이 수없이 많았다.
어린 나이에서부터 40이 다 된 아저씨까지 지게지고 단가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홍격연수원 뒤쪽으로 밭들이 있는데 예전에 화전민들이 살던 곳이다.
이곳도 유해가 널려있어 군데군데 돌더미처럼 모아놓고 일제 트럭이 들어와 실어서 이곳으로 날랐다. 숫자는 얼마인지 모르지만 많은 숫자임에는 틀임없다.
노무자 그분들이 불쌍했다고 한다.
군복도 없고 어디서 얻어입었는지 중공군 누비옷을 여름이 다오는데도 걸치고 다니고 총도 없이 군인이 하라는대로 해야만 했다.
먹는 것도 군인이 먹고 난 다음에 먹어야 하고 정말 호되게 주어맞는 경우도 있다.
군화발로 차고 총을 들이대고 귓싸대기 처발르고 그러면 살려달라고 손달토록 빌던 모습들이 이장님의 눈가에 선하다.
김중사는 이곳의 하리마오다. 나이도 별거 아닌데 계급장을 붙여주니 안아무인이 되었겠지라 한다.
노무자들이 마른 나무도 여기저기서 해댄다.
일정 깊이로 땅을 파고 나무를 깔고 뭔지 모르지만 기름인가 붓고 다시 시신을 올리고 나무를 덮고 불을 붙인다. 그러면 얼마 있어 뻥뻥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머리있는 시신이 그리많지는 않아 보였다.
그리고 불이 꺼지고 도 노무자들이 달라붙어 목함을 이용하여 까만 재를 담는다.그러던 어느날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날리가 났다.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김중사가 돌아버렸다. 총을 마구 쏘아댄다."
조금 섬짓한 이야기지만 사람을 불태울 때는 엎드려서 태운다 한다. 바라 이야기는 정상으로 뉘이면 배가 먼저 부풀어 올라 잡아당기는 역활을 하여 사람이 일어나 앉는 모습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화장장이라 할지라도 이런 모습 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김중사가 미쳐버려 총을 마구 쏘아대니 군부대뿐만 아니라 동네도 난리가 나 모두가 숨어버린다.
별별 이야기가 많다.
우리 여인을 사랑한 한 미군은 잊지 못하고 부대를 따라가지않고 남았다가 그들 헌병에 잡혀 떠나고 소문으로 살기 어렵게 된 여인은 결국 저 북한강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등... .
"저 토보산 밑에 미군이 묻혀 있습니다."
우린 지역주민 제보로 머구지로 향했다.
'51.4월 중공군 공세시 미 해병이 이곳에 진출한 적이 있다.
종전후에 대부분 들어온 사람들인데 산에 가니 "호구덩이에 3명이 죽어서 뼈가 그대로 있기에 크기를 보니 허벅지뼈가 엄청 컷다"다는 제보였다.
머구지에 들어가 좌측에 집 몇채가 있는데 가장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이 사는 집을 찾으니 나이 80에 화전민이란다.
"어떻게 미군이라 할 수 있는 단서를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고 한 55년인가 그때에 이곳에 들어와 화전에 산에서 나물캐서 춘천시장에 팔아서 먹고 사는 시절에 올라가니 정말 허벅지뼈가 길어서 무섭지도 않아 그걸 하나 들어서 길이를 비교해 보았지요. 그런데 엄청 길어요."
"다른 유품은 없었습니까?"
"유품은 총도 있었고 수류탄에 탄피들이 주위에 깔려 있었는데 신발은 비맞고 상해소 못신게 되어 버리고 총은 갔다 군부대에 넘겼지."
그 이후로는 산을 들어가 보지못해서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고 한다.
"100여구의 유해가 발굴된 서오지리 건는들 이야기"
원천리에 들어가 100세가 다 되었다는 할아버지 한분을 만났다.
정대순 할아버지는 줄곧 이곳에 살아온 분으로 지역사정에 깨나 밝으신 분이다.
"전쟁은 어디에서 많이 했습니까?"
"말고개에서 좀 많이 해서 시체가 쭈욱 깔려있고 제일 큰 전투는 매봉산이야, 그당시에 거기 올라가서 총도 줍고 탄피도 수없이 주어서 팔았어요."
"저기 밑으로 돌아가면 땅굴이 있는데 그곳에도 뼈밭골이 있어. 옛날에 그곳에 국민학교가 있었는 춘천댐으로 수몰되었지."
"그 곳에서 잠들다가 일부군인들이 죽기도 했지만 중공군이 제일 많이 죽었어요."
동네에서 사람들이 들어가 마을구석구석에 죽어있는 시체를 전수 마을 뒤 교통호에 묻었고 일부는
나란하게 애기무덤처럼 묻기도 했지."
우린 단숨에 달려갔다.
그리고 동굴을 찾았다. 일제시대 금광을 캔다고 파다가 그만두었다 한다.
동굴은 산위에도 있고 산 밑에도 있었다.
지금은 춘천댐으로 물이 차 올라 마을이나 학교의 형태는 찾을길 없지만 바로 뭍으로부터 10m어간에 교통호가 빙돌아 구축되고 야산으로 능선을 연결하여 새고개-달거리 고개로 해서 서오지리 뒤산으로 능선이 연결되어 결국 토보산 북쪽 812고지로 이어지는 이동로로써 아주 좋은 곳이였다.
개인호숫자는 500여개, 교통호 길이는 2km도 넘는 길이였으ㅕ 서북쪽으로 끊임없이 연결 된다.
나는 달거리고개에서도 올라 토보산 위로해서 812고지 927고지로 해서 사창리 용담 마을로 혼자서 외로운 행군을 계속 했다.
그리고 2010년 발굴작전이 진행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땅 소유주가 나타나 시비가 시작 되었다.
원래 해당부대에서 땅소유주를 확인해서 발굴허라글 받아야 하는데 국유림으로 알고 춘천시에 통보하는 것으로 가름하고 말았던 것이다.
산림청 공무원을 30여년 했다는 황씨 아저씨가 난리가 났다.
국방부에 민원을 넣겠다는둥 너무 큰소리를 치니 발굴 이승원팀장이 나에게 구원요청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27사단에서 잘못한 것이기에 그곳이 1차 민원발생 책임이 따른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순 묘를 건드린 것도 아니고 생땅을 파내는 것도 아니였다.
해봐야 교통호나 개인호에 물려있는 나무 몇그루 피해를 입는건데 막무가내로 보상하라 한다.
손발이 달토록 싹싹 빌며 사업의 취지를 알리고 원상복구를 완벽하게 해 드린디고 해도 아니다.
어린 손자뻘인 군인들이 듣고 있는데 군인을 빗대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욕도 하신다.
"군바리 너희 새끼들 잘 걸렸어."
"지역주민 피빨아먹고 생색내는 새끼들."
"김일성이 있을 때도 남의 땅에 손대지 않았다."
"뭐, 국민의 군대, 우끼고 있네."
등등 욕을 얼마나 하는지 저만치 가서 병사들 듣지않게 욕하시라 해도 막무가내다.
나도 빌만큼 빌었고 욕먹을 만큼 먹었다.
더이상 양보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병력을 철수하라 하고 "할아버지 법대로 하십시요."하고선 자리를 떠났다.
몇일 있으니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것이다.
그래서 만났더니 국방부에 무슨 대령이 있고 보상관계를 알아보고 등등 했다며 계속 적절한 보상을 원하는 말투였다.
난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이유는 그후에 땅의 소유에 대해 정확하게 지적도를 확인해 보니 무려 15인의 명의로 일대가 되어 있고 본인 땅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국가보상을 해봐야 물과 몇십만원이다.
하지만 내가 제시한 조건은 유해발굴에 증언을 해준 증언비를 최대 70만원까지 줄 수 있는데 그걸 조치해 드리겠다고 했었다.
어ㅐ냐하면 원천리 할아버지는 개략적인 말을 한 것이고 이 황할아버지는 소유권을 가진 주인인데 알고 보니 조상이 대대로 살았고 댐으로 수몰 되면서 모두 이사해 나갔다.
그래서 우리가 발굴하고자 하는 가장 밑으니 지맥 정상에 묘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묘였다.
또한 본인이 아주 어렸을 적에 직접 유해를 단가에 옮기는 것도 목격했다고 증언을 한 것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인이 알아보니 얼마 보상이 안된다고 하니 더 많이 준다는 나의 제안을 받기로 한 것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 많은 욕으로 수모를 주더니 몇푼에 얼굴을 바꾸는 모습이 무서웠다.
지금 그분의 아들이 공무원이다.
나에게 편지 한통을 주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발굴 재개시를 알려주고 짚차에 올라 편지를 뜯어 보았다.
"젊은 장교의 가슴에 비수를 던진 것같아 잠이 오지않아요. 미안합니다."
나는 지금 그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 너무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사실 내가 책임질 일이 아닌데 죄라면 "단 한구라도 더 발굴하려 한 것 뿐
발굴하는데 칼빈소총도 판쵸우의에 감싸 묻어 놓은 것이 그대로 발굴 되는가 하면 엄청난 탄피와 파편들이 발굴 된다
온전한 유해는 없이 교통호에 군데군데 모여서 발굴 되는데 두개골은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조각유해로 모아져 있고 뼈가 온전한 것이 없는 이유가 수상하여 지역을 탐문해 보았더니 수몰이후 동네사람들이 떠나고 문등병환자며 남자들 몹쓸병에 좋다는 소문으로 몰래몰래 들어가 눈에 보이거나 일부 발굴해서 약으로 먹었다는 이야기 찾았다.
더구나 일부는 이걸 발굴해서 돈받고 팔기도 했다고 한다.
일부 유해는 동물이 갉아먹어 허벅지뼈에 그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떤 유해는 나무등걸에 기대인체 앉아 있는 모습도 있다.
불과 마을로부터 얼마되지 않는 곳인데 누가 전투했을까?
개인호 구축 실태로는 아군이 아니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이다. 왜냐면 남쪽으로 아주 산 밑에 굴토된 모습은 올라오는 적을 향해 버티기를 하려 했던 것인데 확증된 사료는 없다.
최초에는 북한 지역이였고 북진하여 올라갈 때는 우리 5사단이나 2사단 일부가 방어하고 있었을 것이고 '51.3.15일 서울 수복이후 재 진격할 때는 우리 6사단이나 미 제 해병1사단이 진격했다.
그 대상은 모두 중공군이다.
중공군 4월공세 때는 미군이고 5월전투 때는 우리 6사단 미군 7사단 미군 24사단이 이 지역에 들어오며 중공군과 일전을 벌였으니 북한군은 아닌듯 싶다.
5월전투에서 중공군은 용문산전투에 패하여 일사천리로 후퇴하면서 아군의 기동전에 말려들어 무려 38,000명이 포로가 되고 파르호에 수많은 병사가 수장되었다.
원평리에서 신포리-지촌리-오탄리-서오지리-원천리에 이르는 구간에는 당시 중공군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국군이 들어와 지욕주민들을 데려다 바로바로 길 옆에서 화장하여 태워버렸으며 지금도 파보면 까만 재가 실제 나온다.
어느 곳에는 중공군인지 북한군이지 대위급 장교의 무덤이 있기도 하는데 잡풀이 우거져 제대로 식별도 곤란했다.
그때만 해도 북한군이나 중공군은 발굴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에 발굴하지는 않했다.
우리가 지금 중국으로 보내는 것은 아군을 발굴하는 고정에 나온 것이지 일부러 발굴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이제는 모두 80을 넘어 자연으로 돌아가신다.
이런 무덤의 실체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상식수준이다.
동네 사람들이 묻었고 혹시나 그 사람이 팔뚝에 차고 있는 시계를 획듯하려 파 보는 경우가 많다.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계급있는 자들은 대부분 팔뚝에 시계를 4~6개씩 차고 다닌다는 통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