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만남의 자리는 점차 귀해지기 마련이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건강할 때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맞대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지혜이자 상책이 아니겠는가. 전현철 지회장이 부임한 후, 우리 사자중대 모임이 분기별에서 2개월에 한번씩 바뀐 까닭도 바로 이러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변화다. 유난히 무더위가 일찍 찾아온 유월의 어느 날, 우리는 푸른 숲이 그리워 서울 도심 속 비밀의 숲, '홍릉수목원'으로 향했다.
홍릉숲은 1922년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우리나라 1세대 수목원으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어느 깊은 산중 못지않은 울울창창한 장관을 품고 있다. 이날 모임에 뜻을 모은 사자는 모두 13명. 약속시간 10분 전, 고려대역 3번 출구에 모인 동기들은 서로의 건강을 확인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수목원으로 향하는 회기로 길을 따라 10분 남짓 따라가니, 숲해설가 김수희씨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었다. 10년의 내공을 지닌 베테랑 해설사의 정겨운 안내와 함께 마침내 푸른 숲의 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모감주나무였다. 중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안면도 등 서해안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 나무는 청사초롱을 닮은 열매를 맺는다. 그 안의 까맣고 단단한 씨앗은 만질수록 윤이 나 예부터 큰스님들의 귀한 염주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연못가의 피나무 앞에서는 옛 사람들의 지혜를 배웠다. 가구와 밥상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궤짝까지, 버릴 것 하나 없이 인간에게 삶의 터전을 내어준 고마운 나무였다. 숲 깊숙이 들어서자 미국 미시시피강 저습지가 고향인 낙우송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을이면 새의 깃털 같은 잎이 떨어진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는데, 더 신기한 것은 뿌리였다. 축축한 땅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땅 위로 볼록볼록 솟아오른 공기뿌리들은 마치 삼천불상이 모여 있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연의 생명력 앞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외에도 백악기 시대부터 딱정벌레와 함께 살아남아 하얀 꽃을 피우는 목련, 1935년 이곳 홍릉에서 처음 발견된 특산종 문배나무, 옛 죄인들의 주거를 제한하던 위리안치의 아픈 역사를 간작한 가시 돋친 탱자나무, 그리고 껍질이 무릎 관절에 좋다는 두충나무까지...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기나긴 서사를 품고 있었다. 넓은 잔디밭 한 가운데 우뚝 선 수령 200년의 반송은 홍릉숲의 대부로 불릴만큼 품위를 자아냈다. 오르막 계단을 따라 올라서자 명성황후의 붉은 한이 서린 홍릉터가 나왔다. 비록 능은 남양주로 이장되어 빈 터만 남았지만, 100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홍릉으로 남아있는 까닭인지 마음 한구석이 자못 숙연해졌다. 1시간 반 동안의 흥미진진한 숲 탐방을 마친 후 우리는 해설사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인근 정육식당으로 자리르 옮겼다.
푸짐하게 올려진 소고기와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가운데 두고, 막걸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축배를 들었다. 화안애어의 웃음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이야기꽃이 피어날수록 화제는 자연스레 '건강'으로 모였다. 특히 치아 건강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문득 '치아가 튼튼하면 자식보다 강하고, 다리가 튼튼하면 연금보다 강하다'는 말이 떠올라 미소 지었다. 든든한 주치의를 두고 치아를 관리하는 나로서는 소소한 뿌듯함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느덧 오후 2시, 아쉬움을 뒤로한 채 10월 모임을 기약하며 각자의 둥지로 발길을 돌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짙어 마음을 조렸건만, 우리의 만남을 축하라도 하듯 구름 뒤에서 햇살이 반갑게 얼굴을 내밀어 주었다. 사람은 나무 없이는 살 수 없다. 미세먼지를 마시고 맑은 산소와 피톤치드를 건네주는 나무처럼, 우리 사자중대 동기들도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 3대 1의 차열한 생존경쟁을 뚫어야 다다를 수 있다는 팔순의 고개를 넘어, 내 목표는 소중한 사자들과 함께 건강하게 90세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10년 남짓한 시간, 장중보옥같은 친구들과 함께라면 그 무엇이 두려우라.
동기들과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마치 해탈의 경지에 들어선 듯 무념무상의 행복을 느낀다. 내 마음 역시 만심환희로 가득 찬 하루였다. 홍릉숲에 아로새긴 우리들의 푸른 발자취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