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門 고수와의 Dinner Time 20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운을 논하지 말라
서울고 총동창회 뉴스레터 21호(2018. 10. 09)
이달의 ‘동문고수와의 디너타임’은 바둑애호가편이다. 총동창회가 초청한 동문고수는 한국기원 프로기사 유건재(19회) 전 스카이바둑TV 사장이다. 프로8단으로 SBS바둑해설위원을 지냈다. 명지대에 바둑학과를 만든 주역이고 바둑TV도 그의 작품이다. 충무로 대림정에서 열린 디너타임엔 23회부터 53회까지 서울고 기우회 회원 다섯 명이 패널로 참여했다.
왼쪽부터 이필재(29회), 김항기(28회), 박영규(23회), 유건재(19회), 이광문(30회), 반승환(41회), 김형균(53회) 동문
· 참석자: 유건재(19회) 한국기원 프로8단
박영규(23회)
김항기(28회) 서울고 기우회 총무
이광문(30회)
반승환(41회)
김형균(53회)
· 진행·정리: 이필재(29회, 편집인)
· 사진: 서정욱(37회, 편집위원회간사)
· 일시: 2018. 9. 27. 7시
· 장소: 충무로 대림정
유건재 한국기원 프로8단(19회), 전 스카이바둑TV 사장
“바둑은 자유와 필연이 교차하는 세계죠.
반상의 아무 곳에나 둘 수 있지만 반드시 교대로 한 수씩 둬야 합니다.”
유건재 한국기원 프로8단은 바둑엔 교육의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저명한 사회과학자가 한 주장입니다. 자유와 필연 즉 구속이라는 두 가치가 대국을 할 때마다 서로 어우러지는 정신적인 세계라는 겁니다.”
+바둑을 통해 배우는 인생의 한 수가 무엇입니까?
"선친보다 더 존경하는 김인9단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운을 논할 자격이 없다.’ 우리가 흔히 경기에 지고 나면 운이 없었다고 하는데 최선을 다했을 때만 운에 관해 운운할 수 있다는 거죠.”
+프로기사로서 느끼는 나름의 보람이 뭔가요?
"프로가 됐을 때 미성년이었습니다. 지금의 프로게이머처럼 당시엔 선망의 대상이었죠. 프로가 된 후로는 선친보다도 연장자인 분들조차 저에게 존대를 했습니다. 저를 선생님, 사범님이라고 불렀어요. 저 역시 상업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직원에게도 말을 높이는 게 몸에 뱄는데, 이런 습관이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줬죠."
그는 박사도 아니고 심지어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라 결혼상담소를 찾았다면 아마 가장 나쁜 조건의 신랑감이었을 거라고 덧붙였다.
“바둑의 위상이 과거와는 다르지만 그렇더라도 후배 프로기사들이 긍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프로기사는 인격을 도야해 존경 받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고 선배인 신언철 2단 같은 분이 그런 분이시죠. 고단자는 아니었지만 인격자이십니다. 이분을 보고서 존경 받는 프로기사가 돼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는 막 입단해 프로기사 서열48위였던 시절 총 48명 중 서울고 출신이 두 명이나 됐다고 말했다.
+소싯적 경희궁 시절엔 어떤 학생이셨나요?
“학교공부보다는 노는데 더 열중한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바둑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했어요. 당시 우리 집이 99칸짜리 한옥이었는데 행랑채 양쪽 방에 반 친구들을 끌어들여 허구한 날 함께 먹고 자고 놀았습니다. 어느 날 양복점집 아들이었던 한 친구가 국방색과 흰색 단추를 한 움큼 들고 와 오목을 시작하게 됐죠. 이때 바둑을 둘 줄 아는 친구를 통해 운명적으로 바둑과 만났습니다. 이듬 해 아버지가 파산 지경에 이르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고 저는 공부는 뒷전인 채 바둑에 빠져들었죠.”
+그 시절 모교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
“엘리트의식도 얼마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부심이 강했어요. 조회 때면 ‘어디 가서나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 되라’는 훈화를 들었는데 그 말이 뇌리에 각인됐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나와서도 행동거지를 조심했습니다.”
유동문은 18세 때인 1966년 입단했다. 그 시절엔 늦은 나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1969년 제7회 청소년 배 대회에서 우승했고, 1977년 제3기 최강자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95년 7단이 됐고, 2007년 8단으로 승단한다.
그가 입단했을 땐 일년에 두 명 밖에 입단을 시키지 않아 프로기사가 소수였다고 한다. 그만큼 프로기사로서 희소가치가 있었다. 그는 과거엔 재계 및 정계, 전문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 바둑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대통령의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을 지낸 정치거물 고 이후락 씨, 5.16의 주역이었던 이원엽 초대감사원장 등과 교류했고, 김영준 전 헌법재판소장, 서울고 선배인 장홍선 극동유화회장 등 다수의 명사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서울고 선배인 윤영달 크라운해태회장이 바둑계에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윤회장은 크라운해태 어린이 명인전, 크라운해태 배(25세이하) 등 2개 대회를 후원하고 있다.
한국기원이 발행하는 월간지<바둑>의 편집부 차장으로 근무할 땐 서봉수 9단과 프로기사 직을 걸고 바둑을 둬 이긴 일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이 대국에서 승리하자 증인 격으로 관전한 한 프로기사 9단이 서9단을 제명하자고 했지만 그는 없었던 일로 했다고 말했다. 자유한국당 비례대표의원인 조훈현 9단과는 결승에서 맞붙은 적이 있다. 이때도 조9단이 “도전자가 된다면 타이틀을 내주겠다”며 그를 자극했다.
“결국 타이틀을 내주겠다고 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지고 말았죠.”
그는 프로기사가 벌이는 대국은 잘 둔 바둑과 부끄러운 바둑으로 극명하게 갈린다고 말했다.
“언짢게 진 대국은 대부분 본인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죠. 인생이란 바둑판에서도 그렇지 않을까요?”
+바둑인구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바둑 두는 사람들이 도와 예를 중시하기는 하지만 바둑도 결국 하나의 놀이입니다. 그 동안 놀이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먹거리가 이렇게 많은데 밥만 먹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죠.”
유동문은 프로기사로 활동하는 한편 해동화재 등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영업 통이었는데, 조선일보에 크게 기사화될 만큼 영업실적이 빼어났다고 말했다. 실적 면에서 몇 년 동안 손해보험업계 1위 자리를 빼앗기지 않았다고 한다.
+영업 통으로서 영업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름의 영업노하우가 뭔가요?
“세일즈란 곧 자신의 인격을 파는 겁니다. 고객을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은 영업의 지름길이죠.”
그는 2003년 바둑계의 총사령관 격인 한국기원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 시절 한국을 세계바둑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담대한 꿈을 꿨다고 한다. 그러나 1년만에 스스로 물러났다. 돌이켜볼 때 부끄러움이 없는 결정이었지만 일말의 후회가 남는다고 말했다.
“비통한 마음입니다. 바둑학과가 두 대학에 있고, 바둑TV도 두 개나 있습니다. 실업 팀도 있고 세계바둑학회도 우리나라에 있죠. 그런데도 중국의 기세에 눌리고 있어요.”
그는 9단 승단을 못했다. 해동화재에 다니던 샐러리맨 시절 단 네 판의 대국에 참여하기만 하면 9단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한다.
“9단 되는 것에 목을 매지 않은 탓이죠. 영업직이라 출근부에 도장 찍고서 회의에 참석한 후 한국기원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습니다. 요령이 없었는지도 모르죠.”
+알파고가 세계 최강인 커제 9단도 '제압'했습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졌을 때 프로기사로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알파고가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이 있는 줄 몰랐어요. 프로기사는 혼을 담아 한 수 한 수 바둑을 둡니다. AI(인공지능)와 대국을 할 때 어쩌면 혼이 장애물이 되는지도 모르죠. 어쨌거나 저는 인간의 역전을 기대하고,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첫댓글 19회 유건재 8단이 칠석회 초창기 때 우리 지도 사범 역할을 잠시 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