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남미 여행기 / 양선례
작은딸은 스페인어를 전공했다. 아이들 셋 중 학교 성적은 가장 뒤졌고, 자기 생각이 별로 없이 세 살 위 언니의 머리모양이나 옷차림까지 다 따라했다. 내신이 좋지 않아서 지방대학을 갔다. 과를 추릴 때도 문과여서 어문계열을 지망했고, 러시아어과, 독일어과, 스페인어과 세 곳에서 합격증이 날아왔다. 어느 지역의 어느 과를 가고 싶은지도 스스로 정하지 못하여 결국 내가 선택해 준 데가 스페인어과였다.
잘 다니려나 하는 걱정이 기우일 만큼 학교를 씩씩하게 잘 다녔다. 관심없는 줄 알았던 학생회 임원도 하고, 스페인어 말하기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아오기도 했다. 교수님이 어학코스를 밟고 온 선배보다 자기의 어학실력이 낫다고 칭찬해 주셨다는 자랑도 했다. 그럴 때마다 학교생활 열심히 하는 듯 보여 안심이 되었을 뿐, 딸아이가 외국에 나가 사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여행을 한다고 휴학계를 냈다. 같이 가는 친구가 있기 전에는 허락하지 말자고 남편과 입을 맞추었는데 그런 우리 속셈을 듣기라도 한 듯이 딸은 장문의 편지를 내밀었다. 왜 스페인을 가고 싶은지, 처음 해외여행에서 얻은 경험이 무엇인지 –딸은 고2때 내 동생과 열흘 태국으로 자유여행을 했었다. 간단한 인사말조차 말하지 못하더라고 동생은 말했다. - 다녀와서 어떻게 할 것인지, 여행 경비는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아울러 취업하면 2년 안에 갚는다고 여행 경비를 빌려 달라고 하였다. 남편은 언니의 사인이 들어간 차용증을 쓰게 했고, 허락을 받은 딸은 스페인 여행을 떠났다.
자랄 때부터 몸이 유독 약했고, ‘언니 따라쟁이’여서 믿음직한 큰딸과는 달리 매사에 신경이 많이 쓰이는 딸이 홀로 떠나기에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러나 딸은 산티아고 순례길 25일을 걷고 스페인 포르투갈을 아울러 둘러보며 유럽에서의 석 달을 꽉 채웠다. 그러고도 터키에서 꼬박 두 달을 더 머물고 여행에서 돌아왔다. 나중에 들으니 내게는 걱정할까 봐 즐거운 이야기만 전했으나 비오는 날 순례길 걸으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거의 날마다 한 시간 가까이 언니한테 전화해서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그런 작은딸이 졸업 후 잡은 첫 직장이 멀고도 먼 남미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한 볼리비아였다. 우리나라보다 무려 10배가 크지만 페루와의 전쟁 중에 태평양 연안의 땅을 뺏겨 바다가 없는 내륙으로만 이루어진 나라. 딸은 농촌진흥청의 통역인턴이 되어 수도인 라파스에서도 비행기로 이동해야 하는 볼리비아 제3의 도시 코차밤바에 머물렀다. 파리를 경유하여 가는 데 만도 꼬박 24시간이 걸리는 참으로 먼 곳이었다. 부모 걱정할까봐 어렵고 힘든 상황은 말하지도 않았다. 어쩌다 전화할 때도 잘 지낸다는 말만 하였다. 같은 입장인 인턴 둘이 더 있고, 한국에서 파견된 남편 나이 또래의 소장이 책임자로 있기에 잘 지내는 걸로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광견병 예방 주사를 맞으러 봉고버스를 타고 원주민 마을의 보건소로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닌다고 했다. 무려 10번을 맞아야 하는데 그때마다 혼자 다닌다고 했다. 개에게 물린 것도 자전거를 타고 멀리 떨어진 가게에서 뭘 사러 갔다가 그랬다고 한다. 휴일이면 인턴 둘과 소장은 시내에 있는 한인 교회로 가고 홀로 숙소를 지키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스마트폰도 잘 터지지 않는 열악한 사무실도 마음에 걸렸다. 멀리서 소식만 듣고 있기에는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딸아이 출국하고 5개월이 지나 겨울방학이 되었다. 어떻게 사는지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와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첫 직장이기에 관두고 나오라고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큰딸, 그리고 직업이 같은 여동생과 함께 때맞춰 생긴 멕시코와의 직항 비행기를 타고 남미로 떠났다. 멕시코를 거쳐 페루 리마공항에 도착하니 휴가를 받은 작은딸이 마중나와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딸과 함께 페루의 마추픽추도 오르고, 꿈의 소금사막 우유니도 관광한 후 딸이 근무하는 코차밤바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작은딸은 5개월 남미 사는 동안 스페인어가 더 유창해졌다. 남미에서는 영어가 아무 필요가 없었다. 나야 콩글리시 수준이지만 영어 잘 하는 여동생과 큰딸도 나와 똑같은 처지였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머리는 길게 땋아서 엉덩이까지 내리고, 특유의 모자를 쓰고, 짧고 펄럭이는 치마를 입은 원주민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고도가 높은 탓인지 얼굴은 갈색을 넘어 붉기까지 했다. 자동차 백미러가 없는 채 달리는 자동차도 있었고, 손님을 태울 생각이 없는 건지 실내에 먼지가 몇 센티미터는 내려앉은 자동차로 버젓이 호객행위를 하는 차도 많았다. 타이어가 짝짝이거나 오래 전 우리나라 포니처럼 뱅뱅 돌려야 창문이 열리는 차도 있었다. 와이파이는 공항에서조차 유로여서 카페를 조그만 벗어나도 휴대폰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리저리 길을 찾고 말을 거는 작은딸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
별도의 ‘남미타임’이 있다더니 버스는 정해진 출발 시각보다 한 시간이 늦는 건 보통이고, 우유니 사막에서 열리는 자동차대회로 우회하여 가는 봉고차를 탔을 때는 인가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 한가운데에 차를 세우고 돈을 더 내야 차를 운행한다고 흥정하는 차를 탔다.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눈 뜨고 코 베어가는 ‘꾼’들도 유난히 많았던 그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말 순박하고 착하다는 딸의 말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게는 두려운 곳이었다. 딸아이를 위로하고자 했던 어디서든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해, 너만 잘 하면 돼 따위의 말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도 느껴져서 딸에게 미안했다.
떠날 때부터 좋지 않았던 허리는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까지 와서 10시간이 걸리는 야간버스를 타고 우유니 사막으로 향할 때 기어이 문제를 일으켰다. 라파스는 해발 3,60미터, 공항은 그 중 가장 높은 4천미터에 위치한 도시여서 페루에서부터 고산병을 대비하여 서서히 고도를 높이는 훈련도 해 왔고, 약도 먹었기에 머물 수 있었다. 공항에 내렸을 때 태양과 어찌나 가까운지 피부가 익어 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황사로 미세먼지로 뿌연 우리나라 하늘에 비해 저렇듯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얼마만인지, 그 깨끗한 공기가 부러웠다.
최근에 새로 생긴 주 교통수단이 공중을 다니는 케이블카인 것도 신기했다. 노선별로 빨강, 주황, 초록, 파랑, 노랑, 흰색의 6가지 색깔로 구별하는 데 우리나라의 지하철처럼 환승도 가능하다. GDP 3,700달러(2019년 기준)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볼리비아에서 행정수도 라파스의 교통체증을 줄이기 위해 외국 자본으로 건설한 것이다. 볼리비아의 서민들이 대중교통으로 이용하기에는 비싼 탓인지 낮에 잠깐 타 본 지하철역은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교통체증으로 악명 높은 라파스 시내를 빠져나오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기에 몸은 피곤한데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우등고속처럼 뒤로 많이 젖혀지는 의자였지만 그 자세로 잠깐만 누워도 허리가 아파왔다.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는 고통이 얼마나 큰 지, 모두가 잠든 버스 안에서 홀로 잠들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결국 한 숨도 자지 못한 채 오전 7시에 우유니사막에 도착했다. 예약한 소금호텔에 짐을 맡긴 채 10시부터 시작하는 낮 투어를 따라가는 게 원래의 일정이었는데 나만 그럴 수가 없었다. 호텔 휴게실 의자에 누워 끙끙 앓았다.
결국 몸이 아픈 것을 안 호텔 매니저가 일찍 체크인을 하게 편의를 봐 주었다. 그때부터 침대에서 잠자기 시작해서 낮 투어를 끝내고 딸 둘과 여동생이 돌아온 오후 5시에야 일어났다. 한국인들이 꿈꾸는 여행지 우유니 사막까지 와서 잠이나 자다니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가 한심하지만 그때는 세상 모든 게 귀찮아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볼리비아에서 페루로 이동, 다시 멕시코에서 7시간을 체류한 뒤 한국까지 18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우리 집 내 침대에서 눈 뜨면 얼마나 좋을까 날마다 소망했다.
마추픽추에서도 그랬다.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페루의 옛 잉카제국 도시 마추픽추. 해발 2,437미터의 공중도시로 숨어 있다가 1911년에야 미국인에 의해 세상 밖으로 드러난 도시. 꿈에 그리던 곳을 실제로 걸어본다는 감흥도 컸고, 사진으로나 보던 라마를 만져볼 수 있는 것도 좋았으나, 몸이 아프니 다 귀찮았다. 하루 400명으로 입산을 제한하는 와이나픽추에 딸과 동생이 다녀오는 동안, 나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광객이나 구경하며 기다렸다.
마추픽추 날씨는 올라가봐야 안다는 말이 있다. 오를 때는 맑은 날씨였는데 정상에 있는 ‘종지기의 집’에 도착하니 비구름이 몰려왔다.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고, 보이는 세상은 모두 안개에 싸여 있었다. 내려오는 셔틀버스 줄은 500미터가 넘었다. 그런데도 기다리면서 앉거나 쉴 편의시설이 전혀 없었다. 동생을 비롯한 일행은 줄을 서고,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으리만치 몸 상태가 나빠진 나만 호텔 처마 밑에 주저앉아 있었다. 비옷을 입었다고는 해도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딱 거지였다. 나 말고도 다국적 거지들이 주위에 많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웬 고생인가로 생각이 흐르니 눈물이 절로 났다. 멋진 풍경도, 맛있는 음식도 다 귀찮기만 했다. 딸만 아니었더라면 이 먼 곳까지 올 용기는 못 냈을 것이다.
우유니에서 다시 버스로 10시간을 달려 코차밤바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딸아이 근무지까지 왔는데 우리 나라 면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작은 마을이었다. 치안이 불안한데 담은 높지도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남녀 현지 스텝도 머문다는 기숙사는 길게 복도식 아파트처럼 놓인 방이 양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좌우에 낡은 침대가 각기 하나씩 있고, 문이 잘 닫히지도 않는 철제 캐비넷과 나무 책상이 가구의 전부였다.
고등학교 기숙사만도 못한 방안 시설에도 놀랐지만 화장실을 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여자 화장실의 세 칸 중 한 칸에 꼭지만 달아 샤워실로 쓰고 있었다. 문도 없이 보따리 같은 천이 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놀라고 불평하면 앞으로도 더 오래 이곳에 머물 딸아이가 얼마나 슬퍼할까 싶어서 표시는 하지 않았지만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는 없었다. 25살이나 먹도록 깍두기도 담을 줄 모르냐, 오늘은 김치찌개 먹고 싶다. 저번에 통역은 이런 일도 잘 하더라 등 소장의 도를 넘은 갑질을 그냥 견디라는 말밖에 못해주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다.
인턴을 마친 딸은 국내로 복귀하였고, 이제 자신이 원하는 일터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나 역시 보름간의 힘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치료 잘 받은 덕에 건강도 회복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좋았던 기억만 새록새록 떠오른다. 딸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어 2년쯤 후에는 멕시코 대학원을 가서 하고 싶은 국제협력 분야의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한다. 어릴 때의 떼쟁이, 따라쟁이는 어디로 가고 당찬 도전을 계속하는 딸아이를 보면서 아이들은 12번이나 바뀐다는 말을 실감한다. 딸아이가 멕시코 대학을 가면 멕시코와 쿠바가 있는 카리브해로 여행을 떠나볼까나.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아 또 다시 여행 계획을 짜는 나는 참 속없는 엄마이다.
첫댓글 교수님, 막차 탑니다. 글감을 달리해서 무려 4편을 시작한 끝에 이것으로 올립니다. 완성도도 낮고, 글이 너무 길어져서 줄이고도 싶은데 일요일이 끝나기 5분 전에 올린 것으로 위안 삼습니다.
집 나서면 즐겁기도 하지만 고생이지요. 여행기 잘 읽었어요.
맞아요.
이 여행에서는 보는 사람조차 힘들어 했답니다.
약을 가져갔는데도 진통제 먹기 싫다고 참았으니, 참 미련했지요.
장기복용하는 거 아니니 먹고 씩씩하게 여행한 것이 더 나았을텐데 말입니다.
글감을 잡느라 갈등이 많으셨네요.
딸 아이의 도전 정신은 엄마에게 받은 영향 아닐까요? 하늘에서 뚝딱 떨어질리는 없을테니까요. 글에서 느껴집니다.
잔잔한 파도는 노련한 뱃사공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딸은 험난한 파고를 만나 많이 성장했을 것입니다. 용기를 낸 엄마에게도 박수를 보냅니다.
딸 때문에 다녀온 남미 여행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막차 놓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수고 많았어요.
"잔잔한 파도는 노련한 뱃사공을 만들어낼 수 없다"
명언이네요.
그래도 저는 잔잔한 바다만 가 보고 싶네요.
응원 고맙습니다.
아참, 무려 3쪽이나 썼는데 맘에 안 들어서 올리지 못한 글이 아깝네요. 하하
남미 여행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고생했던 여행이 기억에 더 남더라고요.
빨리 자유롭게 해외여행하는 날이 와야 할 건데요.
여행하고, 사람만나 맛난 거 먹던 그 소소한 행복이 어서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뉴스에서 보니 내년 4월은 되어야 한다는데,
페루나 볼리비아처럼 경제수준이 뒤진 곳까지 백신의 효과를 보려면
앞으로도 2년은 더 걸릴 듯 합니다.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다립니다
언젠가 말씀하셨던 작은딸 이야기네요. 안에서는 헬조선이라고 말하지만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다들 말하더라구요. 특히 치안문제요. 더구나 요즘은 코로나 방역에서는 선진국이 되었잖아요. 자국민을 보호하는데는 따라갈 나라 없는 듯요~
와~벌써 3년이 흘렀나요? 당차게 도전을 거듭하는 작은 따님 응원합니다!
벌교 있을 때 눈치보면서 다녀왔으니 벌써 그리 되었지요.
이번 주제는 교수님이 날짜도 많이 주시고, 쉬운 글감이었는데도 많이 헤맸답니다.
당찬만큼 본인의 일을 글감으로 쓴 걸 알면 난리, 난리 날건데 걱정입니다.
하하.
아참, 멕시코 대학이 서울대학보다 세계대학의 순위가 높다네요.
항상 100위권 안에 드는 좋은 대학이라네요.
서울대는 들다가 말다가 한다네요.
남미는 유럽보다도 이국적이고 자연이 아름답게 보존되어 있을 것 같아요.
막내들은 매사 여린 듯하지만 당찬 성품이 있어서 어떤 일이 주어지면 책임감 있게 잘해서 믿음이 가더라고요.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막내 아니고 가운데 낀 아이랍니다.
위에서 치이고, 아래는 또 아들이라 치여서 주관은 뚜렷하지만 자신감은 없는 아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일 야무지게 계획 세워서 자기 일을 잘 하네요.
믿음직하답니다.
남미는 자유여행은 너무너무너무 힘들답니다.
은퇴 이후 자유여행 오는 노부부를 보면 부럽기보다는 짠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말 신기하고 볼거리가 많지만 치안이 불안하여 조심을 많이 해야 한답니다.
게다가 말도 안 통하면 호구되기 딱 좋지요.
특히 한국인을 노리는 꾼들이 아주 많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고생은 하셨지만 재미있는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님이 대단한 여장부네요. 예쁜 따님 덕분에 비행기 타실 일만 남았으니 건강관리 필수입니다.
그러게요.
딸이 둘이니 비행기 탈 수 있겠지요?
제가 큰딸을 태워준 적은 많은데 아직 타 보지는 못했으니, 기대하고 있으렵니다.
건강은......
하루하루 근근히 산답니다.
글벗님의 사람 냄새 나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