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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괴로움에 임재하신 주 예수. 私の苦しみに臨んでおられる主イエス( 2024년 3월 24일 주일예배)
본문: 빌립보서 2장 5절~11절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5. 互いにこのことを心がけなさい。それはキリスト․イエスにもみられるものです。6. キリストは、神の身分でありながら、神と等しい者であることに固執しようとは思わず、7. かえって自分を無にして、僕の身分になり、人間と同じ者になられました。人間の姿で現れ、8. へりくだって、死に至る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至るまで従順でした。9. このため、神はキリストを高く上げ、あらゆる名にまさる名をお与えになりました。10. こうして、天上のもの、地上のもの、地下のものがすべて、イエスの御名にひざまずき、11. すべての舌が、「イエス․キリストは主である」と公に宣べて、父である神をたたえるのです.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또한 고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그대로 겸손한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날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또한 그날부터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호산나의 환희와 십자가의 고통을 동시에 증언하는 오늘의 절기가 말해 주는 메시지를 생각하며 오직 주님의 구원을 붙들고 최후승리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사람들은 이렇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가 실제로 작년 사순절 기간에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갔을 때 보았던 종려나무는 그 지역에서 매우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예수님을 환영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모습을 기억하며 지키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골고다를 오르며 고난의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손가락을 흔들며 조롱하였습니다. 앞서 보신 이런 환영의 모습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일주일 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고 고함치며 흥분한 군중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됩니다.
죽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시신을 염하던 곳이라고 여겨지는 바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죽은 이의 시신을 넣어 두던 무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곳의 근처에서 발견된 또 다른 무덤을 찍은 사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으로 알려진 골고다 언덕에는 현재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세워졌고,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당시의 모습 그대로의 풍경 대신에 교회의 지붕 아래에서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도 이곳을 순례하고 이런 사진을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의 현장에서 있었던 고난의 흔적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시간적인 차이와 공간의 거리가 있습니다만... 주님의 고난은 단지 사람의 아이디어와 설화로서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당시 예루살렘의 골목길을 걸어 골고다 언덕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과 고난, 고생스러운 일상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맞닥뜨리게 될 때 과연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그런 현실에 임해야 할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고난과 환란의 때에 나의 현실을 주목하고 계시고, 친히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 50장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의 사명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 내가 거역하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5-6)
여기서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 즉 신약에 예수님으로 나타나시는 구세주를 의미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냐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냐 보라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이 그들을 먹으리라 (사 50:8-9)
메시아를 보내신 분께서 메시아, 구세주에게 승리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받고 고생스런 일상과 어렵고 힘든 일상 가운데 처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구세주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하는 관계로 맺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시편은 다윗의 입을 빌어 우리가 고난의 때에 주님께 간구할 기도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 31편 9~16입니다. 우리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근심 때문에 눈과 영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 31:9~16)
예수님의 고난과 그 고생스러운 흔적들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는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격려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통과하고 나타난 영광스러운 능력과 권세입니다. 죽음이라는 고난이 없으면 부활이라는 영광도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함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존재하는 모습을 통해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의 몸으로 이룬 교회의 존재가 우리를 용감하게 하고 살아갈 힘을 줍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자원하여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은 환란과 고통 중에 신음하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순종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모습(본질적 모습, 아이덴티티… 아이디와 패스워드)을 지니고 계셨다고 오늘의 본문의 6절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의 존재로 살아가실 때 스스로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가 많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을 과시하며 드러내기 위해서 일상을 남용하고, 시간을 소비합니다. 물론 성도인 우리도 그렇게 살 때가 많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도록 시간을 사용하시고, 인생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현실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고난과 괴로움에 동참하신 주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배워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예수님께 배워야 할 겸손의 첫 번째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도록 자신의 인생과 일상과 시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게 일상을 맡겨주신 분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거듭난 이들은 이제 밥 한 공기를 먹어도... 자신의 육체적 감각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닙니다. 밥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고한 손길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식사를 즐기는 것입니다. 맛과 영양만을 생각하지 않고, 축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 중에 식사가 포함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일상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우리가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으로 일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이 인생을 살면서도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의 약속을 믿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를 참으로 겸손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은 것이 우리의 몸을 만들어 갑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겸손한 태도로 밥을 먹으면, 그 겸손의 몸이 만들어져 가는 것을 믿습니다.
두 번째로 배울 겸손은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인데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음입니다. 거룩한 영생을 주시려고 속죄제물을 드리신 사건이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16:24)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자신의 삶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리듯이 사는 산제물로 살아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이 두 말씀의 영적인 의미는 죄를 이기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고백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죠. 우리 죄의 가장 근원에는 자아의 욕심과 이기심,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는 삶이란 곧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자아의 죽음을 인정하는 삶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거룩한 인생인 것입니다. 단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하기 싫고 어렵고 힘든 일을 강제로 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신 것처럼 자신의 일상을 찢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찢으셔서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거듭난 성도인 우리도 우리의 일상을 찢어서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욕심과 이기심의 죽음을 고백하며 십자가를 지는 모습입니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제로 믿고 의지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셨습니다. 그의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유혹해도 말씀으로 다 이기실 수 있으셨습니다. 정복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말(馬)이 아닌,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사람들 앞에 말을 타고 싶어하는가? 아니면 초라한 나귀를 타도 상관없는가? 자문하며 스스로 겸허하게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말을 타든, 나귀를 타든 순종할 수 있는 것이 건강한 성도의 겸손이며 순종인 것을 믿습니다. 무엇을 탔느냐 보다 누구와 함께 탔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고난받는 삶의 자리에서 순종하시며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고난주간인 이번 주간은 특별히 그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기다리는 주간입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한 끼를 금식하며 그 시간에 기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곡기를 끊고 겸손을 연습해 봅시다. 한 해의 단 일주일만이라도 오직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일상을 사용하는 연습에 동참해 봅시다. 고난에 대한 참된 순종은 능력이 있습니다. 순종의 능력을 체험하는 고난 주간이 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은 특별히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수시로 생각하는 주간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마음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고민에 동참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것을 절제합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동행하며 욕심을 절제합니다. 주님의 동행을 의식하며 말과 행동을 삼갑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성화이며 거룩함입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에는 하나님이셨지만, 사람과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마음과 정체성을 더욱 기억합시다. 나의 육신적인 욕심과 쾌락을 절제하면서 그 종의 마음과 모습을 본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종의 모습에 동행한 이에게 영생의 상급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고난주간과 그 후에 찾아오는 부활의 감격으로 우리에게 선물하실 반전인생을 기대하면서 모든 일상에서 겸손을 배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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