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3.연중31주간 화요일 강론>
<루카14,15-24>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믿음으로 행동하라
3P 문장으로 말하라
우리의 ‘확신’은 의식이 잠재의식에 보내는 강한 메시지이자 명령입니다. 확신에 찬 긍정적 언어는 우리의 잠재력을 억누르던 제약들을 제거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그대로를 향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줍니다.
좋은 긍정문은 흔히 ‘3p’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긍정적(positive)이고 현재형(present)이며 개인적(personal)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흔히 사람들은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라고 말하는데, 이보다 “나는 금연가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확신으로 말하고 행동해보십시오. 자신과 원하는 목표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157)/
무의식이 작동 되어야 꿈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지화 되어야 한다고 하지요. 따라서 긍정문만 가능하지 부정문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간단 명료하게 긍정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좋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비유를 통해 이미지화 시키십니다.
메세지도 간단 명료합니다. 초대에 응하라는 것이지요. 주님의 부름심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부름에 따른다는 것은 나의 소명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루카는 혼인잔치의 비유로, 하느님께서 유다인이든 다른 민족이든 가난한 이들로 이루어지는 당신의 새로운 백성을 부르실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사실 초대된 이들은 많지만(루카14,16), 비유의 일반 방식에 따라 구체적으로는 세 사람만 언급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셋째 사람은 양해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초대에 응하지 않는 그들 대신에 이스라엘의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과 같은 불우한 이들이 초대됩니다.
루카 복음서의 행복 선언(루카6,20-23)이 지니는 일반적인 생각은 ‘지금’ 가난하고 고난을 받는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상태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루카1,51-53; 16,19-26 참조). 이 뒤의 행복 선언들과 거기에 반대되는 불행 선언이 가리키는 것처럼,(마태오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을 말하는 반면) 여기에서는 무엇보다도 현세적 재물이 없어 “가난한 이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을 드러내십니다(마르10,21; 21,43과 병행구). 그리고 루카는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집니다(루카14,13.21; 16,19-26; 19,8). 예수님게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의 복음을 전하시면서(루카4,18; 7,22), 동시에 ‘작은 사람들’(루카10,21), ‘낮은 사람’들도 염두에 두십니다(루카14,11; 18,14). 그분 자신이 바로 이러한 이들의 세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들에 대한 우대는 하느님의 절대적 자비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고대하라고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루카가 풍부한 감수성과 함께 강조하는 바로서, 불행한 이들에 대한 연대성으로 부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울타리”는 관목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시골 마을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한길”도 동네 밖의 길을 일컫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곳에 부랑자나 걸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마태22,9-10과는 달리, 루카는 초대에 응하지 않은 자들을 대신하는 두 번째 사람들, 곧 고을 밖에서 오는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이들은 이교인들/이민족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라” 에서 ‘어떻게 해서라도’는 폭력이 아니라 간절한 초대를 뜻합니다(루카24,29; 사도16,15).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의 초대는 우리의 지금 함께 있는 사람과 해야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걸림돌은 나의 에고이겠지요.
에고를 인식하는 것은 기도와 정화로 해야할 우리들의 작업입니다.
<Luke14,15-24>
15 One of his fellow guests on hearing this said to him, "Blessed is the one who will dine in the kingdom of God."
16 He replied to him, "A man gave a great dinner to which he invited many.
17 When the time for the dinner came, he dispatched his servant to say to those invited, 'Come, everything is now ready.'
18 But one by one, they all began to excuse themselves. The first said to him, 'I have purchased a field and must go to examine it; I ask you, consider me excused.'
19 And another said, 'I have purchased five yoke of oxen and am on my way to evaluate them; I ask you, consider me excused.'
20 And another said, 'I have just married a woman, and therefore I cannot come.'
21 The servant went and reported this to his master. Then the master of the house in a rage commanded his servant, 'Go out quickly into the streets and alleys of the town and bring in here the poor and the crippled, the blind and the lame.'
22 The servant reported, 'Sir, your orders have been carried out and still there is room.'
23 The master then ordered the servant, 'Go out to the highways and hedgerows and make people come in that my home may be filled.
24 For, I tell you, none of those men who were invited will taste my di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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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믿음으로 행동하라
3P 문장으로 말하라
우리의 ‘확신’은 의식이 잠재의식에 보내는 강한 메시지이자 명령이다. 확신에 찬 긍정적 언어는 우리의 잠재력을 억누르던 제약들을 제거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그대로를 향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좋은 긍정문은 흔히 ‘3p’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긍정적(positive)이고 현재형(present)이며 개인적(personal)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흔히 사람들은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라고 말하는데, 이보다 “나는 금연가다”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완벽한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확신으로 말하고 행동하자. 자신과 원하는 목표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Blessing of the rainbow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무지개 원리,차동엽,위즈 앤 비즈,2007,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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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나와 상대를 발견해 가는 여정, 에니어그램의 이론과 실제, 이안숙,한은진 지음,도서출판 홍익기획, 2014,p.147)
아홉 가지 성격 유형에 관한 질문지
1.나는 아홉 가지 유형 중 (. ) 유형 인 것 같다. 그 이유는?
2.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집착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행동사례를 적어보세요.
3.일상생활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상태나 상황은 어떤 것인가요?
4.곤란한 상황이나 위기 상황에서 빠져 나가는 자신의 습관적인 방법이 있나요?
5.지금까지 자신이 찾은 유형에서 근원적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나요?
1=>(1) (그 이유는 옳은 것에 집착한다)
2=>(지나고보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일에 옳고 그름에 매달려서 따지고 들어 상대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후회한다)
3=>(다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는 어떠한 부분에서 반듯하고 바르고 깨끗하게 정리하려는 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시당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4=>(내적으로 깊이 들어가 후회와 자기 비판적 임)
5=>(부제품 받기 전에 30일 동안 침묵하며 매일 미사책 복음 내용 정도를 8개씩 각각 1시간씩 8시간 기도, 각각 1시간씩 8시간 정리하는 “이냐시오 30일 침묵피정” 중에 이유도 모를 깊은 분노를 체험함.
<5번 보충 설명>
침묵 중에 8시간 묵상과 8시간 쓰는 시간을 나도 모르게 분노로 치를 떨면서 이유도 알지 못하고 백지를 들고가 지도 신부님께 야단맞고, 다시 해오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묵상은 안 되어서 신학교를 나가더라도 분노 자체가 무엇인지 알고 말겠다는 각오로 분노만 응시함. 몇시간이 지났을 까……그랬더니 꿈처럼 5년전에 있었던 일이 영화처럼 지나감. 그 내용은 5년전에 있었던 일이 발단이었고, 기도 중에 그 당시에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들이 내 앞에 하나 둘씩 무릎을 꿇음. 너무 놀랐음. 꿈처럼 기도가 깨기 전에는 현실인줄 알았음. 꿈과 다른 점은 이성이 작동한다는 점임. 신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30일 침묵피정 중에 일어난 기도 체험이었고, 피정 방법은 1시간 동안 매일 미사책에 나오는 복음 정도의 양을 10번 읽고 눈을 감고 영화처럼 그 상황을 상상하며 성령께 의탁해서 그 안에 들어가 오감으로 다 느껴보는 것임. 그 당시 본당을 길음동 본당으로 옮겨서 신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 선배들과 동기는 다 피정가고 군대가서, 제가 본당에 혼자 남게되어 크리스마스 츄리와 구유를 혼자 다 만들어야 했고, 방장시장에 가서 본당 신부님이 주신 5,000원으로 재료를 싸게 구입하고, 시골에 내려가 볏단을 얻으러 다니고 돌아오는 길에 한 트럭 분량의 아름드리로된 나무껍질을 얻게되어 담배 한 보루 사드리고 제의방이 있는 곳에 고이 모셔두고 피정 갔다왔는데, 하나도 없이 다 없어짐. 너무 놀라 내려가보니 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들이 다 크리스마스 츄리용 재료는 교실에 다 꾸몄고, 아름드리 나무껍질은 다 짤라서 그 많은 초등학생들에게 작은 십자가를 만들어 주려고 작업을 다 한 상태였음. 그리고 “이거 누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하고 놀란 묻는 동기 신학생에게 “이거, 성당에서 다 해줘야하는거 아니에요!” 라며 눈을 치뜨며 말하는 초등부 주일학교 교감에게 아무 소리 못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신학생이 내가 양보하자, 원수도 사랑해야하는데 다 용서하자! 나도 옛날 주일학교 교사 때 춥고 배고프고 학생들 위해 늦게 남아 작업해도, 밥 못 얻어먹고 성당에서는 “집에 안 아직도 안 갔느냐?”고 야단맞고, 집에서는 “성당에 또 가느냐?”며 야단맞던 일이 생각났기에 교사들 먹으라고 통닭 3통에 사이다 콜라 1,8리터 짜리 두병을 주고 나온 일이었습니다.’ 그 때는 “주님 ! 저 잘했지요? 잘 했지요?”라고 행복해하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5년전에 있었던 일인데 이렇게 무의식에 악인 분노가 되어 내 성소를 방해할 줄이야!”. 무의식 안에 숨어있던 분노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어렸을 때 본 만화영화인 요괴인간이었습니다. 뱀 베라 베로의 요괴인간 중에 정의의 사도인 뱀이 내 몸에서 나와서 씩씩거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요괴인간은 불안정하여 인간은 선과 악이 있는 반면에 이 요괴는 내면에 선만 있는데 악당들을 물리치며 악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귀신도 아닌 착한 병에 든 요괴였습니다. 나는 착한병이 걸려 남에게 싫은 소리 하나 못하고, 분노를 내면에 쌓아두었습니다. 내 이성은 용서하려는데 내 무의식에서 나온 그 착한 병에 갈린 그 요괴인간 뱀은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내가 물으니 그 요괴인간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들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라도 했으면 용서해줄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차분이 이 나무껍질과 츄리용 반짝이 등의 물건들은 내가 사서 구한 것이고 크리스마스 츄리와 구유를 만들 재료들이었고 내가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들이 미안하다고 말 했을 것이고 내 몸 안에 이런 분노도 쌓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빨리 분노를 끝내고 피정을 진행해서 부제품 받아야하니 성소가 달린 문제이니 그 사람들을 용서해주겠다고 “나 너 아니다!” 라고 말하며 요괴인간인 그와 분리되려 노력해도 떨리는 내 몸과 심장은 진정이 안되었으며, 그가 바로 나임을 즉, 그 분노가 그 요괴인간이 내 자아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주님께 바리사이와 같이 내 선행만을 앞세웠던 지난 날에 대해 용서를 청하며, 세리의 기도를 하기시작했습니다. “주님! 용서할 힘이 없는 제가 용서할 수 있게 힘을 주십시오!” 라고 간절히 기도로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시간이 흘러 내 앞에 한 명 한 명 무릎을 꿇더니 나중에는 15명이나 되는 교사가 무릎을 꿇고 있는데도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내가 이렇게 쪼잔한 사람이던가?”라며 성소를 위해 이 분노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주님께 용서할 힘을 달라며 목숨을 걸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수녀님이 오셔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수녀님이 창고에서 찾아보라고 했어요!”라고 초등부 주일학교 교감이 말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본당 신부님께서 머리를 긁적이시며 관절염으로 절뚝이는 발로 걸어오시면서 “에이! 미안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에이! 미안허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시는 사과요 대속의 의미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우리 자신 스스로 괴롭히고 판단하고 인격들을 난도질 했던 우리 대신 주님께서 대신 당하시는 십자가상의 외침, 감실이라는 감옥에서 “에이, 미안하다”하며 우리 대신 용서 청하시는 외침이 아닌지요. 저는 너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수녀님과 신부님을 일으켜 세우려는 몸시늉을 하느라 엉거주춤해 있었는데, 꿈에서 깨듯이 현실로 갑자기 돌아왔으며 나는 감실앞에 엉거주춤 서서 두 손을 누군가 일으키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의 완성된 모습은 누군가를 일으켜 세워주는 모습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공동체 안에서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며 사람을 어려움에서 도와야 사는 존재가 아닐까요? 그것이 나의 삶이요 소명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 뒤로는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나보다 낫다. 나는 분노로 악을 키웠었는데 저 사람은 그렇지는 않지 않는가? 자신을 드러내니 더 겸손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후에 내가 혼자 용서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성으로 바로 가서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용서로 가는 것은 내 수준에 맞지 않음을 절감했으며, 현실에서 동물성 인간성 차원에서 소통을 하고 신성 차원에서 같이 통합하는 작업이 가톨릭적인 수련의 방법임을 나중에 인식하게되며, 완전 무가 되는 것은 수련 과정에서 기억 지성 의지가 완전 제로가 되는 과정이 있고 그 뒤에 주님의 인격으로 되어 주님과 완전 일치로 완덕이 나아가게 된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내 힘이 아닌 대 데레사 성녀의 가르침대로 우리 각자는 주님과 팔짱끼고, 성모님과 성령의 호위하에 칠궁방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영적인 결혼식을 하러 가는 중임을 인식하는 것이지요. 일궁방부터 시작해서 각자가 지금 가는 중이라는 것이지요. 칠궁방에 이르기 까지, 이러한 여정에 기도와 정화로 자신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고, 나를 깊이 알며 알수록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이지요.
에니어 그램이 다 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수련과 기도와 정화의 도구로 필요한 만큼 이용하면 될 듯 싶습니다.
<단순기도>
1)정화 :
지성으로 예수성심을 인식하고(무소부재이신 하느님)
기억을 마음으로 내려놓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의지로 나를 향했던 것을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 계신 예수성심을 향해 내 모든 기억을 봉헌함
2)기도: 다 봉헌했으면, 예수성심 안에 내 자신 전체가 들어가 침묵으로 머뭄.
<묵상기도>
1)기도:
매일 미사책에 나오는 복음을 10번 읽고 30분~1시간 정도 묵상하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마음껏 상상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침묵으로 30초~1분 정도 무념무상으로 홀로 있기.
2)정화:
생활 중에 기도 안에서 만난 예수님의 해상도를 높여서 실제 생활에서 자꾸 대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