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김 정 자
전철 안에서였다. 앞에 앉아 있는 고만고만한 학생들이 정신없이 휴대폰을 두들긴다. 누구에게 그리 할 말이 많은 걸까 여리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마치 번개처럼 빠르고 날렵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재미가 있는지 문자를 주고받으면서 킥킥대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 시선이 열 손가락 위에 머물렀다.
곱고 여리던 모습은 예전에 사라진 지 오래지만 이렇게 변할 줄이야. 쭈글쭈글한 주름이며 굵은 마디를 보고 있으려니 은근히 소회 감이 든다. 그러나 어쩌랴 세월 앞에 장사 있던가. 그저 별 탈이나 없으면 좋으련만 요즘 들어 손가락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마음이 우울해진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무심코 손을 오므리는데 주먹 쥐기가 어눌하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지겠지 하고 식사 준비를 하는데 참기름 병뚜껑을 열 수가 없어 남편을 불러야 했다. 이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일은 도무지 혼자서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그러다가 말겠지 하고 기다려 봐도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헤아려 보니 달포가 지났다. 갑자기 불안해 지고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은근히 걱정이 된다. 이러다 아무것도 못하는 게 아닐까, 관절에 나쁜 병이 생긴 건 아닐까 온갖 방정맞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곰곰이 생각하니 원인이 있긴 있다. 세월도 세월이지만 중년을 지나면서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무리가 올만도 했다. 오랜 시간 자판을 두들기다 보면 어깨는 물론이요 나중엔 열 손가락에 무리하게 힘이 들어가게 마련이니 탈이 나는 건 당연한 건지 모른다.
걱정만 할 게 아니다 싶어 통증클리닉을 찾아가고, 정형외과로 한방병원으로 갖은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손을 쓰지 못하게 되나 보다’ 는 생각이 들면서 좌절감마저 들었다.
어찌해야 옳은가 좌절의 꼬리엔 지난날의 회상과 미련이 묻어 있었다. 여리고 긴 손가락으로 하얀 건반을 두드리며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여중 시절을 지나 고교에 들어가면서 내 손가락의 꿈은 보다 현실적이었다. 최고의 타이피스트가 되고 싶어 샛별을 보면서 타자실로 등교했다.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방과 후에도 이어져 해가 저물 때까지 손가락이 뻐근하도록 자판을 두드렸다. 그 결과 노력한 보람이 있어 전국 타자대회에서 입상하여 졸업 예정자로서 공무원으로 임용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주부가 되고 나서 이번에는 폐백 요리를 배웠다. 정성껏 다듬고 끼우고 빚어냈던 수많은 작품. 그중에서도 폐백 요리의 진수는 구절판이다. 솔잎에 잣을 꿰어 청홍실로 묶어내는 일, 은행을 연두색으로 볶아 꼬치에 끼우는 일, 주머니 곶감에 호두를 박아 예쁜 모양으로 썰어내는 일, 마른오징어의 껍질을 벗겨 학, 오리, 병아리를 오려내는 일도 세심한 손놀림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생률 치기, 대추에 잣 박기, 곶감에 잔칼질하기, 이 모두가 나의 섬세한 손가락 끝에서 태어난 예술 같은 작품이 아니었던가.
생각하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어떤 지향점이 있고, 그것은 절대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의 손가락의 방향과 움직임에 따라 삶의 방향이 같은 길을 갈 수도 있고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따라서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됨을 나와 타인의 인생에서 보고 느끼며 살아간다. 어떤 이는 손가락 하나로 세계를 움직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잘못 손놀림으로 인생의 그늘에서 살아가기도 하지 않던가. 물론 손가락이 없다 해도 발로도 인생의 방향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신이 우리에게 육체를 주실 때는 손은 손대로 발은 발대로 각각의 기능과 의미를 부여 하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있으랴만 그중에서도 손가락의 힘은 위대하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의 역할이 소중하다 못해 삶의 보물이기도 하다. 그 중 하나라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또는 사고로 떨어져 나갔을 때 불편함과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지금 내 경우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어떤 이는 평생을 좌절 속에서 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고통을 이기고 새로운 나날을 개척하는 이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열 손가락이 있으므로 우리는 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며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찌 보면 마음은 육체를 거느리고 육체는 마음의 방향에 따라 그렇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물결무늬의 주름살이 흐르는 내 손가락을 바라본다. 60년이 넘는 세월 한 마디 불평 없이 따라 주고 도와준 고마운 내 몸 중의 손이요 손가락이다. 겨우 연골 주사 힘으로 되찾은 나의 손가락의 힘이 얼마나 가겠는가. 돌아보면 그가 있었기에 피아니스트 꿈도 꿀 수 있었고, 타자수로의 진가도, 폐백요리의 요리사로 아내의 역할을 훌륭히 해주었던 나의 열 손가락. 젊은 날 내 힘껏 남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와의 세월이 어느덧 꿈처럼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제는 내 젊은 날의 열정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왜일까. 아무 욕심 없이 내게 베풀기만 했던 그에 비해 아직도 내 안엔 작은 미련의 조각이 남아 있단 말일까. 아닐 것이다 그건 아마도 그가 자꾸 아파하니 내 마음이 슬프고 허전해서 그러리라.
지금 내 두 손안에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빈손일 뿐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이제 빈손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어찌 더 이상의 욕심을 생각하겠는가. 그저 살아 있는 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 살다 가고 싶을 뿐…….
우선은 연골 주사 덕분에 움직이고 있으니 의학에 감사해야 할 일이며 열 손가락이 지금 이 순간 정상적으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진실로 감사하고 고마운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