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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39
3월19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영상미사도 함께 올립니다.**
https://youtu.be/A5qQUVLG0Y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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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던 하느님의 사람, 요셉!>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셉처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였으며,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로서 마리아를 향한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면서 연기가 풀풀 새어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릿 속은 별의 별 생각이 다 교차했을 것입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척 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이 사실을 사방팔방에 확 불어버릴까? 법대로 해버릴까?’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꾹 눌러참았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은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장 20~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입장에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 "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희귀한 사건으로 인해 마리아와의 단란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꿈꾸던 요셉의 소박한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마리아의 혼전 잉태가 요셉에게 엄청난 시련이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납득하기 힘든 대 사건 앞에 침묵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신비스런 신앙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로 인해 자신이 겪은 희생과 포기는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요셉 자신을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커져갔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나를 동반자로 불러주시다니요?
따지고 보니 세상 만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매일 겪는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번 크게 바꿔 먹고, 호흡 한번 크게 하며,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시련과 고통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철저하게 다르신 분입니다. 참으로 묘하시고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요셉처럼 너그러운 마음이요 의로운 성격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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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구원은 구원의 필요를 아는 이에게 맡겨진다>
한 부자가 죽기 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천당에 갖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어느 날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네 기도가 응답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트렁크 가방 하나에만 채워가라.”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 부자는 여러 가지 궁리를 했습니다. 현금으로 채울까? 유가증권으로 채울까? 진품 명품으로 채울까? 그러다가 부자는 황금 덩어리로 채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결정 내렸습니다.
얼마 안 있어 부자는 이 땅을 하직하고 천당에 갔습니다. 천당에 가는 동안 아주 큰 고생을 했습니다. 트렁크 무게 때문이었습니다. 황금이 든 큰 트렁크를 가지고 낑낑대며 천당 문 앞에 이르렀을 때 베드로가 문을 지키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힘들게 갖고 오십니까?”
부자는 환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제 재산인데 특별히 허락받고 갖고 오는 겁니다.”
“여태까지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허락을 받았다니 그럼 어디 봅시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며 가방을 열게 했습니다. 가방이 열리니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부자는 얼굴의 땀을 닦으며 그것 보라는 듯 만족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천당의 모든 길은 황금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도로포장 재료를 가지고 오셨군요. 수고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것은 무엇일까요? 부자가 황금을 가치 있다고 여기면서 잃게 된 것은 또 무엇이었을까요?
헨리 나우웬 신부는 자신의 저서에서 “너는 보물을 발견한 사실에 기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보물을 발견했다고 해서 네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때 보물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보물은 발견하는 것보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위해 다른 가치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물의 진정한 가치를 안다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보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아니면 다 지옥행이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겁주기 위해 지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입니다. 이것은 교리입니다. 지옥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교회는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1035)라고 가르칩니다.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죄가 씻겨져야 합니다. 우리는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서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유일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세워진 성사이고 교회에 맡겨졌습니다. 교회에 맡겨진 성사가 곧 그리스도이고 그 성사의 가치를 알아야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줄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맡겨주신 성체가 아니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성 요셉은 어떠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맡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성 요셉의 수많은 훌륭한 덕이 있겠지만, 오늘은 그분의 믿음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말은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죄에서 구원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유일한 구원자의 양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담이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으로 아기 예수님이 다치거나 혹 죽게 되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기다려온 인류의 구원이 허사가 됩니다. 자신이 맡은 가치를 알아, 이런 부담을 가질 수 있는 사람에게야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맡겨주십니다. 요셉 성인은 온 인류의 희망이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수천 번이라도 바칠 준비가 되신 분이셨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분이 누구이신지 알기 때문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다이아몬드광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습니다. 한 상인이 남아공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을 때 선반 위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돌멩이는 누구의 것입니까?”
“저것은 내 아들이 산에서 주어온 것입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내가 당신 아들을 위해 좋은 장난감을 하나 줄 테니 저 돌멩이를 내게 주지 않겠소?”
주인은 선반에 놓인 광채 나는 돌멩이를 상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제 아들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주인은 상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습니다. 결국, 이 돌은 케이프타운의 보석상에게 12만 5천 달러에 팔렸습니다. 지금은 수백만 달러가 넘습니다.
지금 가톨릭의 신앙이 매우 흐려지고 무뎌졌습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성당을 마음의 평화를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집안이 건강하고 잘 되기 위해 다닌다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의 성공이나 가정의 안녕과 내면의 평화를 주는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당은 지옥에 안 가기 위해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구원을 주는 곳이 됩니다. 그래야 구원을 위해 우리 손바닥 위에 올려지는 그리스도의 성체의 가치가 제대로 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오지 않으니 이탈리아 베네치아 운하의 물이 처음으로 맑아졌고 지나다니는 물고기까지 보인다고 합니다. 대기도 맑아진 느낌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신앙도 이렇게 깨끗해진 모습으로 이 힘든 시기를 함께 위로하고 인내하며 부활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어쩌면 한국과 바티칸 교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오랜 기간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시기를 지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말 성체가 우리 구원의 유일한 희망임을 믿는가?’라고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체 한 번 영하기 위해 몇 달을 산길을 넘어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호랑이에 물려 죽고 눈 속에서 파묻혀 죽었지만 성체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지금은 주차장이 부족하다거나, 여행을 가야 할 일이 있다고 주일이 되어도 성체를 영하지 않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어떤 분들은 정말 보석을 장난감과 맞바꾸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처럼 성체를 바라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성체를 바라보며, 이것이 아니면 다 지옥행임을 절실히 믿을 때, 양식이 되기 위해 말 밥통에 놓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요셉의 마음과 같아질 것입니다. 성체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물론 이런 일은 지나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교훈은 깊이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성체는 우리를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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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이다. 우리는 성 요셉을 성가정의 수호자, 보편교회의 수호자이시며, 노동자, 가정, 동정자, 환자, 임종자의 주보로 공경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서에서는 ‘의인’, ‘동정녀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다. 원죄 없이 잉태 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시다.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거룩한 신비이다. 성령께서 감추시어 눈에 띄지 않는 성사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모습을 본다.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 일을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그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를 죽음에 내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파혼하려 했을 것이다.
이때에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또한 요셉이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아는 아무 죄가 없으며 동정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를 위해,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라고 했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즉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이요 구원자는 나밖에 없다.’(참조:이사 43,3; 호세 13,4)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 즉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되었다. 천사의 말은 동정 어머니를 그의 아내로 부를 자격을 갖도록 하였다. 요셉 성인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고 하는 것이다. 오늘 1독서에서도 보면 다윗은 하느님의 뜻을 따른 사람이었다. 다윗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했던 상급을 하느님께서는 다윗 가문과의 약속을 통하여 그의 왕권을 튼튼히 해 주시겠다고 하신다.
2독서에 나오는 말씀의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의 모습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자세가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탁하여야 한다. 우리 인간의 나약한 면만을 생각하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죄의 경중보다도 나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주시며 당신 앞에 나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런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도 요셉과 같이, 다윗과 같이, 아브라함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즉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그 삶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자. 요셉 성인이 어떤 큰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전한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 무슨 능력보다도 믿음으로, 신앙으로, 참된 삶으로 그분이 의롭게 여기시는 나로 변화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의 조그마한 행위 하나 하나가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협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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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요셉 성인은 복음서에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는 이야기에 언급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요셉 성인은 예수님의 탄생에, 구원자의 탄생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다윗의 후손을 일으켜 영원한 왕좌에 앉게 하겠다는 하느님의 예언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성취됩니다. 오늘 복음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으며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명확하게 전합니다. 이러한 사건에서 요셉은 눈에 띄게 등장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마리아의 잉태를 지켜 주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합니다.
의로운 요셉. 성경에서 의롭다는 표현은 하느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계명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칭찬입니다. 그렇기에 이 표현은 요셉을 가장 잘 묘사합니다.
요셉 성인의 의로움은 구원 역사와 성가정의 바탕이 되고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됩니다. 그 의로움은 믿음에서 옵니다. 바오로 사도도 율법과 구분되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말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처럼 요셉의 의로움은 예수님 탄생의 사건이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르는 행동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요셉 성인의 모습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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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의로운 사람 요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1.24)
결혼을 앞둔 요셉의 소망은, 또 그의 인생 계획은,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서 평범하고 소박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그리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중대한 시련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은 아니고, 아마도 마리아가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요셉에게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믿었을 것이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을 것입니다. 믿었으니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마리아를 보호하려고 한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마리아를 안 믿었다면, 그것으로 요셉의 이야기는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말을 믿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라는 말은, 요셉이 자기 자신의 희생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보호하려고 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이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이 아니라, 파혼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하면, 사람들은 마리아가 낳은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와 아기는 무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또는 가정을 버린 사람이라고 요셉을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그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을 감수하고서 마리아와 아기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작정하였다.’라는 말만 있고, ‘실행하였다.’라는 말이 없는 것은, 요셉이 그렇게 결심하긴 했지만 차마 실행하지는 못하고 계속 고민하고 기도했음을 암시합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신 일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탄생 예고 때에 마리아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라는 말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나타내고, 또 ‘메시아의 보호자’로 선택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는 말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말은, 마리아가 요셉에게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알려 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고, 또 이 모든 일이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라는 말은,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버지의 권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직접 지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구세주)라는 것을 알려 주는 말입니다.
이야기를 보면, 요셉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기계적으로(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고, 천사의 말을 묵상하고, 믿고,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천사의 명령’(주님의 명령)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이 명령은 자유의지 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라, 요셉 자신이 자유의지로 결단해야 하는 ‘부르심’입니다. (요셉이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대답했어도,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럴 인물이었다면 선택되지도 않았겠지만......) 어떻든 요셉은 자유의지로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요셉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면서, 자신의 인간적인 소망과 계획 등을 모두 버린 일이고, 응답함으로써 지게 될 십자가들을 기꺼이 받아들인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는 예수님 말씀을 ‘온 삶으로’ 실천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셉 자신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천사가 전해 준 주님의 부르심에 그가 응답한 일은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믿음과 응답과 의로움을 본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지금 나에게 생긴 일이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나? 첫 번째로 할 일은 ‘기도’이고, 두 번째로 할 일은 영적 지도자에게 조언을 청하는 일입니다.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는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가 요셉보다 먼저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과 자기들의 믿음을 요셉에게 증언해 주었을지도 모르고, 그 ‘증언’을 통해서 요셉을 위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생활입니다. 특히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은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가 받은 ‘부르심’이 정말로 ‘하느님의 부르심’인지를 식별하는 일과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결정하는 일과, 응답한다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등을 영적 지도자와 함께 의논하고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영적 지도는 대체로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해 주지만, 신앙생활을 나보다 더 많이 한 이웃이나 친구나 가족이 해 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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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성웅 베드로 신부님]
<참된 의로움>
요셉 성인은 예수님께 세상에서 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빛나는 그의 덕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계실 때 그가 실천했던 참된 의로움이었습니다.
문득 이름도 인품도 요셉 성인과 무척 닮은 한 형제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인 자매가 남편의 행동 때문에 난감해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습니다.
받을 게 있는 친구에게 돈을 받아 오라고 남편을 보냈더니만, 빚진 친구가 아이만 남겨둔 채 잠적해버린 바람에 돈을 받아 오기는커녕 친구의 아이가 애처롭다고 데려왔다는 겁니다.
“한동안 이 아이까지 키우려면 허리띠 바짝 졸라매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 하는 한 마디만 던지면서 말입니다.
새삼 요셉 성인의 의로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내세우기 위한 명분 정도로 여깁니다. 정당방어라는 명분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요셉 성인도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해만 끼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이러한 논리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습니다. 그분은 미래를 알 수 없는데도 희망하며, 침묵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성실하게 응답하십니다. 그의 의로움이 참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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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성 요셉의 신앙>
요셉은 히브리어 ‘더하다’에서 나온 말로 ‘하느님께서 후손을 더하시기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성조 야곱의 아들 요셉에게서 유래하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성 요셉은 예수님을 기른 양부이며,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구세사에서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그가 하느님께 믿음으로 순종했으며, 가정을 위해서 묵묵히 바친 희생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나자렛에서 목수로 일하면서 성 가정의 의미와 노동의 신성함을 일깨워 준 그의 삶과 신앙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많은 본보기가 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기러기 아빠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서 혼자 떨어져 열심히 뒷바라지만 하는 아버지들입니다. 참 슬픈 현실입니다.
세상살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지만 가족이 떨어져 지내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금 덜 쓰고 가난해도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발걸음과 든든한 어깨가 우리 자녀들을 더 풍요로운 삶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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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적인 의로움>
의로움은 남성의 덕, 사랑은 여성의 덕이라 해도 좋겠지. 그렇기에 반대로 독선은 남성의 악덕, 질투는 여성의 악덕이라고 해도 될까?
의로움이 남성의 덕이라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을 특별히 의롭다 추어줄 이유가 있을까? 사랑-이해적인 여성에 비해 남성이 사리-판단적이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의로움을 중시하고 의로움에 강점이 있다 해도 모든 남자가 다 의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진리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진리를 저버리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것이 人情입니다. 인정에 끌리어 우리는 의로움을 잃기도 합니다.
잘 아는 이의 딱한 사정을 봐주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이 욕심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면 진리가 보이지 않고 진실도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려면 이런 인정과 욕심을 칼처럼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은 과단성 있게 잘라내야 하지만 사랑마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냉정할 필요는 있어도 무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정함과 사랑 없음은 가장 큰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지만 최고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사유화하지 않고 진리도 사유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최고의 사랑으로 진리에 의합함으로 신적인 의로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셉은 이 신적인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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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거울을 보면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보입니다. 웃으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웃습니다. 찡그리면 거울 속에 비친 나도 찡그립니다. 거울 속에 비친 주름, 눈, 코, 입, 귀, 머리카락이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거울은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의식, 마음, 생각, 신념입니다. 내가 온 길을 보면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입니다. 내가 온 길이 절망, 어둠, 두려움, 욕망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할 길은 슬픔, 분노, 갈등, 고독의 길이 될 겁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인내, 온유, 희생, 친절의 길이었다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일 겁니다. 믿음, 희망, 사랑, 나눔의 길이 될 겁니다.
사순시기는 나의 삶을 십자가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겁니다. 삶이 극단적이라면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누군가의 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가꾼 사랑의 밭을 망쳐버립니다. 좋을 때는 모든 것을 줄 것 같이 행동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모든 것을 부술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의 삶이 그렇습니다. 삶이 거짓과 위선이라면 돌밭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 진실의 빛이 비추면 곧 무너지고 맙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들추어내지만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감추려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말하지만 실천하지 않았던 위선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삶이 이웃을 억압하고, 무시한다면 가시밭에 떨어진 씨와 같습니다. 가야파는 대사제였지만 자신의 권위와 능력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빌라도는 총독이었지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습니다.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지만 ‘갑질’의 삶을 사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결혼 전에 잉태한 것을 알았던 요셉 성인은 조용히 파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요셉은 마리아를 상대로 고소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법은 무척 엄격하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재판을 받고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기분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면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을지도 모릅니다. 요셉 성인이 법대로 했다고 해도, 기분대로 했다고 해도 당시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명백히 마리아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고발하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 한바탕 난리를 치지도 않았습니다. 말 할 수 없었던 마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였고, 조용히 파혼만 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커다란 배려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셉은 이제 또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의로운 삶’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꿈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 역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했습니다. 유명한 겟세마니의 기도입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잔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사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놓고 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 신앙은 은총을 주며, 그 은총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때가 많습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기준이 되곤 합니다. 왜 공부를 하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돈이 삶의 중심이 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돈을 벌고, 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어서 양심을 팔고, 사람을 속이고, 소중한 것들을 멀리합니다.
오늘 성 요셉 대축일을 지내면서 나의 삶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성 요셉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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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 뜻>
마태오 1,16.18-21.24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하늘 뜻>
하늘 뜻
남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
곱게 품고
낯설고 두려운
길을 떠난다
쓰라리게 다가오는
헤아릴 수 없는
하늘 뜻
나를 넘어
온 누리 품으리라
믿고 바라기에
목숨을 걸고
먼저 길을 나선
사랑하는 이의
곁이 되어
하늘 뜻이 되고자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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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미 저희 본당에서 강론을 들어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아버지는 외국에서 일을 하셨으므로 자주 뵙기 힘든 분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셔서 집에 머무시는 시간은 고작 서너개월 뿐이었을 뿐, 아버지는 항상 외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저에게 친구와도 같으신 분, 언제나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주셨고 무엇보다 자주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실한 신앙은 어머니 못지않게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 중 유난히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휴가를 나오신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던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기타를 치며 흥에 겨워 춤을 추고 누나는 피아노를 치는 식이었는데, 그 노래들은 제가 아버지를 통해 배운 동요들 혹은 오래된 가요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오빠 생각, 섬집 아기, 등대지기, 바위섬과 같은 곡들이었는데 서정적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불러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사들을 하나 둘 곱씹어 보면 여기에는 공통된 주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곡들인 만큼 대부분 가사를 아실 텐데 1절만 뽑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이 노래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외로움, 혹은 사랑하는 마음이고 비교적 쓸쓸한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러한 노래를 우리에게 왜 들려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담아 고요히 읊조렸던 노래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막연한 제 추정일 뿐,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계시기에 직접 물어볼 수 없는 탓입니다.
특별히 이 노래들 중에서도 등대지기의 가사가 저에게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어쩌면 아버지의 삶이란 이러한 등대지기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가끔은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얼어붙은 달그림자가 삶에 드리워질 때가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한 겨울의 거센 파도 같은 시련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떨어진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것인지 저는 몇 년의 유학생활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묵묵히 우리 가족들과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아버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셉 성인 대축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복음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온화한 아버지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셉의 삶 또한 묵묵한 등대지기의 삶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주로 순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야 할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한편 이에 비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키운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종종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오늘의 말씀에 집중해보면 바로 아버지 요셉 역시 성모 마리아 못지않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분이었으며 과묵한 태도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셉은 마리아에 비해 나이가 아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평소에 성실함과 의로움으로 마을에서 평판이 좋던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인간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로인해 마주하게 될 사람들의 비난이 충분히 두려웠을 법 합니다.
특별히 누군가 자신의 흉을 볼 때,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오해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불편합니다. 누구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길 원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기본적인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잉태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요셉에게 있어 우리가 겪는 이러한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처녀가 임신할 경우 돌로 쳐 죽이기 까지 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제기될 아기의 출생에 대한 험담, 자신이 사랑했던 약혼자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 더불어 설사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한들 갖가지 부정한 소문들을 견디어 내야 하는 심리적인 고통. 일생 동안 이 모든 것을 감내했을 아버지 요셉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슬프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파혼을 남몰래 결정하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에 요셉은 천사의 명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 행동은 결코 단순한 응답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과 관련된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신앙으로 떨쳐버리는 큰 용기가 기반이 된 응답입니다.
그럼으로써 요셉과 마리아의 순명은 우리 인간 모두의 운명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는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셨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침묵 중에 가정을 지키고 아기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신 분이었습니다.
비록 나이가 많은 와중에 성가정을 이루어 예수님의 공생활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성경에는 얼마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열매를 맺는 데에 있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오늘 이러한 요셉의 순명의 자세, 그리고 묵묵히 성가정을 이루고 지켜낸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 명의 등대지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우리의 삶에 얼어붙은 달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한 겨울의 거센 파도 같은 시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이를 버티어 낼 때, 우리는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묵묵히 구원의 씨앗을 세상에 뿌린 아버지 요셉의 마음처럼--. “요셉이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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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온전히 머무르시기를…>
언젠가 피정하는 특강 중에 “지금 나의 책임감은 어떠할까?”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특강을 마치고 피정하신 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피정 때에 받은 은총을 자녀들에게 전화해서 나누어주십시오.”
그 다음 날에, 피정 때에 있었던 나눔 발표 시간이었습니다. 어떤 자매가 그날 밤에 자녀들에게 전화해서 “신부님이 오늘 피정 중에 받은 은총을 너희와 함께 나누라고 해서 이렇게 전화했다.”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할 수 있다, 뭐든지 된다.”라는 믿음에 은혜를 받아라.”
그리고 전화를 끊었는데 금방 다시 그 자식한테 전화가 왔대요.
“엄마의 기도 때문에, 엄마가 있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가 전화한 그 시간에, 그 자식이 어떤 일을 두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엄마 전화를 받고 힘과 용기가 생겼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다양한 방법으로 은총을 받으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나의 행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의 배필이신 성 요셉 성인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성모님과 파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혼을 통한 사랑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모님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평생 가족을 지키기 위해 책임감 있게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이집트로 피난도 가고, 조그만 마을 나자렛에서 목수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십니다. 이 모든 책임 있는 모습이 바로 천사가 명령한 대로 행하는 “의로운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물론 처음엔 요셉 성인도 성모님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요셉 성인의 번민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수많은 밤을 잠도 못 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 성인이 내린 결론은 조용히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어주는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 성인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요셉 성인을 바라보십시오.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고운님들에게 평화가 없습니까? 억울하고 분노하신 일들이 많습니까? 하느님께서 저희를 향하여 분노하시기를 더디게 하시는 것처럼, 고운님들도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와 미움을 더디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대신 처지 바꾸어 자비를 베풀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어렵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하느님의 의로움을 품고 살았던 요셉 성인에게 주님의 천사가 찾아와서 위로해 주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를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요셉 성인과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저희가 하느님의 의로움을 품고 산다면, 주님의 천사가 고운님들에게도 하느님의 위로를 해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무서워하지 마라. 나의 성령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아멘. 알렐루야.
저 두레박 사제도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할 수 있다.’ ‘뭐든지 된다.’라는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복된 하루가 될 것이라 믿으며, 요즘 고운님들이 코로나 19로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온전히 주 예수님과 성모님 안에서 머무르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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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41)
♧♧ 시편 78편 9절…
"에프라임의 자손들, 활로 무장한 그들이 전투의 날에 등을 돌렸다."
* 에프라임의 자손들...에프라임은 야곱의 맏아들 르우벤을 대신하여 장자의 명분을 얻은 요셉(역대기 상권 5장 1-2절. 참조)의 둘째 아들로 역시 요셉의 맏아들인 므나쎄를 제치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인물입니다.(창세기 48장 17-22절. 참조) 그의 후손들은 향후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때부터 사울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대표적 지파의 역할을 하였습니다.(판관기 3장 27절, 7장 24절, 8장 1-2절, 10장 9절, 12장 1-6절. 참조) 여기서도 ‘에프라임 자손’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체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다윗 시대부터 이스라엘 지도자 위치는 유다 지파가 차지하게 됩니다(67-68절. 참조).
* 활로 무장한 그들이...
이는 이스라엘이 상당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역대기 하권 17장 17절. 참조)
* 전투의 날에 등을 돌렸다.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습니다. 첫째, 엘리 사제 시대에 이스라엘이 필리스티아인들에 의해 수치스럽게 패하여 하느님의 계약 궤를 빼앗긴 것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사무엘 상권 4장 10-11절. 참조) 둘째, 에프라임 지파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게제르에 사는 가나안 족들을 쫓아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실패한 사실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셋째, 어떤 특별한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에프라임의 지도권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있어 무기력했던 상태를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판관기 2장 14절, 3장 8절 13절, 4장 1-2절, 6장 1절, 7장 12절. 참조) 이스라엘 역사상 에프라임 지파가 다른 지파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을 대적하는 치명적인 배신행위를 하도록 꾀었던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세 번째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57절. 참조)
♧♧ 시편 78편 10절…
"그들은 하느님의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걷기를 마다하였다."
* 그들은 하느님의 계약을 지키지 않고...
이는 에프라임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느님과 맺은 계약(탈출기 19장 15절, 24장 1-11절. 참조)을 저버리고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자신들의 능력만 믿고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느님이 주신 계명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신명기 29장 25절, 31장 20절. 열왕기 상권 19장 10절. 참조).
*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걷기를 마다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느님의 법을 배우기를 싫어하여 고의적으로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는 말입니다(판관기 2장 11-13절, 8장 33절, 10장 10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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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두 눈이 모두 잘 보이던 사람이 어느 날 사고가 나서 한쪽 눈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한쪽 눈을 못 보게 된 것을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떠할까요?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각막 기증자가 나타나서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행복하다고 생각할까요? 불행하다고 생각할까요? 똑같이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구는 불행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구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행복을 만드는 ‘나’를 보지 못하고 남 탓, 환경 탓, 주님 탓을 외치면서 행복하지 못한 ‘나’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나’는 누가 통제를 할 수가 있을까요? 당연히 ‘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주님 탓, 남 탓, 환경 탓 등 외부에서 그 이유를 찾다가는 화만 나고 절망 속에서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나만의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남편인 동시에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요셉 성인 대축일인 오늘, 요셉 성인에 대해 묵상을 해 봅니다. 성모님과 약혼한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에게 큰 혼란을 주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아직 같이 살기도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또 꿈에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천사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건은 보통 사람들이 평생을 통해서도 겪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특히 성경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나오듯이, 율법에 어긋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상황에 고뇌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은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어 예수님과 성모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합니다.
불행의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복의 상황으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곁에서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며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로 계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의 이유는 분명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의 이유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행복을 만드는 ‘나’를 바라보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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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많은 판단을 다른 사람을 향해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무시하고 때로는 상대를 향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에서 가장 잘 ‘나’를 우리 각자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완벽한 모습도 아니고 끊임없는 실수를 반복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나지도, 어쩌면 가장 못났으면서도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자기 자신을 비하하며 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감을 놓아버리고 수동적으로 살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잘난 ‘나’이듯, 남들도 자기 관점에서는 잘난 ‘나’라는 것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라고 말하면서 뒤로만 물러서는 것이 겸손은 절대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소중하듯, 남 역시 자신에게 소중함을 인정하도록 합시다. 이것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며, 나를 더욱더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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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인義人 성聖 요셉 예찬禮讚>
-연민, 믿음, 순종-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오늘 미사 입당송이 참 적절하여 고무적입니다. 오늘은 참 자랑스런 저희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의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저희 수도형제들이 영원한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성 요셉입니다.
우리는 성 요셉을 통해서 참 신앙인은 물로 참 아버지 상을 만납니다. 아버지가 된다면 성 요셉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 요셉 축일 미사때마다 부르는 입당송 성가(280)는 늘 들어도 신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언제나 우리 마음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1절만 인용했습니다만 이어지는 2,3절 가사도 은혜롭습니다. 수도원 주차장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후덕해 보이는 성 요셉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 성모성월 5월, 성 요셉상 옆 빨갛게 불타오르던 연산홍을 보며 즉시 떠올랐던 시도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빨갛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외관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후덕한 모습의 요셉이지만 내면의 가슴은 흡사 연민의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써놓은 시입니다.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 역시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배경인 예수님의 양부 요셉을 연상케 합니다. 역시 아주 오래전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불암산처럼!”-2000.11.17
성 요셉 수도원을 품에 안고 있는 불암산처럼, 말없는 배경의 자비로운 품이 되어 성가정을 안고 있는 의인 성 요셉 양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어렴풋이 나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 수도형제들의 영원한 롤모델이자 경탄의 대상인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의인 성 요셉은 ‘연민compassion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존중과 배려, 공감의 사람,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공감능력자였습니다. 바로 복음 서두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마리아를 존중 배려한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요셉의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나탄을 통해 다윗을 향한 예언은 흡사 요셉을 향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급기야 의인 성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나탄의 예언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히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예언, 하느님의 꿈이 아닙니까? 바로 이에 결정적 공헌을 하신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연민의 사람 의인 성 요셉입니다.
둘째, 의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밖으로는 늘 거기 그 자리 배경의 불암산처럼 정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성요셉이었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었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얻은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참으로 침묵의 사람, 들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 의인 성 요셉입니다. 주님과 늘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눴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던지 다음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은 침묵중에 늘 당신의 말씀을 경청했던 믿음의 사람, 성 요셉에게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자초지종 속내를 밝히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의인 성 요셉을 구원한 복음 말씀입니다. 요셉의 어둡던 내면이 주님의 계시의 빛으로 환해 졌음이 분명합니다. 진정 이런 주님 체험의 기억이 요셉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했을 것이며 장차 있을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에 바오로 사도가 아브라함에 드렸던 고백을 그대로 성 요셉에게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참으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큰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 이어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자DNA’를 고스란히 전수 받은 요셉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의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자비의 바다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순종의 사람, 의인 성 요셉이었습니다.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침묵도 경청도 겸손도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순종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자발적 지체없는 사랑의 순종, 겸손한 순종의 사람이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순종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강요할 수 없는 순종이요, 이런 요셉의 자발적 순종 덕분에 하느님은 당신 구원 역사의 꿈을 펼쳐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요셉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음 같이 표현했을 것입니다.
“나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나의 자랑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신앙의 어둔밤’을 통과해 가고 있는 이 은총의 사순시기, 선물같이 주어진 의인 성 요셉 대축일이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환히 밝힙니다. 위로와 평화를 주고 용기백배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의인 성 요셉을 닮아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얼마전 요셉 수도원을 방문했던 시찰관들의 조언을 나눕니다.
“이 수도원의 주보 성인이 얼마나 잘 선택되었는지 놀랍다. 성 요셉은 성실함, 단순성, 침묵, 고된 노동, 그리고 책임감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집을 제공하신다. 그 집이 바로 요셉 수도원이다. 이곳은 여기서 매일 생활하는 수도승들과 몇 시간이나 며칠 간 수도승들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찾아 오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것은 매우 소중하다.”
얼마나 고무적이며 격려가 되는 조언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의인 성 요셉처럼, 연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 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시편89,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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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중간은 없다>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 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 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세상은 좌파, 우파, 보수, 진보로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좌파, 우파, 보수, 진보도 하느님 편이어야 합니다. 사탄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 모두가 한 편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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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성가정의 보호자이신 요셉 성인을 기리는 오늘, 미사의 독서들 안에는 하느님 사람 셋이 등장합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다윗과 제2독서의 아브라함은 구약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 각별히 사랑받은 이들로 꼽힙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받은 축복은 물론 그들의 실수와 약점에 대해서도 주저없이 펼쳐놓지요.
그런데 신약의 문턱에 선 요셉에 대해서 성경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라는 수식 외에 어떤 표현도 절제합니다. 어디에서도 요셉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예수님의 배경으로서밖에는 별다른 일화가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요셉이 무얼 두려워했을까요? 아니, 천사가 간파한 요셉의 두려움은 무엇일까요? 보통의 두려움이 자기가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데서 오는 감정이라면 지금 요셉의 상태에는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배신당했다는 분노로 떨고 있을 법도 하니까요.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 자기가 당할 모욕이나 난처함을 두려워한 것이 아닐 겁니다. 관습에 따라 마리아에 대해 권리를 가진 약혼자로서 그녀를 억지로라도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마리아의 행복에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염려에서 나온 두려움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마태 1,19)하지요. 혹시 마리아에게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다면 자기가 조용히 물러서 주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마리아의 행복을 위한 포기의 결단이지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
하지만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마음을 바꿉니다. 뭔지 정확히 잘 몰라도 정결한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리라고 믿게 되지요. 두려움이라 표현된 그의 내적 갈등이 꿈속 천사를 통해 개입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일순간 정리된 것입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생각이나 이념에 있지 않고 실행에 있습니다. 그는 믿고 행동함으로써 그 자신이 진정한 의로움이 되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좌를 약속하십니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하느님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맡겨 이 약속을 이루십니다. 제1독서와 화답송에 무수히 반복되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이 약속이 단지 이스라엘 왕좌의 혈통적 연속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로마 4,13)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만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이 보장된다고 역설합니다. 복음사가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에게 부여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표현은 요셉이 육의 질서뿐만 아니라 영의 질서 안에서도 다윗 왕좌와 예수님을 잇는 계승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마리아와 요셉, 두 충실하고 소박한 의인들의 협력으로 실현의 물꼬가 트입니다. 인간적 합리적 계산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이해하기를 중지하고 믿기를 선택한 이들의 결단이 있었기에 구원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오늘날 과학과 지성이 지배하는 듯한 이 세상에도 믿음으로 복되고 믿음으로 의로운 수많은 마리아와 요셉들이 세상의 격류에 역행해 진리와 사랑의 말씀에 머무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어리석지만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믿고 의탁하며 살아가는 벗님이 바로 그 마리아고 요셉입니다. 믿어서 복되고 믿어서 의로운 우리는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받을 것입니다. 아멘. 피앗.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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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대속의 두 번째 예는 “고통 받는 종”의 예입니다.
“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이사53, 3-6)
-<고통 그 인간적인 것>에서
♣요셉과 고통 받는 야훼의 종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대속적 의미를 알게 됩니다.
이들은 다른 인간들의 선을 위해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대신 보속합니다. 고통을 체험한 구약의 인물 중에서 아무 불평 없이 고통을 받아들인 자가 있다면 오로지 요셉과 고통 받는 야훼의 종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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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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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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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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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난감 극복>
"보이지 않아도 희망한다."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 했습니다.
의로운 사람인 요셉은
납득이 안되는 난감한 상황이고
앞이 캄캄했지만 꿈에 나타난
천사의 알림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고
어떤 처지에서든 믿고 따릅니다.
경제가 어려울때 성요셉을
부르며 기도하십시오!
코로나로 인해 모든게 마비되었고
날이 갈수록 수익은 없고 먹고는 살아야
하니 난감할 수 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노동의 신성함을 충실히 살면서
경제의 주보이신 성요셉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합시다.
'성요셉님 저희를 굽어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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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 1, 24)
봄꽃 하나
피기 위해서도
수 많은 사랑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온 삶으로 끝까지
보살펴 주십니다.
지켜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뜨거운 믿음의
약속입니다.
요셉 성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끝내 주님의
양부가 되게 합니다.
사랑 받고
사랑 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됩니다.
사랑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믿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뜨겁게 흐르는
사랑의
새역사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믿음
공동체와 사랑은
하나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신앙의
참된 실천임을
믿습니다.
참된 실천은
참된 순명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순명의 길을
우리 또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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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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